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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88화 (8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8화

(88)

지젤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경악했다.

“대공 전하.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바로 들었다. 지젤. 내가 네 이름을 안다.”

진에게 몇 마디 전해 듣기를, 언제나 학생들 편에 섰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미래의 인재들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다오. 그래야 내가 앞으로도 마음껏 패악질을 부리고 다녀도 누군가 뒷수습을 다 해줄 것 아닌가?”

“전하. 꼭 말씀을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텐티아 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뮌이 번쩍 손을 들며 나섰다.

“전하. 저는 금화 300닢을 모아 왔습니다. 공사다망하신 전하께 드리는 제 작은 성의이오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그래. 고맙게 받겠네.”

텐티아 경이 곧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그녀에게 넘긴 뒤, 하뮌에게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게나. 저 금은 내가 잘 쓰겠네.”

“예?!”

“그리고 잊지 말게. 내가 지금 그대의 목숨을 구해줬음이야.”

“전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이십니까? 서명은 어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내가 방금 놈의 목숨을 구해준 게 맞다.

회귀 전에 일어난 사고 중 옛것과 관련되지 않은 것치고는 큰 사고여서 기억하고 있는데, 방음벽 공사 예산과 선착장 보수 예산 중 상당량이 저놈의 뒷주머니로 흘러갔다.

당연히 부실 공사가 일어났고, 제이릴리스가 중앙 운하를 통해 군을 출병시킬 때, 두꺼운 갑옷 입은 정예 보병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선착장이 무너졌다.

제이릴리스가 운하 물을 모두 마법으로 들어 올리며 그들을 구출했지만, 결국 100명이 익사했다.

전투 시작도 전에 정예병 100명을 잃은 제이릴리스는 눈이 돌아갔고, 나를 시켜 하뮌을 한 달 내내 고문하다 죽였다.

내 손으로 가죽 아래 속살을 몇 번이나 보던 녀석하고 멀쩡하게 얼굴을 마주하기 기분이 묘했다.

하뮌은 그냥 의회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그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좋은 일일 거다.

“적가면. 의원 후보님께서 나가고 싶어 하시는데,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으시는 모양이군.”

“예. 발렌시아누스 전하.”

세련된 검은 정장을 입고 붉은 여우 가면을 쓴 그녀가, 멋들어지게 손가락을 튕겼다.

일류 용병 출신 소드 유저 가드들이 들어와 하뮌을 번쩍 들고 나갔다.

“내 돈! 내 돈! 으아아악! 저 망나니 새끼가!”

텐티아 경이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황족 모욕죄를 묻겠습니다.”

“되었네. 틀린 말도 아니잖은가.”

“다음 세대의 황족들을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더 반항하는 자가 나오면 그때 해주게.”

나는 다리 꼬고 앉은 채로 턱짓하며 말했다.

“자. 다들 뭐 하나? 성의부터 표시해주게.”

스물여덟 명 의원 후보들이 눈빛을 나누었다.

방금 일어난 두 사례를 보고 고민하고 있겠지.

동전 하나도 안 내고 서명을 받을 수도 있고, 300닢을 영영 뜯길 수도 있다.

심지어 그건 본래 기탁금과 달리 돌려받지도 못하는 돈이다.

하지만 원래 위험한 도전에는 큰 보상이, 큰 보상에는 위험한 도전이 따르는 법이다.

“200닢입니다.”

성문 근처에서 출마한다는 젊은 사내 알센이 돈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서쪽 성문 옆이면, 그 뒤쪽 빈민가 일부도 자네 구역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 완전히 철거해서…….”

“거기 안 가본 지 1년도 넘었겠지. 적가면. 그가 나가고 싶어 하는군.”

“예. 전하.”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텐티아 경이 그가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전하. 자기 영지에 빈민들이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영주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회에 나간다면 그건 지배가 아니라 대표잖습니까? 그는 의원이 무엇을 하는 건지 저보다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잘 말했네. 경이 기사령 출신이기에 더 잘 비교하는 거 같군. 그는 자기가 그 구역의 영주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네.”

나는 다음 후보에게 30닢에 서명을 받았고, 그다음 후보에게는 50닢에 서명을 받았다.

돈은 아예 안 받고 서명만 내준 후보도 있었고, 100닢에 내준 후보도 있었다.

서른 명이 모두 각자의 결과를 받아 돌아가거나, 돌려보내 졌다.

그리고 다른 의원 후보들을 7일간 하루마다 서른 명씩 더 만났다.

“이게 뭘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사에게 돈이나 세게 하시다니요.”

텐티아 경이 가득 쌓인 금화를 주머니 몇 개에 나눠 담으며 중얼거렸다.

“어허. 이 역시 영광스러운 기사의 의무일세.”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돈주머니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늠름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이건 영광스럽지도 않고 기사의 의무도 아닙니다.”

나는 사두마차에 금화 자루를 실으며 답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었네.”

* * *

제이릴리스의 집무실 책상 뒤 큰 유리창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넓고 텅 빈 그 공간을 가로질러 그녀의 책상 앞으로 향할 때면, 그녀의 등 뒤에서 신성한 후광이 비치는 거 같다.

그게 광명신의 축복인지 감시인지는 회귀 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유리창을 통과한 햇볕이 쏟아지는 백금발은 빛에 녹아든 듯 하얗게 달아오르고, 그만큼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황금색 눈은 진득하게 가라앉아 서늘히 관조하니, 나의 황제께서는 오늘도 아름다우셨다.

“짐이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그날 밤 제게 친서를 내리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건 친서가 아니라 모집하겠노라, 수준의 선언이지 않았는가?”

“결국 2년 전까지 해 먹던 놈들이 그대로 나올 것이옵니다. 제게 온 자들은 동전 한 닢이라도 아껴야 하거나, 최소한의 등록 심사도 면하려는 놈들이겠지요. 돈은 돈대로 넉넉히 챙겼고 인재는 인재 대로 골라냈습니다. 이게 폐하의 뜻이 아니셨단 말입니까?”

제이릴리스가 낮게 웃었다.

“흐흐. 틀린 말은 아니로다. 그래도 그 겁쟁이들이 그리 많이 모여들 줄은 몰랐구나. 자기들까지 숙청할까 두려웠는지, 짐이 즉위하자마자 죄다 사퇴한 놈들이니.”

“그 덕에 괜찮은 인재들도 몇 찾을 수 있었사옵니다.”

“그래. 이왕 열어야 할 의회라면 조금 더 괜찮은 자들로 채워야 좋지 않겠느냐?”

회귀 전 제국 수도 의회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대영주들, 타국, 옛것들을 향한 끝없는 전쟁이 이어졌고, 그 상황에서 신민들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명령의 대상이었다.

제이릴리스가 흡족하니 웃으며 말했다.

“의회를 열면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제국의 수도가, 황실령이 확실히 안정되었다고.”

의회는 오로지 황제만이 소집하고 해산할 수 있었다.

의회를 소집했다는 건 그녀가 황제로서 신민들을 돌볼 생각이라는 뜻이었고, 동시에 숙청의 시대를 끝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숙청의 시대를 끝내겠다.

그것은 더는 숙청할 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숙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회귀 전 그녀는 하루 만에 얻은 황위를 40년 동안 지켜냈다.

이번 삶에서 그녀는 하루 만에 얻은 황위를 2년 동안 지켜냈고, 이제 지켜내는 것을 넘어 군림하고 통치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면…… 다른 대영주들도 폐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대숙청으로 집권했다는 비난은 영원히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피하지 못할 비난이라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교회의 인정, 의회의 개장, 기사단 전력 강화와 상아탑과의 교류.

모두 황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녀는 잘 해내고 있었다.

결국 실적이다.

실적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번 여름이 기대되는구나. 그때 저 아래 알현실에서 충성 맹세를 받을 것이다. 짐의 아버지처럼, 짐의 할아버지처럼, 우리 솔레타라토 가문의 시조님처럼.”

“어느 황제의 즉위식보다 화려하고 웅장할 것입니다.”

“제국의 모든 대영주가 모일 것이다.”

“세상 모두가 폐하의 이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기분 좋다는 듯 씩 웃었다.

“의회가 그 시작이다. 민심이 중요하니 너무 나서지는 말아라. 망나니 놈아.”

“심려 마시옵소서. 황족의 인가로 기탁금을 내지 않은 것은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공개되지 않습니다. 인망 높은 황족의 인가를 받았음은 자랑거리지만, 설마 제게 인가받을 걸 자랑할 미친 자가 있겠사옵니까?”

“그래. 그런 자는 어디에도 없겠지. 이번에 새로 생길 거 같은 구역에도 말이야.”

“새로운 거리가 생기는 것이옵니까? 수도 안에 공간이…… 아!”

빈민가가 된 거리도 당연히 본래 출마가 가능한 구역이다.

그러나 빈민가가 된 이후에는 당연히 의원이 나오지 않았고, 의회 전체 의석에서도 사실상 빈 자리로 취급받았다.

“한 번 다녀오겠사옵니다. 실정을 살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말 안 해도 그리 시킬 것이었다.”

코넬.

그 외다리 소녀가 바꿔낸 걸 확인할 시간이었다.

* * *

널빤지와 천 등을 덕지덕지 붙여 만든 가건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옛 벽돌 건물의 틀이 여기저기서 시원하게 드러났다.

“오늘은 34번 구역 철거다!”

“알겠습니다.”

“어제 23번 건물 보수 공사 완료했습니다. 벽 새로 올리고 3층 복구했습니다.”

보수해야 할 곳은 보수하고 있었고,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곳은 부수고 다시 짓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오늘은 냄새가 달랐다.

토사물, 피, 그 외 끔찍한 것들이 늘어져 있던 기어 다니던 뒷골목과 건물 사이 좁은 길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했다.

“그 건물은 완전히 철거해. 공터로 만들고 포장해서 중앙 광장으로 쓸 거다.”

“이 선을 따라 판석을 걷어내자. 그 판석으로는 빈 곳을 채우고, 여기에는 가로수를 심을 거야.”

“지하수로 통로를 폐쇄할 준비 해. 앞으로는 병사님들이랑 관리인들만 드나들 거다.”

“자경단 모집 중입니다! 신체 건강하고 정의로운 분들은 누구든 좋습니다.”

“벽돌 공장 추가 취업 모집합니다.”

변화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전하. 보십시오. 이제 빈민가라고 부를 수도 없겠습니다.”

나는 텐티아 경이 가리킨 긴 직사각형 건물을 바라보았다.

굵은 나무로 기둥을 올린 커다란 공방이었다.

“대형 공방이군. 길드에서 투자한 건가? 일자리 문제는 크게 줄어들겠어.”

그런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려 일곱 개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옆으로도 자잘한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는데, 저런 큰 공방들이 더 들어설 부지 같았다.

대형 길드나 상회의 관계자들이 벌써 와 있는 게 여기저기서 보였다.

갇혀서 썩어가던 거리에 피가 통하고 있었다.

“기사 나리시다! 예를 갖춰라.”

“나리. 안녕하십니까.”

“나리들이 오셨다.”

나와 텐티아를 향한 사람들의 눈길도 달랐다.

원래 귀족이나 기사가 오면 인간 사냥이 시작될 줄 알고 두려워하던 그들이, 이제 나와 그녀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있었다.

“코넬이 어디 있는지 아나?”

“코넬 조합장님, 아니. 조합장 말씀이십니까? 저 건물 뒤에 있을 겁니다.”

부수고 중앙 광장을 만들 거라는 그 건물 뒤쪽에 웅장한 6층 건물이 서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 거리의 핵심이 될 거 같은 곳이었다.

다른 건물들처럼 널빤지와 천막 등을 뜯어내는 공사가 한참이었는데, 그 앞 공터 화톳불 가장자리에 코넬이 서 있었다.

적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상아색 코트를 입고, 의족을 단단히 딛고, 지팡이를 꼭 쥐고, 아몬의 기운이 느껴지는 간부들 틈에 낀, 영악하고 총명한 소녀가.

나는 코넬에게 눈짓했고, 그녀는 건물 안쪽으로 올라갔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코넬은 사람들의 눈이 완전히 없어진 6층에서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올라와도 괜찮나?”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워낙 잘 지었던 건물이라서 오랫동안 빈민가에서 쓰였는데도 무사했습니다. 이 거리에서 제일 세력이 강한 깡패 두목들이 쓰던 곳이었죠. 이제 제가 두목이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중의적으로 답했다.

“정말 많이 변했더군. 모든 게.”

“냄새를 없애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조금 날이 풀릴 때마다 재를 곳곳에 뿌리고 눈 녹은 물로 바닥을 닦게 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코넬은 외다리 고아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이만하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코넬. 의원 선거에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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