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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87화 (8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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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카지노 VIP 룸은 겉보기만큼은 황궁 못지않게 화려했다.

저녁 홍등가와 빈민가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던 불법 마법사와 이단 사제와 침식자 둘, 그리고 적가면의 사업을 방해하려 적대 가게에서 고용한 용병 열둘을 태워버리고 나니 술이 아주 맛있게 들어갔다.

역시 일하고 마시는 술이 제일이었다.

금장 의자에 앉아 은잔에 얼음을 채우고 있으려니, 텐티아 경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썩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대공 전하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퍼진 것 말입니다. 왜 하필 그때 제가 휴가중이라서…….”

“신경 쓰지 말게. 아무도 안 죽고, 내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도 안 나간 걸로 족하네.”

텐티아 경이 맑고 붉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의외로군.”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내심 그대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나만의 신념을 관철했다.’ 같은 일에 대단한 낭만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네.”

텐티아 경이 짧은 붉은 머리를 스스로 헝클어트리며 웃었다.

“모든 기사는 다리 위에서 ‘주군,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나 ‘도련님.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한 번쯤 하고 싶어하기는 합니다. 주군이나 여인을 위해 누명을 감수하고 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싸우는 건, 언제나 이 심장에 피가 끓게 만들죠.”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기사는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아도 괜찮지만, 누군가에게는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정면에서 기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제대로 된 기사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놈의 손가락이나 목을 잘라 버려야 하지요.”

“그렇군.”

“나쁜 소문이 퍼지는 건 상관없습니다. 호사가들이 떠들면 멋모르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뿐이니까요. 하지만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분명하다면, 기사는 반드시 그를 찾아가 자비를 받을만한 꼴로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칠흑 학파의 원로를 베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텐티아 경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얼굴로 웃었다.

“저도 혼자서는 무리겠군요. 백금 기사단 시절의 동료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그녀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기사들끼리 얼마나 의리로 뭉쳐 있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니 텐티아 경은 그렇게 앙숙이라던 흑철 기사단 쪽과도 연이 있었다.

요새는 매일 와이번을 타면서 와이번 라이더가 많은 청은 기사단이랑도 많이 가까워진 거 같고.

……네 기사단의 기사 200명 중에 한 180명은 모이는 거 아니야?

그 정도 숫자가 기동한다면 제이릴리스가 상아탑을 무너트리려 하는 줄 알겠다.

“하하하하.”

나는 승패와 관련 없이 거대한 전력 공백이 발생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웃었다.

“되었네. 경. 알잖는가?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게 꼭 나쁜 일도 아니야. 폐하가 못된 황형 때문에 고생하신다는 식으로 동정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그래도 이물 침입을 아무도 안 죽게 막아냈는데, 그걸 사실 수천을 죽이려 했다는 식으로 떠드는 건 선을 넘었습니다.”

“화내 줘서 고맙네. 하지만 정말 되었어. 경은 내가 수천을 죽이려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 아는가?”

텐티아 경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서 답하게! 나 그런 사람 아니라네.”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는 황족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아니네. 경은 나에 대해 아니 상관없지. 그리고 세상에는 나에 대해 몰라도 상관없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오늘은 내가 상납, 아니. 기부금만 받고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었겠나? 궁에도 좋은 술이 많은데 말이야.”

텐티아 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정답일세.”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적가면을 따라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텐티아 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저들은 뭐 하는 자들입니까? 생긴 걸 보니 이목구비가 묘하게 흐릿한 게 딱히 생산적인 일을 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붉은 띠를 고쳐 매고 하얀 제복 앞 단추 두 개를 잠그며 말했다.

“의원.”

* * *

놀랍게도 제국 수도에는 의회가 있다.

물론 그곳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은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받지 못하면 소각장으로 들어가며, 황제는 의회 소집권과 해산권이 있다.

그 정도 권한을 갖춘 황실이 왜 의회를 용인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조금 대답이 달라진다.

애초에 의회를 만든 게 황실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직할령을 안정시키려면 필요한 법과 제도는 많은데, 아무리 뛰어난 황궁의 행정관들도 그걸 다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들어 보고 괜찮으면 하고, 안 괜찮으면 안 하겠다고 의회를 만든 거다.

불만 있으면 괜히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 죽지 말고 의회에 사람을 보내라고.

의회에는 크게 다섯 세력이 있었다.

영지를 하사받고 영주가 되는 대신 연금을 받고 수도에 머물기를 택한 궁정 귀족들.

광명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아카데미 교수 등의 지식인들.

황실 총독령에서 보내온 행정관들.

그 외 권력욕이나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야심으로 불타는 수도의 평민들.

여기서 궁정 귀족들은 의원직이 세습되고, 고위 성직자들과 지식인들, 총독령 행정관들도 그들 몫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진짜로 투표로 뽑는 건 평민 의원들 뿐이고, 그나마 출마하는 의원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이나 길드의 간부급 장인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건, 당연히 평민 출신 의원들이었다.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들어차니 넓은 VIP 룸도 북적북적했다.

텐티아 경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발렌 대공 전하. 대체 왜 의원들을 만나시는 겁니까? 이제 설마 의회에까지 전하의 암수를 뻗으시려는 겁니까?”

몇몇 의원들이 칼 찬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 얼굴들을 잘 기억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네. 황제 폐하와 수도의 시민들, 그리고 총독령의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리 많으니 이 발렌시아누스, 기쁠 따름이야.”

“전하.”

“텐티아 경이 그대들의 악명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데, 누가 그대들이 왜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나려 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이 열 개도 넘게 올라왔다.

텐티아 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회색 정장을 입은 한 중년의 여인을 지목했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름은 지젤, 배움의 거리에서 출마하려고 합니다. 경력은 없습니다. 제 주요 공약은 배움의 거리의 패싸움을 막아 인근 주민들과 학생들 간 관계를 회복하는 게 첫 번째고, 학생들이 빈민으로 전락하지 않게 아카데미들의 장학금 지급액과 그 비율을 늘리는 게 두 번째, 학생 수의 일정 비율 이상 기숙사를 짓도록 해야 한다는 게 세 번째입니다.”

텐티아 경이 그녀를 보는 시선을 바꾸었다.

방금까지는 희미한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면, 이제 온화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렇다는군, 다음.”

나는 그 옆 중년의 사내를 지목했다.

“하뮌입니다. 4선이며, 선착장 지역에서 출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요 공약은 선착장 야간작업으로 인한 소음을 막기 위한 방음벽 설치입니다.”

텐티아 경이 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보다 한 대여섯 살이나 많아 보이는 청년을 지목했다.

“알센입니다.”

그는 성문 쪽 거주구에서 출마할 예정이었고, 역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공약을 이야기했다.

* * *

나는 의원 후보들에게 일련의 공약을 발표하게 한 뒤, 텐티아 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제 생각보다는 괜찮은 자들이었군요. 선입견이 있던 거 같아 부끄럽습니다.”

“선입견 아닐세.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유형의 의원들도 많으니. 예를 들자면…… 하뮌, 내가 생각하기에 그대의 친척이나 친구 중에는 건축 길드의 고위직이 있을 거 같은데, 아닌가?”

지목받은 중년의 사내에게 수십 개의 눈동자가 쏠렸다.

텐티아 경은 잠시 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건축 길드의 고위직이 친구나 친척으로 있으니 그 소음을 어떻게 차단해야 하는지 아는 거겠지. 야간 작업을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소음벽을 설치하자는 발상도 그래서 나올 수 있던 거고.”

하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경이 생각하는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고 말이야. 여기 모인 이들이 한 말 모두 양날의 검이라네. 나 같은 사람은 그걸 곡해하거나 선해할 수 있지.”

“어렵군요. 제게 머리 쓰는 일 시키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습니다만. 게다가…… 전하는 아직 왜 이들이 전하를 찾아왔는지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젤을 바라보았다.

“지젤. 텐티아 경께 왜 나를 찾아왔는지 설명해 주겠나? 경멸해 마지않을 홍등가의 지배인을 통해서까지 말이야.”

지젤이 이를 한 번 악물고는, 말을 열었다.

“기사님. 혹시 의원 후보 기탁금이라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처음 듣는 말이네.”

“음…… 종자 때 검을 바치고 기사가 되었을 때 다시 돌려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젤이 비유를 들었다.

“종자 따위는 검을 바칠 수 없네. 그리고 기사에게 검을 돌려주는 건 충성 맹세를 깨겠다는 뜻이야.”

천성 기사인 텐티아 경이 그 비유를 걷어찼다.

지젤이 잠시 당황하다 다음 비유를 들었다.

“아카데미 검술학부를 졸업해도 기사 작위를 주시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 실력은 없고 돈만 있는 쓰레기들이지.”

“그들에게 실력을 기르라며 엄청난 돈을 입학할 때 미리 맡겨 놓는 겁니다. 그리고 졸업시험을 통과 못 하면 안 돌려주죠.”

“그건 조금 이해가 되는군.”

지젤이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에게도 비슷한 제도가 있습니다. 그게 기탁금입니다. 몇 표 이상 얻으면 미리 낸 돈을 돌려주는 것이죠.”

“어째서 그런 제도가 존재하는가?”

“최소한의 자격과 인망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후보로 난립해 말도 안 되는 공약을 내걸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대들은 지지자들에게 모금을 받으니, 가난해도 제대로 된 공약만 있으면 기탁금은 낼 수 있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 액수가 금화 150닢입니다.”

“!”

텐티아 경이 눈을 크게 떴다.

“큰돈이군. 물론 의원 중에는 그 정도야 며칠 술값으로 써버릴 부호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그대들이 이곳에 온 거겠지? 설마 발렌 전하가 그대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법안을 청탁하던가?”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부디 그 술수를 그만두소서.”

“경. 오해일세.”

“전하께서는 내면에 사자의 영혼을…… 예?”

지젤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탁금을 내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황족에게 제 필요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이자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서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기탁금과 후보 등록 심사가 모두 면제됩니다.”

텐티아 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쪽은 잘 모르지만, 선거에 돈이 많이 든다는 건 알고 있네. 그걸 생각하면 기탁금을 최대한 아껴야 하겠군. 그래서 발렌 전하를 찾아왔나…….”

그녀가 나를 항해 몸을 놀리며 말했다.

“전하. 그럼 이들에게 서명해 주시기 위해 부른 것입니까?”

“내가 부른 건 아니고, 의원 후보님들이 해 달라고 찾아온 거지.”

“저들의 면전에서 할 만한 질문은 아니나, 제가 후보로 나가는 게 아니니 그냥 묻겠습니다. 몇 명이나 서명해 주실 겁니까?”

나는 빙긋 웃고는 답했다.

“공약은 방금 다 들었잖아.”

“예.”

“그럼 이제 다른 걸 봐야지.”

“다른 거라 말씀하시면?”

“150닢보다만 적은 돈으로 입후보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나?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후보 등록 심사를 피하고 싶은 자들도 있겠지.”

나는 다리를 꼬고 상체를 뒤로 젖혀 소파 등받이에 묻으며 의원 후보들에게 물었다.

“다들 얼마까지 생각하고 왔는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는지, 그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제일 먼저 나선 지젤이 침음성을 흘렸다.

“최근 배움의 거리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들이 많아 활동도 모금도 주춤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건 금화 30닢이 전부입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150닢 중에서 30닢이라. 받는 내 손이 부끄러워질 지경이군. 그 정도 돈을 받을 수는 없네.”

“아…….”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서명만 받아 가게나. 그 돈으로는 옛 제자들에게 고기 수프라도 사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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