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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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와이번핏으로 돌아왔고, 나는 또 한동안 이 갑갑한 지상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으며, 성자 마테오스는 바닥에 입을 맞추며 땅을 축복했다.
“성자님. 하늘이 그립습니다.”
“다시는 안 탈 겁니다. 두 번 다시는 안 탈 겁니다.”
“성자님도 즐거워하셨던 거 같은데. 좋아서 말도 못 하셨잖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마테오스가 검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절한 겁니다.”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성당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차를 불러서 타고 갈 겁니다. 아니면 걸어가던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테오스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성자님을 납치한 걸 아시죠?”
교리상 와이번을 이용하지 못하는 성자가 하루빨리 알첸베르사 수도원에 가기 위한 설정이었다.
“예. 대공. 기억합니다.”
“그런데 제가 성자님을 놓아 주면, 이제 저는 형식적으로라도 성기사들에게 끌려가 뭇매를 맞을 겁니다.”
와이번핏 조련사들이 다른 와이번을 데려왔다.
뭇매 맞기 싫다는 뜻이었다.
마테오스가 검은 곱슬머리를 헤집으며 분노를 토했다.
“대공답게 당당하게 맞으십시오! 응당 받아 마땅한 대가를 담담히 받으라는 말입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성자의 예복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대공쯤 되면 대가 없는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사람들이 신분 상승의 꿈을 꾸지 않겠습니까?”
“노력하는 평민이 즐기는 귀족을 못 이기는 세상 아닙니까?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개망나니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마십시오. 마음에도 없으면서.”
“가십시다.”
“안 놓으면 파문할 겁니다!”
성기사들을 세워 두고 그 말을 했으면 벌벌 떨었겠지만, 이곳은 황권을 상징하는 와이번핏이었다.
게다가 저 말도 36가지 곡예비행을 하는 동안 360번쯤 들었더니 이제 슬슬 익숙했다.
나는 안장을 얹은 새 와이번에 타고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발렌 대공! 그대는 분명 내가 일으킨 기적의 대가거나, 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려는 옛것 그 자체일 겁니다!”
나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질렀다.
듣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게 하늘의 매력이었다.
“예! 성자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제 눈동자에는 옛것이 깃들어 있고, 제 피에도 옛것이 깃들어 있고, 제 와이번에도 옛것이 깃들어 있는데, 저도 옛것이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좀 살살 도십시오! 급강하! 급강하하지 말고!”
“그런데 여기서 저를 정화의 불꽃으로 지지면, 성자님께서는 주인 없는 와이번을 타고 와이번이 지쳐서 내려앉을 때까지 하늘을 날게 되실 겁니다! 으하하하하!”
“광명의 주께서 당신에게 벼락을 내리실 겁니다!”
“지금 벼락을 맞으면 성자님도 같이 맞는 겁니다!”
저 앞에 대성당 종탑이 점점 가까워졌다.
담을 둘러싼 수도 시민들이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하고, 사제와 성기사들이 잔디밭으로 뛰쳐나왔다.
멋모르고 따라 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좋은 옷을 입은 궁정 귀족들도 여럿 보였다.
아무리 교세가 강한 광명신교라도 평일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올 리는 없다.
“……오늘이 주일이었나 보군요.”
“아무리 그래도 성자님께서 주일을 잊으시면 어떡합니까?”
내가 얄밉게 웃자, 성자가 내 허리를 꺾어버릴 듯 팔에 힘을 주었다.
“대공이 원래 7일이면 올 길을 악천후 핑계로 빙 돌아온 걸 알고 있습니다.”
“아.”
“차라리 잘됐습니다. 주일이면 홍의주교님들도 여럿 나와 있을 테니, 이참에 교황 임명 계획을 선언해야지요. 아르고스 홍의주교님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방금 엄청나게 중요한 정치적 선언을 들은 기분이다.
“교황…… 말씀이십니까?”
“예. 교회 행정 업무는 교황에게 맡겨두고, 저는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귀족들의 모금 행사에 나가서 좋은 말을 들려주며 빈민들에게 갈 돈을 모으고, 마경이 생겨난 곳이나 범람한 곳을 찾아가 정화해야겠지요.”
나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성자님도 전자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이제 신학생이 아니니까요. 현장에서 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지도층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하며 마테오스는 말을 이었다.
“어떤 의미로든 현장을 직접 방문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신께서 제게 주신 새로운 기적이 있고, 수도원에 들어올 정도로 세가 강한 침식자 교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평한 투구 같은 후드를 덮어쓴 그 침식자 사제 놈은 결국 잡지 못했다.
와이번을 타고 절벽 아래를 다 뒤졌지만 피 한 방울, 불탄 살점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실 역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기사들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나 말씀해 주십시오. 이 발렌시아누스 역시 자다가도 달려가겠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테오스가 점점 가까워지는 교회 잔디밭과 성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대공. 웃음으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마십시오. 대공은 채찍 고행을 통해 여러가지죄를 씻어내야 할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하하. 들켰군요. 그럼 저는 어쩔 수 없이 청은 기사단의 ‘투척’ 전술을 사용해야겠습니다.”
“예?”
나는 안장 위에서 허리를 돌려 마테오스를 안장에 묶어주던 가죽 벨트를 풀었다.
안 그래도 하얀 그의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지,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제 손 부러지지만 않을 정도로 꽉 잡으십시오!”
고삐를 당기자 와이번이 강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삿대질과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성자님을 납치한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돌아왔다!”
“저 미친놈이 대성당에 와이번을 타고 왔다!”
“망나니 대공을 화형 시켜라!”
“성자님을 납치한 대죄인이다!”
“성자님. 그동안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두 성기사, 안젤리카와 앙겔루스가 신성력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갑옷을 입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려오는 순간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리겠다는 눈빛이 형형했다.
하지만 나는 지상에 발을 디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입니다.”
“예? 무슨?”
나는 교회 담 위를 지날 때쯤 오른손으로 성자의 손을 잡은 뒤, 힘껏 끌어당겨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했다.
성자가 상공 10m에서 흔들리는 걸 본 시민들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신실한 귀족들이나 노인들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도 했다.
와이번은 바람을 타고 성당 담 안 잔디밭 위를 활공하며 천천히 하강했고, 나는 와이번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 고삐를 당겨 오른쪽으로 초저공선회했다.
펄-럭!
넓게 펼친 20m 날개가 바람을 머금고 다시 치고 올라갈 동력을 품었다.
성자의 발은 다시금 지면에 닿았고, 나는 손을 놓아주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성자님.”
“물매를 맞기 전에 돌아가십시오. 발렌시아누스 대공.”
와이번이 날개를 휘저으며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안젤리카와 앙겔루스가 침음성을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한껏 얄밉게 웃어 재끼면서 황궁으로 방향을 돌렸다.
* * *
나는 별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시종을 불러 저녁 시간에 알현을 청해 두었다.
더운물로 몸을 닦고 나오니 루디가 정갈한 시녀복 차림으로 내 옷가지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그 상냥한 목소리와 사점 안경 너머 반짝이는 녹색 눈을 보니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응. 하마터면 성당에서 죽을 뻔했지만.”
“의복을 입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윤기 없는 하얀 면 셔츠와 윤기 넘치는 하얀 제복을 입고, 붉은 띠와 금장 벨트를 차고, 향유를 약간 발라 백금발을 뒤로 넘겼다.
“시장에서 발렌 님을 모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루디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나는 루디가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거나, 마총으로 뒤통수를 쏴버린 게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악의적인 헛소문일 게 뻔하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래도 제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시지요?”
그녀의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높낮이가 없었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답했다.
“성자를 10m에 매달아 놓고 와이번을 타고 교회 안을 날았지.”
루디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정말로, 정말로 용감한 일을 하셨네요.”
그녀의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 대공 전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신 겁니까! 성기사들과 성난 군중들이 황궁 앞에 찾아왔습니다.”
완전무장 한 텐티아 경이 별궁 문을 왈칵 열었다.
하얀 면갑을 올리자 붉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폭도로 돌변하기 직전입니다. 흑철기사단의 치안감들이 모두 나섰지만, 진정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나는 회귀 전의 경험에 빗대어 상황을 파악했다.
“누군가 궁 담을 넘었나?”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마법을 퍼부으셨나?”
“아닙니다. 폐하께서 자기 신민들에게 마법을 퍼부으실 리가 없잖습니까!”
좋아,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거였다.
“별일 아니군. 앞으로 익숙해지게.”
“예?!”
“그리고 조만간 광명신교 쪽에서 자네를 통해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할 거야. 대성당에서 부르면 그거인 줄 알게.”
사람들이 보기에는 납치 후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거지만, 높으신 분들은 모두 진상을 안다.
수도원에 문제가 생겼고, 내가 욕먹어 가며 성자를 빠르게 데려다준 것이다.
이런 부분은 교회에서 잘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루디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초점이, 목소리에 높낮이가 돌아왔다.
“다 생각과 뒷배경이 있으셨군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했어요.”
“그래. 다행이다.”
“이제 시장에서 궁정귀족가의 시종 시녀들이 발렌 님을 욕해도 결투를 신청할 필요가 없어요. 발렌 님은 다 생각이 있으셨으니까요.”
나는 잠시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텐티아 경만 바라보았다.
“경.”
“예. 전하.”
“루디의 단검술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텐티아 경이 아주 기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주, 은신, 기습, 유술, 격술 모두 범인을 뛰어넘었습니다.”
“범인을 뛰어넘었다면……?”
“소드 유저, 아니. 루디 양이 정통 검술을 배운 건 아니니, 마나 유저라는 표현이 맞겠군요. 예. 마나 유저가 되었습니다.”
체내에서 마나를 운용해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단계, 초인의 첫 경지였다.
스무 살 넘어서 훈련을 시작한 것치고는 말도 안 되는 성취였다.
“세상에! 루디. 축하해.”
텐티아 경이 말을 이었다.
“정말 열심히 따라와 주었습니다. 매일같이 명상 수련을 했고, 기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달렸으며, 버릇없는 다른 궁정 귀족 가문의 시종 시녀들과 결투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충성심과 끈기, 제 후배들에게 배우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지요.”
기사에게 받는 찬사가 익숙지 않은지, 루디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발렌 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고마워.”
루디가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잠깐만.
“그런데 그 실력으로 다른 가문 시종 시녀들을 쥐어패고 다녔다는 거잖아? 미치겠다. 왜 나랑 같이 욕을 먹으려고 하는 거야?”
“과일 썰어 드릴게요.”
루디가 못 들은 척 헤헤 웃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 * *
알현실 뒤쪽으로 집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보고할 내용을 되뇌며 올라가던 중 친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누나?”
“동생아?”
남색 생머리에 푸른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
고깔모자와 화려한 로브를 입고 주먹만큼 큰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집은 천재 마법사.
세레라지에였다.
“누나가 나 전에 보고했구나. 이제 스크롤 양산 들어가는 거야?”
그녀가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더니, 내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스크롤뿐인 줄 아니? 별 마도구를 다 만들라고 하시는구나. 이래서야 자유 연구는 무덤에서 하겠어.”
“하하. 천재는 병으로 단명하거나 군주에게 평생 부려 먹히는 게 숙명이라고 하잖아?”
성군들이 잘하는 게 그거지.
천재를 부려 먹는 거.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천재니 그렇게 되겠구나. 어쩜 그렇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엿 먹일 수 있니. 정말 놀랍고 통쾌했단다.”
놀랍게도 칭찬이었다.
마법사는 사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으음. 말하자면 긴데. 저녁에 이야기해 줄게.”
“기대하고 있으마.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너를 못 볼지도 모르겠구나.”
“왜?”
“폐하가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 모양이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