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4화
(94)
아르고스의 집무실은 여전히 호화로웠다.
색유리 모자이크가 채광창으로 들어간 돔 천장은 웅장했고, 군데군데 화려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에는 종교적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촛대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방 중앙의 원탁에서 나와 성자, 아르고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 그래도 요새 연락이 뜸해서 의아해하던 참입니다.”
빼빼 마른 홍의주교, 아르고스가 깐깐한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을 거 같기는 했지만, 설마 침식자들과 얽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냉큼 말을 받았다.
이 능수능란한 교회 행정관을 몰아붙이려면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흉사를 어찌 황실이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진상을 파악하는 걸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아니요. 수도원의 일입니다.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이건 교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아르고스는 온 힘을 다해 나를 거부하려 했다.
내가 성자를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뿐더러, 날이 갈수록 소문이 흉악해져 가는 나와 엮여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협상가였고,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제안만 했다.
“인근에서 도르카이시스 백작과 안타레스 백작이 영지전을 벌이는 중입니다. 설마 그들이 성자님께 위해를 끼치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애초에 오해나 불필요한 갈등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게 좋지 아니하겠습니까?”
“으음…….”
“제 이름을 몰라도 황제 폐하의 위명을 모르는 대영주가 없으며, 꼭 닮은 쌍둥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대영주도 없습니다.”
나는 더욱이, 하고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침식자 문제는 하루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본래 교회의 방식은 인근 교구나 기사 수도원에 전서구를 보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수도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르고스가 안경알 너머 예기 감도는 눈을 번뜩였다.
눈매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성성했다.
“벌써 문제가 생겼다고 단언하시는 겁니까?”
자칫하면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아느냐고 반박당하고, 일당으로 몰릴 수도 있는 무서운 논리였다.
“침식자들이 수도원에 오염된 시약을 보낸 게 문제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지만 나는 전적만 보면 파문을 백 번쯤 당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이번에도 당당할 수 있었다.
“말과 마차로 사람을 보내면 그곳에 도착할 무렵 이미 늦여름일 겁니다. 인근 교구에 전서구를 보내 봐야 영지전을 벌이는 중인 영지에 들어가거나 나갈 수는 없겠지요. 결국 저와 함께 고위 성직자 분이 빠르게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홍의주교 한 분을…….”
이 주교님이 진짜 끝까지.
“평균 연령 70세의 주교님이 초봄 찬바람 맞아 가며 하늘을 날다가는 객사하실 겁니다! 성자님을 붙여 주십시오!”
결국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던 마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는 약간의 곱슬기가 감돌고, 하얀 얼굴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하며, 우묵한 검은 눈에는 이제 성자의 이름에 어울리는 통찰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자는 황제보다도 화려한 예복에서 소매를 빼며 말했다.
“대공. 이해해주시오. 그 수도원이 워낙 역사가 깊고 보관된 성물도 많아, 홍의주교께서 대공을 그곳에 보내기 꺼리신 거 같소이다.”
“역사가 깊고 성물이 많은 것과 제가 가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대공이 지난번 대성당에 왔을 때 그리 얌전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잖소.”
그래서 내가 성물을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알았나?
아니면 억지를 부리며 하나 달라고 하거나?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침식자가 얽혀 있는 걸 안 이상 성자가 되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오나, 교회법은 성직자의 와이번 이용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아르고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단심문관이자 교회법관 출신입니다. 누구보다 모범이 되셔야 할 성자님이 와이번 같은 마수를 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와이번을 싫어한다.
이제 성기사들을 보내 와이번핏을 때려 부수는 정도는 아니지만, 매년 마릿수를 줄일 걸 요구한다.
아무리 길들였다고 해도 태생이 마수라 곁에 두지 말아야 할 짐승이라는 게 명분이지만,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너무 많이 먹기 때문이다.
비늘 달린 것들이라 비슷한 덩치의 털 달린 것들에 비해 먹는 양이 적다지만, 그래도 성체 급 와이번 200마리가 먹는 양이 한 달에 2천 4백에서 3천 마리에 달한다.
1년이면 대충 3만 마리다.
어린놈들을 더하면 더 많아질 거고.
당연히 이건 다 세금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민중 편이기에, 마수를 운용하기 위해 민중을 쥐어짜는 황실을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대해진 제국은 이제 와이번 없이는 행정망이 돌아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놈들이 얼마나 유용한지 아는 나로서는 차마 찬동할 수가 없었다.
“주교님뿐이 아니라 다른 교회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아르고스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맞습니다.”
“성자님도 썩 내키지는 않으실 테고요.”
“용종 자체가 광명신께 순종하는 생물은 아니지요.”
역시 신실한 신학생 출신다웠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그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아르고스가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다.”
나는 성자의 하얀 손목을 낚아채고 벌떡 일어섰다.
마테오스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공.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나는 씩 웃으며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납치입니다!”
* * *
수도 거리의 사람들에게 발렌시아누스는 언제나 최고의 안줏거리였다.
“그놈이 친 사고가 언제 한두 개인가?”
“이제 사고라고 하기도 힘들지 않나? 그놈은 싹수부터 노란 놈이었어.”
술 한 잔에 악행 한 마디씩 내뱉는 놀이 문화가 생길 정도였다.
얼굴이 불쾌해진 한 사내가 목청 좋게 시작했다.
“혼자 살겠다며 이복 남매들을 밀고했고, 주일에 술에 취해 시녀를 희롱했지.”
그 옆에 앉은 여인이 멋들어지게 다음 절을 이었다.
“명예로운 기사를 구타하고 그 여동생을 겁간했으며, 카지노에서 사기를 치고 불까지 질렀다네.”
테이블이 앉은 사람들이 능숙하게 노래를 이었다.
“식당에서 위병과 식사 중이던 손님을 폭행하고, 침식 의심자를 빼돌리고, 여관을 폭파했지.”
“카지노에서 기계를 부수고 가드들을 때려죽이고, 와이번핏에서 열심히 일하는 악어새들을 심심풀이로 베어 죽인 자잖나!”
옆 테이블의 한 젊은 사내가 강하게 외쳤다.
“폐하의 포도주를 빼돌려 귀족들에게 팔아넘겼고, 딸 앞에서 아비를 범한 자. 붉은 기사와 함께 빈민가에서 인간 사냥을 즐기고, 푸른 마법사와 함께 마약을 제조해 홍등가와 빈민가에 판매한다는 황족.”
가게에 막 들어온 장년의 사내가 낮게 읊조렸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시종을 산 채로 와이번의 먹이로 주며 그 광경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가학자. 그 시녀조차 주인의 위세를 앞세워 뇌물을 받고 시장 상인을 구타하며 현물을 갈취한다는 발렌시아누스.”
노랫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배움의 거리에서 옛것을 소환했고, 친족들을 학살했으며, 대성당으로 침식자를 데려갔다네.”
어린 어린 소년이 위스키를 달라 청하다 이마를 맞고 맥주를 받았다.
“성기사들을 구타하고 홍의주교를 추방했으며, 빈민들을 학살하고 후작의 목을 베었지.”
“그 딸을 범하고 말이지.”
먼저 노랫말이 끊어진 자가 술을 사게 되었다.
“상아탑에서 옛것과 관련된 실험을 하다 실패했고, 성문을 닫아 수천 명을 살인멸구하려 했지.”
“빈민가에서는 알센이라는 자와 손잡고 거리를 바꿔보려는 기특한 소녀를 태워 죽이려 했다네.”
거기서 노래가 끊어졌다.
처음 시작했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사내는 술을 사기 싫어 적당한 소문을 꾸며내려 했다.
“개망나니 발렌시아누스는…….”
그때 거리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와 성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성자님을 납치했다! 잡아라!”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입을 쩍 벌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가 말을 몰아 주점 앞을 달렸다.
그들은 처음으로 그 망나니 황족을 분명히 바라보았다.
백금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그 잘생긴 사내는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거 같았다.
비인간적인 금색 눈동자는 광오한 흥분으로 번들거렸고, 고삐를 잡은 손에서는 무엇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한 탐욕이 느껴졌다.
금실 수놓은 하얀 제복은 그를 주변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느껴지게끔 했고.
핼쑥한 뺨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제멋에 취해 제멋대로 살아가는.
어린 망나니.
하하하하하하하-.
일순 술집 안에 침묵이 찾아오고 광폭한 웃음소리만 거리에 울렸다.
“……우리의 성자님을, 납치했다네.”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노랫말을 읊었다.
* * *
나는 와이번핏 돔 아래에서 안장 뒤에 마테오스를 태우고 둘의 인사를 받았다.
“함께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텐티아 경이 송구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군례를 올렸다.
“아닐세. 백금의 합동 토벌에서 경이 더 많은 걸 배워올 것이라 믿네.”
“발렌 님.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셔야 해요.”
루디가 불안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맑은 녹색 눈이 떨리는 걸 보고 있자면 언제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 정 안 되면 비룡화의 힘을 쓰지 뭐.”
마테오스가 깜짝 놀라는 거 같았지만, 일단 무시했다.
루디가 말을 이었다.
“많이 구르고 고생하다 돌아오려무나. 죽지는 말고, 라고 세레라지에 전하가 전하라고 했어요.”
“하, 누나답네.”
나는 긴 남색 머리의 그녀가 실험을 하나 내 소식을 듣고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그 새침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성자님. 벨트를 차셨으니 떨어질 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제 허리를 꽉 잡으십…… 아악! 가볍게 잡으십시오!”
성흔을 받고 변한 성자의 육신은 소드마스터의 그것에 버금갔다.
덕분에 나는 허리를 좌우로 접힐 뻔한 고통을 이겨내며 고삐를 당겨야 했다.
마테오스가 그 차가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렌 대공. 정말…… 이걸 타고 가는 건가? 발밑에 아무것도 없잖는가?”
“그게 즐거운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네!”
나는 그물이 열리는 걸 보며 말했다.
“그럼 이참에 즐겨 보십시오! 가자!”
와이번이 20m에 달하는 날개를 펼치며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수도의 건물들이 발아래서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화형선고자, 검은 성자 마테오스 투모르가 비명을 내질렀다.
“발렌 대공! 이건 미친 짓이네. 광명신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아들을 구하소서!”
“여기서 떨어져도 안 죽을 분이 왜 그리 난리이십니까?”
나는 두 백작령 쪽으로 와이번 머리를 돌리며 웃었다.
서늘한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웃으며 즐기십시오. 온 세상이 내 발아래 있음을.”
“그게 왜 즐길 일인가? 으아아악!”
첫째 날, 마테오스는 밤이 되어 와이번 착륙장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 비명을 질렀다.
둘째 날, 마테오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처럼 굳은 채로 안장과 내 허리만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셋째 날이 되어서야 그는 간신히 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뒤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검은 성자의 깊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성자님. 몇 가지 묻겠습니다. 지금 가는 수도원은 어떤 곳입니까?”
그가 발밑을 한 번 보고,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입을 열었다.
“수도원이 크게 봉쇄수도원과 활동수도원으로 나뉘는 건 알 겁니다.”
봉쇄수도원은 시골에서 세상과 접촉을 최소화하며 빛을 섬기고, 활동수도원은 세상에 봉사하며 빛을 섬긴다.
“예. 그렇습니다.”
“그곳에 있는 수도원은 당연히 봉쇄수도원입니다. 다른 봉쇄수도원들처럼 자급자족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지요.”
봉쇄수도원은 만능이다.
농사부터 시작해서 농장과 양어장 운영, 치즈나 고급 포도주, 맥주, 위스키, 소시지와 햄, 잼 만들기.
경전 및 고급 서적 필사,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 레이스 짜기, 약초 연구와 마법약 만들기, 성기사 길러내기, 성물 연구와 옛것 관련 마도서, 마도구 봉인…… 등등 많은 일을 한다.
기본적으로 지식이 들어가기는 쉽고 나가기는 어려운 곳이며,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만큼 운영비만 나오면 품질을 올리는 데에 투자할 수 있다.
이 혼란의 시대에 왕국이 망하고 영지의 주인이 바뀌어도 수도원은 그대로 남아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이 다른 봉쇄수도원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