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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0화 (90/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0화

(90)

발렌시아누스의 별궁은 소문과 달리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다.

보석이 가득 박힌 샹들리에도, 금실로 수놓은 태피스트리도, 술 분수와 반라의 미녀들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 정원에는 상록수 여러 그루가 큰 키를 뽐내고 있었고, 저택 안에는 정갈하고 단정한 원목 가구가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었다.

뒤쪽으로는 열 명 정도가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연무장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루디도 발렌시아누스도 백금 기사들의 연무장까지 가지 않고 거기서만 훈련했다.

둘 다 남들에게 보여 좋을 게 없는 무기나 능력을 다뤘기 때문이다.

“발렌 님. 이거 어떡하죠?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루디는 막 나무 기둥 사이를 뛰어다니며 단검을 던지다 내려와 발렌시아누스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발렌시아누스의 왼손 전체가 암적색 비늘로 덮여 있었다.

손톱도 길고 단단해져 마치 암살자들의 무기나, 기이한 건틀릿을 낀 거 같았다.

“방금 용언을 다루다 뭔가 감이 오는 거 같았어.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거 있지? 그런데 갑자기 이 꼴이 되어버렸지 뭐야?”

그가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을 굴리며 웃었다.

“웃지 마세요. 지금 너무 불안하다고요.”

루디가 발끈하자, 발렌시아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불안해. 그래서 웃는 거야. 안 웃으면 울 거 같거든.”

“파란 약은 드셔 보셨어요?”

그가 한쪽 선반 위를 바라보았다.

약병이 세 개나 비어 있었다.

“제어력 문제가 아닌 거 같아.”

“그럼요?”

“내 추측이기는 한데, 방금 강한 힘이 느껴졌다고 했잖아.”

“네.”

“그게 비룡화를 가속하고 힘을 당겨 쓰는 게 아니었나 싶어.”

“그걸 왜 지금 쓰신 거예요?”

루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동시에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몰랐어.”

“네?! 아니…… 그럼 이제 어쩌시려고요?”

“세레라지에 누나 좀 불러주라. 누나가 연구하던 약이 있어.”

세레라지에는 1시간 뒤 도착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의 손을 보자마자 지팡이를 들어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금은 요동을 분노로 불태우면서.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듣고 싶니?”

“좋은 소식.”

“네 예상이 맞았구나. 이 쓸데없는 데에만 통찰력을 가진 동생아. 너는 비룡화가 진행되는 대가로 힘을 당겨쓴 거란다.”

“그런 나쁜 소식은?”

“비룡화가 진행됐잖니. 그건 이제 제어력 문제가 아니란다. 대가의 문제지.”

발렌시아누스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셔츠 소매를 약간 걷어 손을 드러냈다.

하얀 얼굴에 대비되어 비늘로 덮인 손이 어색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네.”

세레라지에가 로브를 벗으며 물었다.

“뭐니?”

“천재 마법사가 나를 도와주려고 양손 무겁게 왔다는 거?”

발렌시아누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세레라지에는 혀를 차며 두 손가락에 전격을 모아 발렌시아누스의 손목을 지졌다.

하지만 그에게 2서클 급 마법은 따끔할 뿐이었다.

“아야!”

“내가 생색낼 때까지 모른 척하고 가만히 있으렴!”

“알았어. 미안해!”

루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울먹거렸다.

다정한 인상의 그녀가 녹색 눈동자 가득 눈물을 머금은 모습은 어지간한 냉혈한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발렌 님을 고쳐 주실 수 있는 거죠?”

세레라지에는 다시 한번 발렌시아누스의 손목을 지졌다.

“너는 네 시녀에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단다. 알고 있니?”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녀를 위해서 나 좀 고쳐 줄래?”

“정말 뻔뻔하구나!”

“칭찬으로 들을게.”

“그러지 말렴. 조금 기분을 나빠하는 게 어떠니? 내게 만족감을 주려무나.”

“그런 비열한 만족감과 병적인 가학성은 누나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세레라지에가 눈으로 욕을 하며 가방을 열었다.

붉은 약은 시험관처럼 긴 유리병에 담겨 있었고, 푸른 약은 배가 불룩한 호리병처럼 생긴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둘 모두 약액 안에 하얀 연기 같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결국 나도 다시 파란색이 되더구나. 결국 파괴 후 안정인데, 그 계열 시약들은 어찌 된 게 어떻게 섞어도 파란색이야.”

“바스타틴의 싸구려 파란 약?”

“왜 네 입으로 들으면 바스타틴도 세레라지에처럼 들리는 건지 모르겠잖니?”

“왜 빨간 약은 저 관에 들어 있고 파란 약은 아직 저기 들어 있어?”

발렌시아누스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며 먼저 온 질문을 흘렸다.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그걸 알면서도 넘어갔다.

“붉은 약은 이미 완성됐단다. 네가 오늘 했던 걸 도와주는 약이야. 약간의 비룡화를 감수하고 힘을 끌어쓰는 약. 그런데 푸른 약은 아직 미완성이란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제국에 용찬의식 한 사람은 나뿐이니 다른 사람에게 실험해볼 수도 없네. 괜찮아. 죽기야 하겠어?”

“아니. 그래서 먹기만 하는 걸로는 안 되고, 내가 직접 주문을 외워 줘야 한단다.”

“아.”

“내가 완성도 안 된 약을 가져올 줄 알았니?”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훗, 하며 과장된 손짓을 해 보였다.

“역시 누나야.”

그리고 푸른 약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잠깐. 그건 먹는 게 아니라 바르는 거란다! 제발 설명을 끝까지 들으렴!”

세레라지에가 기겁하며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진작 말해 주지. 큰일 날 뻔했네.”

“네가 멋대로 마시려 했잖니! 이빨이 다 빠졌을지도 모른단다.”

루디가 푸른 액체를 발렌시아누스의 왼손에 골고루 발랐다.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를 쥐고 긴 주문을 외웠다.

발렌시아누스는 왼손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문자 그대로 불 속에 넣어도 멀쩡한 손이었다.

“……뜨겁네.”

“당연하지. 그 정도 고통은 감수하려무나. 용찬의 대가를 거부하고 있는 책임이니까.”

세레라지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균형 잡힌 새침한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책임과 대가는 다르단다. 책임은 다양한 형태로 질 수 있지만, 대가는 상대가 원하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혈통의 정점에 선 황족이잖니? 그런데 감히 누가 우리에게 대가를 논하겠니.”

금은 요동이 반짝이고, 발렌시아누스의 암적색 비늘이 뜰뜨며 한 장 한 장 떨어져 내렸다.

갈고리 같은 손톱도 빠지고 하얀 인간의 손이 다시 돌아왔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폐하가 알았으면 손을 자른 다음에 혈마법으로 1년간 고쳐주셨을 거야.”

“그러셨을 거 같구나. 고마우면 이 비늘 좀 가져가도 되겠니? 용의 비늘이 얼마나 좋은 시약인지 알잖니.”

“당연하지. 당연히 줄 생각이었어.”

세레라지에가 웃으며 비늘을 모아 종이 봉투에 담았다.

발렌시아누스와 루디는 하얀 손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혹시나 해서 묻는데, 붉은 약도 바르는 거야?”

발렌시아누스가 노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 붉은 약은 완성된 거잖니. 먹는 거란다. 남겨주고 갈 테니 필요할 때만 쓰렴.”

세레라지에는 작은 병에 붉은 약을 나눠 담으며 말했다.

그때 텐티아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전하. 코넬이 습격을 받았습니다.”

* * *

나는 다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옛 빈민가로 향했다.

적당한 골목에 숨어 확인하니, 임시 교회가 설치된 공터와 코넬의 건물 앞 조성되던 광장은 개판이 되어 있었다.

옛 빈민가라고 말했던 게 어색하게도, 다시 빈민가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쿵짝쿵짝, 하는 싸구려 음악이 사방에서 울려서 머리가 다 아팠다.

임시 교회에 나온 신학생들은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사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기사 하나가 망토를 눌러 쓰고 구석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옛것을 섬기던 침식자 코넬을 저희가 물리쳤습니다.”

“그 어린 마귀 년이 지금까지 일어난 1,800건의 살인사건의 주범입니다. 고기는 간부들과 나눠 먹고 뼈는 놈이 섬기는 옛것에게 바쳤기에 드러나지 않았지요.”

“제 다리를 고치려 남의 다리 1천 개를 자른 식인귀 악마입니다!”

“그녀의 본모습은 열다섯 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 괴물이지요!”

크고 작은 단상 위에 정장이나 제복을 입은 중, 장년의 의원 후보들이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중에는 내게 금화를 바치고 기탁금과 후보 등록 심사를 면하려던 사람도 여럿이었다.

“정말 코넬 님이 침식자였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그분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는 다 굶어 죽었을 거야!”

“자네 못에 찔린 상쳐, 자네 뼈 부러진 거 고쳐 준 분이 누구인가?”

“사제님들과 신학생들이지, 엄밀히 말하지만 코넬이 한 건 아니지 않나?”

“!”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 말을 했던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보게. 식사 배급과 치료는 교회에서 해주시는 것이고, 벽돌 공장은 우리가 손을 모아서 지었네. 저 공방들은 대형 길드에서 투자해준 것이지. 코넬 그 아이가 물론 열심히 나섰다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은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기특하지만, 구세주는 아니야. 그 애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깡패들을 이끌고 다니지 않았나?”

“이런 은혜도 모르는 새끼를 봤나!”

“모두 힘을 모아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 그래, 좋지. 그런데 왜 일하는 건 우리고 영광을 차지하는 건 그년인가? 게다가 그년 역시 옛 시대의 잔여물 아닌가? 폭력과 공포로 우리를 착취하던!”

텐티아 경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늠름한 얼굴에 노기가 감돌았다.

“……전하.”

“그래. 생긴 걸 보니 딱 봐도 양아치 놈이군. 아마 코넬이 무너뜨린 다른 조직 소속이었을 거다. 그리고 막 저놈들에게 바람잡이로 고용되었겠지.”

“!”

텐티아 경이 그건 생각 못 했다는 듯 다른 의원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방식으로 해결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방식인가?”

“저놈들의 얼굴에 강철 건틀릿을 집어 던지고 결투를 신청하는 겁니다. 아니면 감히 기사가 지나가는데 평민 주제에 단상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떠든 죄로 두들겨 패 버리거나요.”

“나쁘지 않군. 나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네. 마음 같아서는 일단 저놈을 불로 지지고 생각하고 싶지만, 코넬 그 아이는 기사의 방식이 아니라 의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네.”

그때 등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십니다. 전하.”

“알센이었나?”

금발의 청년이 정장 입은 사내들을 여럿 대동하고 골목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예. 전하. 그날 전하와 텐티아 경의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 진정 사람들을 위한 길인지요.”

“훌륭한 판단이었군. 내 칭찬해 주지. 아주 치명적이고 날카로웠네. 꼭 침식자들의 발톱이 떠오르더군.”

“하하. 영광입니다. 전하.”

“코넬이 어디 있는지 아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십니까?”

“나도 모르네.”

알센이 나를 지나쳐 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단상을 쌓더니 그 위에 올라가 또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했다.

그때 텐티아 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 * *

골목길 끝에 우뚝 선 3층 석조 건물은 여전히 웅장했다.

이곳은 딸의 다리를 고쳐 주려 했던 아버지이자 깡패 조직 두목의 저택이었다.

이미 재개발의 손길이 지나갔는지, 덕지덕지 붙은 널빤지와 천막은 철거된 지 오래였고, 사방에서 인상을 긁던 빈민 깡패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상처 입은 짐승들의 신음성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텐티아 경을 본 탓인지 그 시선에 경계심이 어렸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모시겠습니다.”

간부진 중 하나였던 한 여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 역시 상처를 입었는지 다리를 절었다.

내부 공사까지 할 시간은 없었는지, 건물 안은 여전히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불을 지른 흔적이었다.

2층 두목의 방 앞에서 간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영악하고 총명한 인상의 소녀가 아버지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선과 악을 떠나 책임감으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하?”

코넬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움찔했다.

“오시면 안 됩니다. 교회가……!”

“알고 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갔다.

“예, 아니요. 둘 중 하나로 답해라. 여전히 의원이 되고 싶나?”

코넬이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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