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5화 (9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5화

(95)

검은 성자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수도원의 이름은 알첸베르사, 성검 ‘영원’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

성검이란 광명신이 축복을 내리거나, 직접 만든 뒤 빛기둥으로 위치를 알려준 검들을 말한다.

그런 걸 보관하는 수도원이 침식자들과 엮이다니.

내가 대낮에 성자를 와이번으로 납치하는 미친 짓을 벌였는데도 아르고스가 쫓는 척만 한 이유를 알겠다.

그 역시 하루빨리 상황을 확인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겠지.

“더 빨리 가는 게 좋겠군요.”

“예. 그렇습…… 예? 대공, 잠시만……!”

“살살 잡으십시오.”

나는 와이번 고삐를 당겼고, 마테오스는 안장 손잡이와 내 허리를 붙들었다.

“으아아아악!”

성자님의 비명과 함께 와이번이 날개를 강하게 휘저었다.

다시 사흘이 흐르고, 우리는 ‘파도치는 평원’의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인근 대영주 몇 개의 영지에 거쳐 도르카이시스 백작과 안타레스 백작의 영지 서쪽까지 뻗어있는 대평원이었다.

그곳이 ‘파도치는 평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대륙에서 오로지 그곳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지형 때문이었다.

땅 자체는 끝도 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평지인데, 거대한 파도 같은 경사로들이 수백에서 수천m 간격으로 무슨 나무 블록을 뿌려놓은 듯 솟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사로들은 거의 완벽한 직각삼각형 모양에, 높이는 최대 수백m에 달했고, 진흙과 바위가 섞여 있었다.

오랜 풍화 작용으로 인해 풀은 자랐지만, 여전히 나무는 자라지 않았다.

주변 평원과 비교해서 보면 마치 거인이 바위산을 녹차치즈케이크처럼 잘라 내려놓은 거 같고, 광명신께서 장난이라도 쳐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곳입니다.”

그때 검은 성자가 한 곳을 가리켰다.

한 경사로 중턱에 검은 돌로 성벽이 쌓여 있는 게 보였고, 그 위쪽으로는 역시 검은 돌로 쌓은 거대한 성당과 건물들이 보였다.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저 돌 자체가 물러서인지, 성당과 건물 지붕에도 작은 나무와 풀이 자랐다.

검은색과 녹색의 조화가 마치 고대 사원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원을 뛰노는 뿔 달린 초식동물들을 보고 있자면, 와이번이 밥을 굶을 일도 없어 보였다.

“성자님. 경사로 아래쪽에 착륙하고 걸어서 올라가겠습니다. 저 신성한 곳에 이런 마수를 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예. 대공. 배려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성검을 만져라도 보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점수를 따야 했다.

경사로 아래쪽에 착륙한 뒤, 와이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뿔피리와 이것저것 짐을 챙겨 위로 걸음을 옮겼다.

경사로는 하늘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커서 중턱까지 다다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분명 눈앞에 검은 성벽이 우뚝 솟은 게 보이는데,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를 않으니, 미쳐 버릴 거 같았다.

“성자님. 혹시 주변에 환각 마법진 같은 게 깔려 있나 좀 확인해주십시오.”

“대체 수도원 주변에 왜 그런 게 있단 말입니까?”

“수도원이 아니라 옛것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이 주변에서 그런 사특한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용찬을 했다는 대공이 그런 마법에 걸릴 거 같지도 않고요. 유일하게 사특한 게 있다면 계속 마차만 타고 다니느라 게을러진 대공의 두 다리입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와이번 타고 곡예비행을 연습해볼까 합니다.”

마테오스가 나를 불태워버릴 거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다시 그런 소리를 하면 파문해버릴 겁니다.”

“아이고.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있자니 어느새 우리는 성문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높군요.”

검은 성벽은 높이가 20m는 넘는 거 같았다.

“예. 만드느라 정말 힘들었겠습니다.”

“그만큼 습격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어떤 미친 영주도 수도원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도적 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돈도 먹을 것도 많고, 수녀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성기사들을 키우고, 자체적으로 수도사들이 무예를 단련하고, 늙은 방랑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땅, 땅, 땅!

나는 성문에 붙은 무쇠 문고리를 강하게 내리쳐 방문자가 당도했음을 알렸다.

오래지 않아 성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주먹만 한 구멍이 열렸다.

성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 있는 구멍이었다.

전쟁통에도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만들어둔 그 대화 의지의 결정체에서 들려온 말은 짧았다.

“돌아가시오.”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어디서도 거절당해보지 않은 나와 마테오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고리 너머 사내가 험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와이번을 봤소. 이게 몇 번째요? 당신이 기사인지 아닌지, 도르카이시스 백작이 보냈는지 안타레스 백작이 보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소.”

“저기.”

“우리 알첸베르사 수도원은 광명의 품에 안긴 모든 이들을 수호할 것이고, 그건 탐욕스러운 아비의 욕심에 쫓기는 몸이 된 신실한 청년도 포함이요.”

문고리 너머 사내는 속 말을 이으려 했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이걸 잠자코 들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입 다물어라. 어리석은 것아. 우리는 도르카이시스 백작이나 안타레스 백작 따위가 보내온 이들이 아니다. 네 주인의 대행자께서 오셨는데도 어찌 문을 활짝 열고 환영하지 않느냐?”

“수도원의 주인은 오로지 광명의 주 뿐인데 누가 어찌 그런 광폭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내 원장님의 폐문 선언이 아니었다면 당장 문밖으로 나가 당신의 무례를 꾸짖고 수도원 앞에서 알맞은 태도를 가르쳐주었을 것이오.”

“내가 누군지, 이분이 누구인지 알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당신이 누구고, 당신이 데려온 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마수 와이번을 타고 온 속세의 탐욕스러운 권력자일 테니.”

졸지에 속세의 탐욕스러운 권력자가 되어 버린 검은 성자 마테오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공. 여기까지 하십시오.”

“예. 성자님.”

“!”

문 너머의 사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낭랑하게 외쳤다.

“성자님와 이 발렌시아누스가 알첸베르사 수도원에 방문했다. 당장 문을 열고 성자님과 나를 맞이하라.”

주먹만 한 구멍에 사내가 눈을 들이밀었다.

내 백발 금안과 마테오스의 이마에 선명한 성흔을 확인한 그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기절해 버렸다.

* * *

수도원 안 풍경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검은 돌과 녹색 풀이 어우러진 건물들 사이로 안개가 흘렀고, 수녀와 수도사들이 곳곳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땀 흘려 일했다.

“높으신 분들이다.”

“도망가자!”

한쪽에서는 우리를 본 아이들이 건물 뒤로 도망치고, 그러고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건물 너머로 머리만 쏙 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내려 베기 500번!”

어린 성기사 후보들이 목검을 쥐고 허수아비를 때리고, 커다란 화덕에서 빵 굽는 향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성당은 경사로 끝 제일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검은 종탑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그 길로 성당 안 수도원장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은 넓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정돈되어 있었고, 나무 고리 십자가와 순도 낮은 은으로 만든 촛대가 걸려 있었다.

수도의 화려한 성당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머리를 파르라니 민 수도원장은 온화하고도 심지가 강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원탁에 앉기도 전에 우리에게 머리를 숙였다.

“원장 한센입니다. 죄송합니다.”

“마땅히 죄송해야지. 대공을 30분도 넘게 밖에 세워놓다니 말이야.”

내가 일갈하자, 마테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테오스를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대공 전하.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계속 혼자서 화낼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한 대 맞은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성자가 나를 제쳐 두고 이야기를 꺼냈다.

“원장님.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대답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의 대리인께서 물으시는 건 주가 물으시는 것과 같사옵니다. 무엇이라도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사옵니다.”

“말씀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저보다 훨씬 오래 주를 모신 분께 극존칭을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성자님께서 그러시다면, 감히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수도원장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마테오스가 검은 눈을 얇게 뜨며 입을 열었다.

“두 백작이 영지전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곳도 관련되어있는 거 같은데, 무슨 상황인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히 성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 그거 물어보려고 온 게 아니잖아?

“성자님. 갑자기 왜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새는 것입니까? 저희는…….”

“대공. 조금만 더 주변을 살피면 예상치 못한 원군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테오스가 성자의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수도원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이곳은 지금 두 백작의 영지전에 얽히게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발렌 대공에게 영지전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광산을 둘러싼 다툼이라고요.”

“예. 맞습니다. 두 백작이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고, 그 아들딸은 남몰래 만나 평화를 약속하고 사랑을 꽃피웠지요. 하지만 안타레스 백작이 먼저 아들이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아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말입니까?”

마테오스가 깜짝 놀라고 수도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의 무서움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들이 아니라, 가문을 팔아먹을 놈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아들이 이 수도원으로 도망쳐 온 겁니까? 백작은 아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려 기사들을 보낸 거고요?”

“예. 그렇습니다.”

“광명이시여.”

마테오스가 성호를 그으며 탄식했다.

수도원장이 다행히,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최신 소식을 듣자 하니, 수도에서 황제 폐하가 사람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 이곳을 들렸지요. 와이번을 타고 두 백작에게 가 화해의 장을 주선할 것이라고 하니, 성자님께서 젊은이들의 사랑과 영지 간 평화를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실 거 같습니다.”

성자가 다행입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기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평화가 오기는 할 거다.

두 백작이 다 죽은 다음에.

성자가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것을 여쭙겠습니다.”

“예. 성자님.”

“이 수도원에 시약 같은 게 온 적은 없습니까? 동굴 이끼입니다.”

수도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성물 연구에 필요해 대량으로 주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최근 일이죠. 3년 전입니다.”

자급자족하는 봉쇄수도원에서 뭐가 새로 들어오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실은…….”

하며 마테오스가 내게 눈짓했다.

나는 종이봉투를 꺼냈다.

“침식자들이 이 수도원에 동굴 이끼 시약을 꾸준히 보냈다. 나와 성자님께서는 그 진상을 밝히러 왔지.”

수도원장이 눈을 부릅떴다.

“침식자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수도원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신성력이 정순한 이들을 확인한 뒤 그들을 시켜 찾아보겠습니다.”

아차, 하며 그가 두 손을 모으고 맑은 신성력을 내보였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한동안 머물며 편히 활동해 주십시오.”

* * *

발렌시아누스는 원장의 방에서 나서며 마테오스에게 말했다.

그의 노란 눈은 의심과 불안으로 번들거렸다.

“성자님.”

“예.”

“일단 수도원장님이 거짓말을 한 가지는 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대영주들은 방금 같은 상황에서 둘이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절대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30년간 싸웠으면 지칠 만도 하다.

게다가 보통 가문을 팔아먹으려 한다는 소리를 남자 쪽 집안에서 하지는 않는다.

“그럼…… 잡으려고 온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어느 백작이 무엇을 바라고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백작이 죽이려 온 건 아닐 겁니다. 찾으려고 왔으면 왔어도요.”

성자가 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공은 이곳에 안타레스 백작가의 아들이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