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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3화 (9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3화

(93)

펄펄 내린 눈이 녹고 얼기를 반복하다 다시 얼지는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옛 빈민가로 찾아갔다.

이제 과거의 피와 얼룩은 그늘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그 거리로.

“오셨습니까?”

“그래. 왜 불렀지?”

광장 앞 건물, 6층.

코넬은 거리의 지배자들만이 앉을 수 있던 그곳에 있었다.

적갈색 머리를 턱선에서 칼 같은 단발로 잘랐는데, 영악하던 인상이 약간 귀염상으로 변한 걸 보니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감사 인사를 한번은 드려야 할 거 같아서입니다.”

“그깟 일로 대공을 오라가라 하느냐? 필요 없다. 코넬 너는 아직 당선도 안 된 후보자잖냐. 전쟁과 선거는 끝날 때까지는 모르는 거다. 당선되면 그때 인사해라. 축하해주마.”

“제가 당선되면 최연소인가요?”

“선거로 뽑힌 의원 중에는 최연소일 거다.”

“선거로 뽑히지 않는 의원도…… 아. 생각해보니 그쪽이 훨씬 많군요.”

200석 정도를 선거로 뽑고, 100석은 수도 밖 황실 땅의 총독들이 보낸 대표들이, 100석은 광명 교회의 성직자들이, 100석은 궁정 귀족 가문들이 세습으로 받아 간다.

“네가 황제 폐하라면 평민들이 쉽게 말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 거 같으냐?”

“그러라고 만든 의회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하지만 다른 사용처도 있다.”

“무엇입니까?”

“의회가 없을 때는 평민들이 목소리를 내려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 그럼 황실의 대응은 결국 셋 중에 하나다. 달래거나, 진압하거나, 들어주거나.”

“하지만 달래는 건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진압하거나 들어주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군요.”

달랜다는 건 결국 참으라는 말이고.

사람은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평민들의 요구가 늘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압해야 할 만큼 무리한 요구라고 묻느냐면 그것도 아니었지. 그러니 거리에 나올 정도의 일이 터지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준다고 봐도 되었다.”

황실이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그런데 의회가 있으면…….”

“의회에 가서 이야기해라. 그렇게 중간에 힘을 빼고 초점을 돌리는 거지. 의회로 가면 이제 수백 명이 각자 의제를 들고 온다. 그렇게 되지도 않지만, 매일매일 백 개씩 처리해도 의제가 쌓일 수밖에 없어.”

코넬이 쓴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시간과 돈이 없는 평민들의 목소리는 결국 사그라들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군요. 기사가 황실의 검이라면, 의회는 방패입니까?”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명석하구나.

이걸 바로 이해하다니.

“그런 셈이지. 게다가 성직자와 귀족들은 각각 백 명씩 뭉쳐 있다. 시급한 안건이라면 서로 지원해 주지.”

코넬이 총기 감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저희 평민 의원들은 한 명씩 흩어져 있군요. 이해관계도 다르고요. 총독령에서 온 대표들도 저희보다는 귀족들 쪽에 줄을 대고 싶어 할 거고요.”

“그렇지.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뭐든 쉽지 않은 싸움일 거다.”

“당선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그제야 시작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넬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당선되지도 않아 놓고 하기도 웃긴 말이지만요.”

“사실 그렇기는 하다.”

내가 슬슬 돌아가려 하니, 코넬이 지팡이를 짚었다.

“나오지 마라. 아직은 바람이 차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응?”

“오늘 감사 인사를 맨입으로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돈 나올 구멍이라고 해 봐야 후원금이나 모금이나 교회 예산 아니냐? 나는 뇌물을 좋아하지만, 그런 돈을 받을 만큼 궁하지는 않다.”

코넬이 혀를 찼다.

“돈이 아닙니다. 저 지금 돈 쓰느라 바쁘다고요. 공사 하나하나가 다 엄청난 돈이에요. 어쩌면 봄에 많이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실실 웃으며 답했다.

“그 전에 선거가 치러져야 할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실 수가 있나요?!”

“너도 생각은 했다는 거 아니냐?”

“좋은 생각만 하지는 못하죠. 좋은 일을 하려 할 뿐입니다.”

그녀를 따라 3층으로 내려가니 아몬을 섬기는 간부들과 전투조원들이 모여 있었다.

열심히 기도하고 단련했는지, 어둠 속에서도 안광이 형형했다.

“코넬 님. 이쪽입니다.”

방 한 구석에 쇠로 된 우리가 있었고, 그 안에 몇 사람이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다.

“이게 이들에게 뭐 하는 짓이냐?”

나는 한껏 분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죽이지 않았지?”

눈을 보지 않고도 침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코넬이 몸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전하께 보여 드리고 바로 화장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을 다시 확인했다.

피부가 저릿해서 저도 모르게 팔뚝을 만지작거리게 될 정도였다.

“그래. 그래야 할 거다. 이 정도면 곧 인간의 형태를 잃을지도 몰라. 이 방에 오래 있었던 간부나 요원들은 며칠이라도 기도를 하루에 한 시간씩 더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코넬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알센이 제가 침식자들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죠. 아무런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공방의 하청을 받아 상아탑에 납품한다던 그 대형 시약 공방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잠시 창밖 긴 건물을 바라보았다.

“기억한다. 무슨 동굴 이끼를 가공한다고 했었지.”

“이들은 그 공방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조합에서 취업을 알선했죠. 몰래 완성품을 빼돌려 어딘가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코넬이 명료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조합장이니 꽤 곤란한 상황이었군. 지금은 문제없나?”

나는 잠시 이야기를 딴 곳으로 틀었고, 코넬이 약간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전하께서 다 없애 주셨습니다. 그날 뒤로 누구도 제게 침식에 관해 들먹이지 못합니다.”

“그래. 계속해라.”

“그 어딘가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약간 힘을 끌어 올렸는지, 동공이 세로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간부들과 전투조원들이 긴장으로 몸을 굳히는 게 보였다.

“잘했다.”

“제가 드리는 감사의 선물입니다. 이걸 가지고 교회에 가 주십시오.”

코넬의 눈빛에는 빚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내게 종속되지 않겠다는 저의가 보여서, 나는 옅게 웃어버렸다.

“그럼 네가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봄이 오면 식량도 더 필요해질 텐데.”

“자발적인 신고라고는 하나, 제 관리 구역 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밝히는 건 썩 좋지 않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나리께서는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높으신 분들을 만나 암막 속에서 처리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겸사겸사 교회 상층부의 감사도 받고요.”

검은 성자와 더 가까워질 핑곗거리가 절실하기는 했다.

나는 웃으며 그녀가 준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고맙게 받도록 하지.”

“예. 전하. 그리고 저들은…….”

“이제 못 고친다. 저 정도면 정화를 받아도 죽거나 평생 숨만 쉬게 될 거다.”

코넬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내 아쉬움이 어린 눈빛이었다.

사람의 죽음에 저런 눈빛을 하는 한, 이 거리를 계속 맡겨놓을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그래. 당선되면 다시 보자꾸나.”

* * *

제이릴리스의 집무실에는 오늘도 따스한 햇볕이 쏟아졌다.

광명신의 축복인지 감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남들에게 말해야 한다면 언제나 축복이라고 이야기할 거다.

집무실은 천장이 다른 건물들보다 높았다.

물론 기둥 높이만 20m가 넘는 아래층 알현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천장을 올려다보게 되는 높이였다.

그녀의 등 위로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색색의 유리창이 5m 높이로 솟아 있는 걸 보자면, 황제의 후광을 느끼게 되었다.

“좋은 날이로구나.”

제이릴리스는 강렬하게 웃으며 막 서류 한 장에 서명하고 행정관에게 건넸다.

그녀는 불꽃같이 붉은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관절 반지 대신 루비와금으로 만든 팔찌로 손을 장식하고 있었다.

“방금은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사옵니까?”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도르카이시스 백작과 안타레스 백작의 영지전에 짐의 뜻을 받들어 화해를 주선할 기사들과 행정관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제이릴리스가 황금빛 눈을 초승달처럼 가늘게 뜨며 말했다.

긴 속눈썹에 햇살 끝이 스치고 사라졌다.

화해 주선이라.

그녀가 회귀 전에 전쟁터에서 새해와 봄을 맞이했던 걸 생각하면 너무나도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음, 역시 첫 단추를 잘 끼니 모든 게 척척 진행된다.

이대로 더 노력하면 전쟁이 아니라 숙청 정도로만 피가 끝나지 않을까?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20년이 흐르면 제이릴리스를 폭군이라 부르는 목소리도 줄어들 거다.

“예로부터 아무리 비싸고 더럽고 짜증이 나도 전쟁보다는 평화가 낫다고 했사옵니다. 폐하의 현명하신 결정에 두 백작 모두 승복할 것이옵니다.”

나는 더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릴리스가 약간의 조소를 띄고 말했다.

“세레라지에 대공이 개발한 새로운 두 스크롤을 실전에서 사용해볼 기회로다.”

“예?!”

나는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도르카이시스 백작과 안타레스 백작이 회담 자리에 도착하면 짐의 충성스러운 청은 기사단이 둘 모두의 목을 날려 버릴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둘 다 주술 회로 새겨진 갑옷을 입었으니, 전격 확산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과 전격 침투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이 제 몫을 하는지도 알아볼 수 있겠지.”

“재고하여 주소서!”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가학적으로 꿈틀거렸다.

“짐과 황실은 기다릴 만큼 기다려 주었다. 두 백작은 영지의 경계선에 희귀광물이 출토되는 광산을 가졌지. 선황 때 황실이 독점 매수 계약을 하고, 공동 개발 투자비로 금화를 1만 5천 닢이나 지원해 주었거늘, 아직도 힘을 합쳐 채굴할 생각도 하지도 않고 싸우기만 하고 있다.”

“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개발하라고 금화를 준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들이 광산을 개발하겠다면서 돈을 추가로 요구한 게 벌써 30년이다. 발렌 대공. 알겠는가? 30년이란 말이다.”

분노한 황제의 호통이 집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짐의 신민들이 피땀으로 만들어낸 금화인데, 그 두 놈이 신민들의 피땀을 30년간 동안 날려 먹고 있도다. 이걸 두고 볼 수는 없고, 그 광산을 이대로 놀릴 수도 없도다.”

선황이 30년간 그걸 놔둔 것도 놀랍다.

그럼 죽어야지.

“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불거렸사옵니다. 소신을 선봉장으로 보내주시옵소서!”

제이릴리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대공이 이해해줄 걸 알았도다.”

“죽이고 끝내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당연하노라. 다행히 두 백작에게 장녀와 장남이 있다고 하니, 둘을 결혼시키면 공동 개발이 진행되겠지. 그 둘의 후계자는 두 백작령을 모두 물려받게 될 테니, 그때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역시 제이릴리스다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두 백작은 죽겠지만, 30년 동안 싸워 왔으면 이제 슬슬 죽을 때도 되었잖는가?

“현명하시옵니다.”

“그래서 대공은 어쩐 일로 짐에게 알현을 청했는가?”

“얼마 전 빈민가에서…….”

코넬과의 일보다는 그 끝자락에 있었던 침식자 관련 문제를 더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황실과 교회의 문제는 나 혼자 어떻게 해도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침식자들이 어디론가 소포를 보내고 있었다고? 그게 어디냐?”

나는 종이 봉투를 건넸고, 안에 든 서류를 읽어본 제이릴리스가 혀를 찼다.

“우연이라면 우연이로구나. 도르카이시스 백작과 안타레스 백작의 경계 쪽이다.”

“예? 그럼 이 시약이 광산으로 흘러갔단 말씀이시옵니까?”

“아니다. 광산은 경계 동쪽 끝인데, 이 지역은 경계 서쪽 끝이로구나. 뭐가 있는지는 짐도 모르겠다. 이걸로 교회에 약간의 친절을 베풀 수 있으면 족하구나.”

“예. 그저 성자와 친분을 다지는 걸 목표로 하겠사옵니다. 거리로 보면…… 가을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교회는 와이번을 이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정에 연 단위가 걸리는 경우도 흔했다.

“가을? 가을까지 수도를 떠나 있을 셈이냐?”

제이릴리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옆에 놓인 고급 종이에 뭐라 쓰고 서명을 마쳤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예. 폐하.”

“받아 가거라. 와이번 한 마리를 그대에게 증정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달 안에 돌아오거라.”

그녀의 목소리에서부터 내게 거부권이 없다는 게 전해져 왔다.

“명령이시라면, 기꺼이.”

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성자와 그 주변인들을 설득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교회가 지방 행정은 꽉 잡고 있으니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겠지.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곳이면 좋을 텐데.

* * *

홍의주교 아르고스가 위치를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 잘 아는 곳이지요.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침식자들이 왜 수도원에 시약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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