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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6화 (9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6화

(96)

“그렇게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수도원장이라도 백작가 후계자를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들어온 건 자기 발로 들어왔을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성당 1층 홀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문제는 왜 나가지 못하고 있는지, 아니면 왜 나가지 않고 있는지. 그것이겠지요. 침식자들의 시약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3년 전 일도 최근이라고 하는 이런 시골 수도원에서 새로운 사건이 갑자기 둘이나 터졌을 리는 없을 거 같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번뜩이는 통찰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마테오스는 가끔 그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동자에서, 핼쑥한 뺨에서 아르고스 홍의주교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빼어난 일신의 능력과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혜안으로 확신을 가지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독선자만이 그런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다.

패기와 주변을 향한 애정과 연민이 모두 깃든 오만한 눈빛.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말로 막막해서 던진 질문이었으나, 돌아온 건 더더욱 막막하게 만드는 답변이었다.

“기도하며 기다려야지요.”

그 발렌시아누스의 대답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검은 돌로 지어진 성당도 안쪽 구조는 대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사각형 홀에 긴 의자가 네 줄로 늘어서 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등진 단상이 있었으며, 그 아래 제단에 고리 십자가와 화려한 성물함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일과 시간이라 그런지 성당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제일 앞줄 의자에 앉아 고리십자가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마테오스는 검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발렌 대공.”

“예. 성자님.”

“정말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저를 만나는 모든 성직자가 제게 기도하고 참회하라 그리 말씀하셨는데, 성자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누가 제게 뭐라고 하면, 성자님께서 저는 기도할 필요도 참회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고 하겠습니다.”

“광명신이시여.”

마테오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발렌시아누스는 서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기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성물함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내려놔도 안전하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황궁의 유물들처럼 깊게 숨겨 놓을 줄 알았습니다.”

마테오스는 잔잔하게 말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내심 두려워하면서.

“도독이 저 성벽을 넘어 들어오겠습니까? 절벽을 기어 올라오겠습니까? 수도원 안 사람은 저 단상에 감히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고, 자격 있는 자라면 먼저 손을 댈 필요도 없겠지요.”

“그럼 제가 올라가서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

마테오스는 발렌시아누스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성자님께서 허락해주실 수 있으시잖습니까? 제가 성검에 선택받은 용사일 수도 있고요.”

“예. 제가 허락해 드릴 수도 있지만, 그건 원장님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광명께서는 대공에 앞서 많은 사람을 용사 후보로 세웠을 것입니다.”

“제 순서는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사람을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은 온당치 못하나, 뒤에서 세는 게 훨씬 빠를 것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회귀 전에도 지금도 용사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물론 기도문에 나왔듯 광명은 때때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질투하고, 복수하고, 독선적이라,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리는 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광명은 비겁한 자나 기만하는 자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날렵한 몸놀림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마테오스가 기겁하며 그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피하며 제단 앞으로 향했다.

“대공!”

성자는 진심 어린 노성이 터뜨렸다.

흑백이 교차하는 신성력이 그의 주변을 감싸며 타올랐다.

“감히 성물함에 손을 댄다면…… 어?!”

발렌시아누스가 성물함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집어 올리지 않았다.

“성자님.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성물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 *

검은 성자 마테오스가 황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굳센 얼굴은 검은 예복과 대비되어 더더욱 창백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의심되는 걸 가만히 내버려만 둘 수는 없잖습니까? 확인해 봐야지요.”

“세상에는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그 절차를 만드는 게 저 같은 놈들이라서, 저는 절차 같은 거 안 믿습니다.”

“그게 무슨 궤변……!”

“대체 누가 그걸 가져갔습니까?”

나는 마테오스에게 성물함을 열었던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깊은 화상을 입어 울긋불긋했다.

어지간한 마법을 튕겨내고 비늘을 두르면 마나 블레이드도 막아내는 몸이었다.

“용찬을 했는데도 이 모양입니다. 어지간한 침식자는 건들기만 해도 소멸당할 겁니다. 외부인의 짓이 아닙니다.”

“그럼…….”

“예. 맞습니다. 수도원 안의 누군가가, 그것도 꽤 대단한 신성력을 가진 누군가가 성물을 가져간 겁니다. 성검만 가져갔는지 다른 것도 가져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부자 짓입니다.”

마테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강인한 인상의 그였지만, 일순 과거의 신학생으로 돌아간 거 같았다.

“주여, 왜 제게 형제들을 의심하도록 하십니까? 성자의 사명은 드러난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 악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란 걸 알지만, 이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뭐라고 위로라도 해 주려 했다.

그때 발소리들이 다가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파르라니 깎인 머리에 온순한 인상의 수도원장 한센이 수도사와 수녀, 성기사 후보들과 함께 다가왔다.

“이들은 모두 검증된 자들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의심암귀가 저를 좀먹는 와중에 마음의 등불과 같은 분들이 생겨 다행입니다.”

마테오스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그들의 자기소개를 듣고, 그들이 신성력을 발휘하는 걸 보며 의심 가는 부분을 찾으려 했다.

모두 저 성물함을 열기에 충분한 신성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수녀 텔라입니다.”

“성기사 후보 시라입니다.”

“수도사제 오단입니다. 부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게 했다는 뜻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들이 모두 한패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스가 상황을 설명하고, 시약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나름대로 그걸 받았을 만한, 혹은 썼을 만한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지목했다.

“자칫하면 큰 내분이 일어날 거 같아서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수도원 안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분명히 다시 두 백작이 군대를 몰고 올 겁니다.”

“하지만 침식자가 소포를 보냈다면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씩 제자리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지독한 피로감과 가증스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칼을 뽑고 반응을 보자.

“그런데 말일세.”

“예. 전하.”

수도사제 오단이 답했다.

그는 안경이 잘 어울리고 각진 턱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상아탑보다는 세속의 신분을 존중해 주었다.

“성물들은 저 안에 보관하니? 성물함에 자물쇠도 없어 보이는데.”

오단이 근엄하고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물쇠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타락한 자들은 손을 대는 순간 손이 불타오를 것입니다.”

“맞는 말이군. 나도 꽤 아팠네.”

“하하…… 예?!”

나는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원장 한센과 부원장 오단, 수녀 텔라와 성기사 후보 몇몇이 일제히 경악했다.

“아무리 대공 전하라도 어찌 그런 무례를……!”

나는 한센의 울부짖음을 끊으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검객으로서 성검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런 데 쓰는 게 아닙니다!”

마테오스가 뭘 어쩌려고 이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욕심쟁이처럼 말했다.

“그런데 안이 텅 비어 있더군. 성물함만 제단에 가져다 놓고 성물은 다른 곳에서 보관하나?”

자,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

나는 내심 그들의 반응을 기대했다.

수녀 텔라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제가 하는 일이 성물 연구입니다. 방금까지 제 방에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한센과 오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텔라 수녀. 안 가지고 왔군요. 다음부터는 나올 때 꼭 가지고 나오기를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오신 손님들이 있을 때는 조심해야지요.”

한센이 나와 성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끼리만 있는 공간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규율에 무뎌질 때가 있습니다. 텔라 수녀는 오늘 안에 합당한 징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나는 낭패감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군요.”

그런데,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모든 성물을 다 가져다 놓고 연구하십니까?”

내가 열어본 성물함은 하나뿐이지만, 그들은 그걸 몰랐다.

처음으로 한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마테오스가 눈을 질끈 감는 게 보였다.

* * *

수도원의 식당은 깔끔했고, 저녁 식사는 풍족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수도에서도 먹기 힘든 고급 햄과 치즈를 종류별로 즐겼으며, 수도원에서 만든 포도주를 우아하게 홀짝였다.

반건조 무화과를 넣고 만든 빵을 길게 찢어 먹었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씹었다.

“나리, 나리는 얼마나 높은 분이세요?”

자연스럽고 품위 넘치는 그 동작과, 백발 금안에 매혹된 소녀 하나가 조르르 달려와 물었다.

파란 눈의 어린 수녀는 기겁하며 소녀를 안아 들고 발렌시아누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가 소문만 무성한 폭군 황제의 친남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안에서만 자란 아이라 예절을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육식동물처럼 웃으며 물었다.

“괜찮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안에서만 자랐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수도원이 고아원 노릇까지 하는 줄은 몰랐군. 전쟁고아인가?”

“네…….”

“너도?”

“네, 네. 그렇습니다.”

두 백작가의 전쟁은 오랜 시간 이어졌고, 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봉쇄 수도원에 왜 이리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많은가 했다. 바깥사람을 매년 몇 명 이상 받지 않는 곳도 많은데, 원장이 선량한 자인가 보군.”

발렌시아누스의 눈동자가 은은히 빛냈다.

고개를 숙인 어린 수녀는 보지 못했다.

“네. 좋으신 분입니다. 저희 모두를 아껴 주시고, 몇 번이나 두 백작 가문의 싸움을 중재하려 하셨어요.”

“그래. 알았다. 가 보아라.”

어린 수녀가 소녀를 챙겨 도망치듯 물러섰다.

저런 분들에게 함부로 다가가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혈통 초인과 신성 초인의 예민한 귀에 들려왔다.

“아이가 높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니, 사랑받는 원장일 거 같기는 합니다.”

“대공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는 성흔을 가리려 후드를 쓰고 식사를 마쳤다.

성자와 같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도 밥을 넘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마주 앉은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와 비인간적인 노란 눈동자.

먼저 피한 건 노란 눈동자였지만, 먼저 입을 연 건 그 주인이었다.

“계시는 잘 받으셨습니까?”

낮 이후 발렌시아누스는 수도원 곳곳을 둘러보았고, 마테오스는 제단 앞에서 세 시간 동안 기도를 했다.

광명은 아들의 부름에 답하여 빛줄기를 내려 주었다.

“……제게 주신 사명과 같다고 하시더군요. 성당 종탑 아래 모든 것을 불태워라.”

마테오스는 망설이고 망설이며 고해성사하듯 내뱉었다.

그의 사명은 화형선고자, 광명의 분노를 대행하는 철퇴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발렌시아누스가 서늘하게 물었다.

모든 것을 불태워라.

마테오스는 그 문장을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는 아이들, 기도하는 수녀와 수사들, 허겁지겁 밥을 먹는 성기사 후보들, 오랫동안 신을 섬긴 사제들.

“최소한 제일 높은 세 명은 확실히 빛의 아이들의 아니라 개자식들입니다.”

“대공.”

“주를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공!”

“불로 심판하라 하셨으니, 제가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발렌시아누스의 동공이 용처럼 세로로 변했다.

마테오스는 곧바로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째서.

“그분께서는, 그분의 가장 신실한 종들이 이렇게 변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말입니까?”

어째서.

“그분께서는 왜 제게 형제자매들을 시험하게 하십니까? 악을 징벌하라고 저를 보내셨지, 악을 드러내라고 보내신 게 아닐 텐데.”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악으로 보입니다.”

“!”

“하지만 성자님께서는 형제자매를 의심하시는 게 너무나 괴로워하시는 거 같군요. 그런 성자님을 위해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뱀처럼 웃으며 말했다.

“절벽 뒤쪽에 길을 찾았습니다. 종탑 아래쪽이더군요. 가시지요.”

마테오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듣고 싶던 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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