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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7화 (9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7화

(97)

‘파도치는 평원’의 ‘파도’들은 높이와 길이가 수백m에서 수 km에 달하는 직각삼각형의, 검은 점토와 바위가 섞인 덩어리들이었다.

경사면은 가파른 것도 있었고 완만한 것도 있었으며, 수도원은 습격자들이 쉽게 올라오지 못할 만큼 가파르면서도 평지를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완만한 ‘파도’위에 세워졌다.

그 ‘파도’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선 성당의 뒤편, 깎아지는 절벽의 가장자리에 우리는 섰다.

일단 어디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설령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한들 성자와 대공이 제국에서 가지 못할 곳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림짐작해서 400m는 되어 보이는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썩 가고 싶어지지는 않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발렌 대공. 어디에 길이 있다는 겁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절벽에서 다섯 걸음 정도를 띄우고 둘러진 울타리를 넘어 잡풀 더미를 해쳤다.

마테오스가 미심쩍인 눈빛으로 따라왔다.

“너무 어둡군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아래쪽이 보였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불을 피울 생각이었습니다만.”

“꼭 그래야 하겠습니까?”

“그럼 이 절벽을 이 밤중에 불도 없이 내려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도 성자도 어지간한 어둠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길은 이걸 길이라도 불러도 될지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찾아 놓고도 잘못 찾은 게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말이다.

마테오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뭐라 중얼거리자 그의 몸에서 은은한 백색광이 뿜어져 나왔다.

“천천히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대공.”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쪽으로 우묵하게 파인 절벽 가장자리에 밑으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묵하게 파인 지형을 살린 덕에 3면에는 지지대가 박혀 있었지만, 남은 한쪽 면은 완전히 뚫려 있었다.

나는 성자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성자님께서 발광하시니 앞장서 주십시오.”

마테오스가 냉랭하고 절박하게 답했다.

“제가 발광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대공이 앞장서십시오. 신의 대리인으로서 하는 명령입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성자의 말에 복종했다.

“예. 성자님.”

계단은 돌도 아니라 나무판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끔 흔들리거나 뚝 부러지거나 먼지가 피어올라서 나를 기겁하게 했다.

위쪽 지지대를 올려다보면 금이 간 것도 여럿이었다.

부실 공사를 한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오래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발렌 대공은 비행 마법을 못 쓰나 봅니다?”

“주문은 알고 있지만, 아직 쓸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내 마법의 재능은 불꽃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회귀 전에 편리하고 유용한 마법 몇 개는 익혀 놓았다.

“어째서입니까? 대공이 저를 들고 날아서 내려가면 되지 않습니까?”

“비행은 바람 마법으로 몸을 감싸고 나는 것인데,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마나도 많이 소모하는 주문입니다. 괜히 상아탑 원로들도 빗자루나 양탄자를 타는 게 아닙니다.”

용찬을 하기 전에는 마나가 부족해서 못 했다.

지금은 꽤 늘었고,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늘을 자유롭게 날 정도는 아니다.

“황제 폐하는 아주 잘 날아다니지 않으십니까?”

“그분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귀족들도 다 순수한 인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감안 해도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그냥 제이릴리스이십니다.”

그런 대화라도 해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밤바람이 불어와 내 뺨을 스쳤다.

와이번을 탈 때는 그렇게 상쾌했지만, 지금은 어깨가 떨렸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뚝!

“들으셨습니까?”

“예. 성자님.”

나는 황급히 다음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문제가 있다면 내 뒤를 따라오는 성자는 내가 밟은 계단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계단 간 간격이 워낙 넓어서 하나를 건너뛰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사달이 났다.

“으아악!”

성자의 몸이 아래로 쑥 떨어졌다.

그 아래 계단이 마테오스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잡으십시오!”

콱!

손과 손이 단단히 얽혔다.

내 힘이면 사람 하나 끌어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계단은 쓰레기였고.

뚝!

내가 밟은 계단도 우리 둘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세상!”

나와 성자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아래로 추락했다.

빠각, 빠각, 빠각!

“아악, 아악, 아악!”

더 아래쪽에 있던 마테오스가 계속 등을 계단에 부딪혔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는 덕에 나는 절벽을 살필 수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지면 계단이 끝났다.

아직 절벽은 200m도 더 남아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바람이여! ……이다음이 뭐였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젠장!”

나는 막대한 마나 소모를 감수하고 주문과 수인을 모두 생략한 채 시동어만 외웠다.

“하늘을 날 날개여! 벤투스 펜나루스!”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많은 마나가 흘러나가고 내 몸이 바람에 휩싸였다.

사아아아아-.

추락하던 우리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대공.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성자님.”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던 탓일까?

그가 불안에 차 되물었다.

“예? 무슨 말씀을 더 하려고.”

“이 마법 둘이서는 못 씁니다. 지금도 떨어질 거 같은 걸 애써 붙들고 있는 겁니다. 계단으로 내려오십시오.”

나는 마테오스를 얼마 남지 않은 계단에 올려주었다.

그가 파문이라고 외칠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발렌시아누스의 예상대로 계단 아래에는 절벽 안쪽으로 이어지는 동굴이 있었다.

높이와 넓이 모두 3m 정도 되는 굴이었다.

동굴 벽에는 수도 지하수로에 있던 이끼와 비슷한 발광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이끼가 내는 빛은 뭔가 더 따듯하면서도 화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오래지 않아 그 힘의 정체를 알아챘다.

“신성력을 이용해서 생물을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마테오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대부분 광명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를 바라지는 않으시지만, 고행을 하는 걸 바라지도 않으십니다.”

발렌시아누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 실력이 그 정도인 걸 어떻게 합니까?”

“……이해합니다.”

절대 이해 못 해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성자님. 그런 표정으로 말씀하셔 봐야 아무런 설득력도 없습니다.”

“제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제가 진심을 보이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이 믿을 준비가 안 된 것이겠지요.”

발렌시아누스는 쓰게 웃으며 성자와 나란히 걸었다.

사실 그건 그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는 대공이었고, 마테오스는 성자였다.

그들의 의지를 곧 정의로 받드는 기사들과 신도들이 있었고, 고로 그들은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들은 법칙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법칙을 만드는 자였고, 남들보다 많은 책임을 가진 대신 많은 권리가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자신과 같은 자들은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도원장이, 부원장이, 수녀가 수상했다.

그들이 성물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있으고, 침식자가 수도원에 오염된 시약을 보냈으며, 오랜 전쟁 중인 백작가의 도련님이 어딘지 모를 곳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이 정도 심증이 모였으면 그냥 지르는 게 그의 방식이었고, 본래 교회의 방식이었다.

‘적응이 안 돼. 내가 알던 대로 변해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한 식구라서 그런가?’

그는 회귀 전 세상의 마테오스를 기억했다.

침식자가 한 명 나왔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를 태워죽인 게 검은 성자 마테오스였다.

그 과정에서 사실 열두 명이 더 침식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팔십 먹은 노인부터 이제 세 살 된 아이까지 침식자였다.

늘 이런 식이니 자연스럽게 강경책이 선호되었다.

‘계시까지 받았잖아. 성자가 계시를 의심하면 어떡해?’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물증을 요구받지 않았다.

그들이 하라고 하면 아랫사람들은 따르거나 말린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성자님.”

“왜 그러십니까? 대공.”

“수도원을 아무 대나 짓지는 않지요.”

“그렇습니다. 높은 곳, 양지바른 곳이어야 하고, 일대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모이는 땅이어야 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땅은 침식자들도 좋아한다는 걸 아십니까?”

“예?”

마테오스는 처음 듣는 말에 당황하며 발렌시아누스를 돌아보았다.

화를 냈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침식자들은 깊고 축축한 지하 같은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교회의 눈을 피하다 보니까 마나가 잘 모이는 곳이 그런 곳밖에 안 남은 겁니다. 놈들도 옛것들에게 힘을 많이 받아 오려면 마나가 잘 모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군요. 놈들도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요.”

“그럼 이곳이야말로 놈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수도원의 바로 아래인 동시에 지맥의 기운도 받을 수 있는 곳.

발렌시아누스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마테오스는 은은한 빛무리를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식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저희가 지금 누굴 의심하고 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숨길 수 있을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마테오스보다 세 걸음 앞에서 동굴을 나아갔다.

그는 금세 나타난 모퉁이 앞에서 침음성을 흘리며 마테오스를 돌아보았다.

“꼭 보셔야 하겠습니까? 이런 건 저 혼자 봐도 충분할 거 같습니다.”

마테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발렌시아누스는 길을 비켜 주었고, 마테오스는 모퉁이 안쪽 방을 들여다보았다.

“광명신이시여.”

방은 넓었고, 그 안에는 시체 서른 구가 머리를 방 가운데 쪽으로 두고 두 줄로 놓여 있었다.

시체들은 전쟁터에서 가져온 듯 모두 갑옷을 입고 있었고, 덩치가 좋은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수십 개의 검은 깃털이 돋아나 있었고, 얼굴과 머리는 적갈색의 누더기에 뒤덮여 있었다.

마테오스는 그 누더기에 손등의 핏줄과 힘줄 같은 게 돋아 움직이는 걸 보고 그것이 일종의 기이한 생명체라는 걸 알아챘다.

흉물의 파편 같은 그 살점은 두 줄로 누운 사내들의 머리를 모두 하나하나 감싸고 방 가운데에서 촛대나 큰 버섯처럼 솟아올랐다.

그 기둥은 사람 가슴까지 올라오는 높이였고, 기둥 위에 맺힌 머리 크기의 덩어리는 역시 검은 깃털이 가득 돋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알 같았다.

마테오스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옛것의 배양소이군요. 그런데 왜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방 벽과 바닥, 천장에 각인된 문자를 가리켰다.

“차단 주문입니다. 동굴 이끼는 효율성이 나쁘지만, 서로 다른 두 기운을 중화할 수 있지요. 오염된 시약을 여기에 사용했군요.”

마테오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왜…… 아닙니다. 이유가 중요한 한 게 아니지요.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망설임을 유약함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미덕이 필요했다.

“성자님. 저와 함께 저들에게 안식을 주시겠습니까?”

마테오스는 시체들을 확인했다.

가슴이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체가 아니었다.

마테오스의 검은 눈동자에 일순 노기가 차올랐다.

“네.”

그의 몸에서 일렁이던 신성력이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에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자님! 위험합니다!”

발렌시아누스에게 사과했던 어린 수녀가 동굴 안을 달려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치렁치렁한 수녀복이 휘날리지 않았다.

마테오스는 그걸 알아보지 못했고, 발렌시아누스는 알아보았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화살 같은 불꽃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푹-.

긴장감 없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어린 수녀의 몸을 꿰뚫고, 어린 수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대공!”

마테오스가 경악하며 발렌시아누스를 번쩍 들어 올려 벽에 몰아세웠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일갈했다.

“성자님! 우리 내려올 때 계단 부서진 거 기억 안 납니까?”

“!”

까아아악-.

기이한 울음소리가 동굴 안에 울리고 어린 수녀가 다시 일어났다.

날카로운 검은 깃털이 수녀복을 꿰뚫고 치렁한 소매 아래로 나오고, 치마 사이로 보이는 다리가 비늘로 뒤덮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금속 질감의 큰 부리가 튀어나오고, 수녀의 푸른 눈이 붉게 물들었다.

“광명신이시여.”

마테오스는 세상 잃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이미 빛을 아는 이들을 변하게 했는가?

“왜 신실한 자들에게 저런 시련을 내리시옵니까?”

까아아아아악-!

정신 파동이 동굴 안을 뒤흔들고, 발렌시아누스가 변이한 수녀를 향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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