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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8화 (9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8화

(98)

까마귀과 인간을 합쳐 놓은 듯한 침식자가 금속질 부리를 쩍 벌렸다.

까아아아아악-!

높은 정신 파동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고, 벽면의 발광 이끼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굳은 진흙 가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

검은 성자 마테오스는 그 정신 파동에 실린 무게를 손쉽게 가늠했다.

새를 닮은 외형 탓인지, 저 침식자의 정신 파동은 유난히 강했다.

성자인 그조차도 귀에 거슬릴 정도였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깃털에 뒤덮였으리라.

그러나 그도 발렌시아누스도 정신 파동 따위에 굴할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발렌시아누스 역시 달려 나가는 발걸음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하얀 제복을 입은 등은 여전히 독선적이고 연민 어린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니 마테오스가 눈살을 찌푸린 건 정신 파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옛 친구였던 디스마스를 떠올렸다.

언제나 괴물로서만 마주했던 침식자들의 인간일 적 모습을 보는 건 생소했고,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계속 이유를 생각하도록 했으니까.

왜?

대체 왜?

광명신교의 성직자들에게는 포교의 의무가 있다.

그들은 정글이나 벽지의 부족을 찾아가 민폐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개종을 요구하며, 성기사를 대동하고 강제 개종을 시킬 때도 많았다.

아니, 사실 그럴 때가 더 많았다.

절박한 자가 제발 아무나 도와달라고 생각하기만 해도 잔혹하고 교활한 옛것들이 찾아와 그 마수를 내밀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광명신교의 체계적인 교육으로 육성된 사제들의 신성력뿐이니까.

칼이냐, 경전이냐.

광명신교가 대륙 전체에 퍼질 수 있던 이유는, 그들이 가장 유용했고, 가장 무해했고,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마테오스는 그래서 더더욱 의문을 가졌다.

평생 도시의 그림자에서, 더럽고 축축한 골목길에서 살던 자가 빛의 은총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행동을 용납해줄 수는 없었지만, 안타까웠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원이다.

부족함 없고, 세속 권력에서 가장 안전하며, 사방에 빛의 기적을 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

이미 옛것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사람이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침식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상식이라고 믿었던 관념에 굵은 금이 갔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가 몇 번이나 치명적인 심증을 보여 주었는데도 못 본 척했다.

마테오스는 생각했다.

그걸 외면했기에 이걸 보게 되었다고.

발렌시아누스의 등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변이한 어린 수녀로부터 스무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멈춰 선 그가 주문을 외웠다.

참담하게도 변이한 어린 수녀는 여전히 변이하기 전과 비슷한 체형이었다.

소매에 이름이 새겨진 수녀복도 군데군데 찢어진 걸 빼면 거의 그대로였고, 가슴 견에는 여전히 고리 십자가를 단 묵주가 목걸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저렇게 차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뜬금없게도, 마테오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멈춰 선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변이한 어린 수녀가 달려들었다.

소매가 크게 휘둘러지고 검은 깃털이 단검처럼 날아왔다.

푸푹!

동굴 벽에 깊이 박힐 정도의 위력이었다.

변이한 어린 수녀는 깃털을 쏘아내는 동시에 암살자 같은 몸놀림으로 땅을 박찼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입체적으로 꺾이는 예측 불허의 선을 그렸다.

그녀가 동굴 벽과 천장을 박차며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돌진했다.

주문을 외우던 발렌시아누스는 나직하게 한탄하고, 그 오만한 패기와 연민이 어린 시선으로 변이한 어린 수녀를 바라보았다.

콰아아아-!

다음 순간 발렌시아누스의 왼손 손끝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갔다.

지름이 3m에 달하는 통로 전체를 채워버릴 기세였다.

천장에 붙어도 바닥을 기어도 피할 수 없었다.

“까아아악?”

고압의 불길에 파묻힌 변이한 어린 수녀가 그대로 허우적거리며 불길 안으로 쓰러졌다.

발렌시아누스는 동굴 안에 산소가 부족해질 지경으로 불길을 쏘아냈다.

“대공. 그만하면 된 거 같습니다.”

버티다 못한 마테오스가 다가가 말릴 정도였다.

시체는 이미 뼈까지 불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고, 마테오스는 당황했다.

“예?”

“저는 아는 사람이 침식…… 아닙니다. 예. 그냥.”

발렌시아누스는 말끝을 흐렸다.

옷을 입고 있다는 건 얼굴보다도 더 인간다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살아생전 모습을 떠올린 건 마테오스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망나니인 줄 알았습니다.”

마테오스는 신선한 충격에 당황하며 말했고.

“망나니 맞습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도 맞고, 마음에 안 드는 건 온갖 술수를 부려 가며 이렇게 때리고 저렇게 때리는 것도 맞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하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엇보다도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동자를 떨 뿐이었다.

분노 외의 감정으로.

마테오스는 서른 명이 누워 있는 방 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도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 선택을 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검은 성자를 떨게 했다.

‘이 분노를 잊게 하지 마소서.’

그는 그렇게 기도했다.

저 아이가 주동자일 리는 없었다.

먼저 옛것을 섬긴 자들을 기쁘게 불태우고 싶었다.

“이미 구하기는 늦었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에게는 제가 안식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나가서 수도원장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알았다면 대죄인이고, 몰랐어도 대죄인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인형처럼 웃었다.

하얀 얼굴에 노란 눈에만 색을 품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검은 성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 *

고요하지만 딱히 거룩하지는 않은 밤이었다.

까마귀과 인간을 섞어 둔 듯한 침식자 열 명이 성당 뒤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제였던 자도 있었고, 성기사 후보였던 자도 있었으며, 수녀였던 자도 있었고, 수사였던 자도 있었다.

모두 같이 빛을 섬겼고, 모두 같은 이유로 그림자로 떨어졌다.

그들은 붉은 눈을 번뜩이고 강철 부리를 딱딱거리며 칼날 같은 깃털과 발톱을 만지작거렸다.

침식 전에 다뤘던 긴 검이나 낫으로 무장한 자도 있었다.

“한발 늦었어.”

“맞아. 우리가 한발 늦었어.”

“안에서 키우던 꽃이 죽었어.”

“맞아. 안에서 키우던 꽃이 죽었어.”

“아직 괜찮아.”

“맞아 아직 괜찮아.”

“저 동쪽에 다친 사람들은 많으니까.”

“맞아. 저 동쪽에 다친 사람들은 많으니까.”

한 침식자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시 시작하면 돼.”

모든 침식자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다시 시작하면 돼.”

그 직후, 천둥 같은 고함이 밤의 적막을 뒤흔들었다.

“다시 시작,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썩지 못한 시체는 지옥으로 돌아가고, 너희는 영원히 불타오를지어다!”

키이이이이익!

용종의 말예, 와이번의 포효가 뒤따라 울려 퍼졌다.

억센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열 명의 침식자들을 뒤흔들었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가 와이번의 등 뒤에 올라선 채로 천천히 절벽 위로 떠올랐다.

대리석 조각 같은 남성미 넘치는 얼굴은 불꽃 같은 분노로 가득 차 일그러져 있었고, 밤하늘보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신성력으로 희고 밝게 달아올라 번들거렸다.

성자의 검은 예복이 펄럭이고, 그가 와이번에서 내려 지상에 한 발을 내디뎠다.

장중한 ‘라-’ 음이 환청처럼 울리고, 반투명한 역장을 이룬 신성력이 열 명의 침식자를 덥쳤다.

파도에 얻어맞은 소년처럼 침식자들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성자의 분노는 파도 따위에 비할 게 아니었다.

“까아아악!”

“끼아아아악!”

“끄아아아악!”

까마귀들의 비명이 다시 한 번 밤의 적막을 깼다.

꺼지지 않는 정화의 불길이 옛것의 기운 그 자체를 연료로 삼아 타올랐다.

침식자들이 바닥을 구르고 깃털 돋은 팔을 휘저어도 정화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침식자 중에는 자기가 든 검으로 자기 목을 베어버리는 자도 있었다.

마테오스는 그들에게 동정의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 목소리는 얼음도 다시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다.

“예. 성자님.”

와이번을 돌려보낸 발렌시아누스가 정중히 답했다.

마테오스는 경사로를 따라 지어진 검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계시가 옳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린 저도 참 한심한 성자입니다. 앞으로는 그분의 뜻 앞에서 증거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이 힘이 곧 그분의 증거인데. 제가 무엇을 더 알아보겠다는 말이었을까요.”

이 세상에 이단은 있으나 사이비는 없고, 신은 믿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 대리자가 발렌시아누스를 따라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성흔을 드러냈다.

“광명의 화신이신 태양을 대신해 제가 이 밤을 밝히니 주께서는 부디 제 의분이 가라앉지 않게 하소서. 그 아이가 왜 침식되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않게 하소서.”

검은 성자 마테오스가 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당 뒷문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검에 불꽃을 두르며 말했다.

“성자님. 바로 올라가십시오.”

“모두 제 손으로 불태울…….”

“깃털이 있으니 날개도 있을 것이고, 시간을 주며 날아갈지 모릅니다.”

“!”

“저도 왜 그 어린 수녀가 그 꼴이 되어야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으니, 제 분노도 대신 물어 주십시오.”

* * *

성당 뒷문에는 옆문과 달리 고리 십자가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에는 다양한 전설과 민담이 내려오지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분’이라는 경전의 문구를 해석한 논리가 제일 많이 쓰인다.

사람은 절대 완벽히 정직하게 살아갈 수 없으니, 어디에서나 주의 눈이 닿는다면 늘 감시받는 기분일 수밖에 없고, 그 부담을 덜어 주고자 약간의 그림자를 드리워주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림자가 너무 짙어. 텔라 수녀.”

발렌시아누스는 불꽂 두른 검으로 텔라 수녀를 비추었다.

수녀 베일 아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텔라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단지 총명하고 탐구욕 넘치던 갈색 눈동자를 검게 물들일 뿐.

“이해해 달라 말해도 소용없겠지요.”

“이해는 해줄 수 있지. 그래도 죽일 수밖에 없다. 너희는 온 세상을 다 먹어 치우겠다는 괴물이고, 나는 세상 절반을 가진 사람의 오빠거든.”

텔라의 몸에서 검은 깃털과 검은 안개가 역장처럼 구형으로 퍼져 나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것이 변이할 시간을 버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에 곧바로 돌진해 검을 찔러넣었다.

제국 검술 4단계, 자리이타.

막대한 부하를 감수하고 가속하는, 일체개고의 상위호환 기술.

발렌시아누스의 몸 안에서 마나가 공명하고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어깨와 팔뚝이 안에서부터 꽉 차는 감각.

마나 블레이드와 불꽃 두른 검을 휘두르자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역장이 갈라졌다.

그러나 이미 텔라는 변이를 마친 뒤였다.

허리를 굽혔는데도 4m에 육박하는 키, 온몸을 감싼 하얀 외골격과 검은 깃털, 땅에 닿을 듯 늘어진 긴 팔과 발렌시아누스를 잡아 으깨기 충분한 손아귀, 반쯤 썩어들어간 검은 깃털의 날개 한 쌍.

마지막으로 코와 입이 튀어나와 만들어진 강철 부리.

그러나 더더욱 그녀를 무시무시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전반적인 체형과 어깨 폭은 인간일 때와 비슷해서.

“세상.”

검은 수녀복과 베일을 여전히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쓰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손아귀를 피해 바닥을 구르면서.

* * *

마테오스는 수도원장의 방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침식된 수녀나 수사들이 막아섰지만, 그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검은 깃털이 불타올랐다.

문을 왈칵 열자, 수도원장 한센이 보였다.

선량하고 온화하지만 단단한 심지를 가진 인상의 사내.

그는 오전에 마주 보고 앉았던 그 원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마테오스는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에 분노를 불태우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내게 할 말이 없습니까?”

돌아온 건 예상했던 말이었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전쟁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 말뜻을 이해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대체 침식과 영지전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백작의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걸어 들어 왔다.

이종족 혼혈의 귀족답게 잘생긴 얼굴에 침식의 기운으로 검게 문드러진 팔.

안타레스 백작가의 도련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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