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03화 (14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3화

(103)

대체 어째서 황제가 기분이 안 좋은가?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그 생각에 전념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내가 성자를 납치하는 구조로 데려간 일이다.

지식인 계층 정도만 되어도 뒷사정이 있다는 걸 알겠지만, 신민들이 보기에는 진짜 납치다.

애초에 제이릴리스가 나를 보낸 이유가 교회에 빚을 지워 두려는 거였는데, 황실이 교회에 큰 잘못을 저지른 구도가 되어 버리면 본말전도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회귀 전을 떠올려보자.

오늘따라 암살 시도가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어디 영지에서 또 군대를 모으거나 마경이 터졌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수도 있고, 궁무대신이 수도원에 연금한 다섯 황족을 풀어 달라고 온종일 탄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 특유의 혜안이 안 좋은 쪽으로 빛을 발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집권 30년 차의 제이릴리스는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저 반역자 놈의 목을 베라거나 저 나라가 곧 침공해올 거 같으니 선제공격을 하라고 지시하는 일도 잦았고, 그건 다 옳았으니까.

“발렌시아누스가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집무실 서쪽으로 태양이 떨어지고 구름이 붉은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동쪽 하늘이 군청색이 번져 간다.

황제는 그 커다란 유리창을 등지고 앉아 관절 반지 낀 손가락을 책상에 툭툭 부딪히며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석양에 달아오른 찬란한 백금발은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황금빛 눈동자는 비인간적으로 무심하게 빛나며, 오밀조밀한 얼굴은 최고의 장인이 뼛가루를 섞어 만든 최상품의 도자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왔는가?”

“예. 폐하.”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닐 줄 알았다. 수도원에 많은 일이 있던 모양이구나.”

나는 하루를 싸웠고, 14일을 뒷수습에 사용했다.

늦어서 화났구나.

“송구하옵니다. 이제 한동안 별궁에 붙어 있을 테니 언제든 불러 주소서.”

정답이었는지 그녀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청은 기사단에게 그 보고는 들었다. 안타레스 백작의 아들이 도르카이시스 백작의 딸과 함께 달려와서, 결혼하고 전쟁 끝내고 광산을 개발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다는구나. 네가 백작을 둘이나 살렸다.”

잘 됐구나.

다행이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탓에 세레라지에 대공이 개발한 새 스크롤의 첫 실전 투입이 미뤄지게 되었구나.”

아이고.

“인명을 구함이 우선이라 생각했사옵니다.”

“그래. 그대의 말이 옳다. 정신 차리고 충성을 바치겠다는데 넘어가 주는 것도 군주 된 자의 도리지.”

“훌륭하신 선택이시옵니다. 만세가 황제 폐하의 덕을 칭송할 것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싱겁게 웃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아라. 얼마나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기에 짐의 곁에서 1달이나 떠나 있었느냐?”

“예. 폐하. 소상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진상을 보고했다.

수도원장이 백작가 장남을 살려 결혼 시킴으로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옛것과 계약했고,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막대한 시약을 비공식적인 경로로 입수하다 꼬리가 잡혔다.

나와 성자는 하루 동안 싸워 침식자들을 물리쳤고, 성자가 기적을 일으켰다.

계약을 도와준 미지의 침식자 사제 세력이 존재한다.

수도원에 들어올 정도니 꽤 많은 수행을 쌓은 것 같으며, 수도원의 손을 빌려 성물의 힘을 이용해 침식의 기운을 감추는 방법을 연구, 손에 넣었다.

“그들이 배후라 추정되옵니다.”

말을 마치자 제이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 혹시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에서 있던 일을 기억하는가?”

“……누나의 복수라 보기에는 조금 석연찮았사옵니다. 비자금 보석을 찾으려 집무실을 뒤지던 중 수상한 서적이나 마도구도 몇 개 찾았었고요.”

“같은 자들이라 본다면 짐의 의심이 과한 것인가?”

“아니옵니다.”

나는 힘을 주어 단언했다.

수도원에 들어오고, 후작을 회유할 만큼 안정된 침식자 교단이 그리 흔할 리가 없었다.

“거리는 어마어마하지만, 놈들이라면 모종의 연락 수단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게다가 놈들은 쉽게 뭉치니,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와 더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구나. 짐이 온 제국을 뛰어다닐 수 없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회귀 전에는 그렇게 했고, 실패했다.

결국 침식의 지식을 얻은 유스티아누스가 마경의 경계를 열고 시체룡을 불러왔으니까.

나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며 말했다.

“이번 여름의 충성 맹세가 더더욱 중요해지겠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대영주들과 협력해 그 종양 덩어리들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 ……성자가 새 힘을 얻었다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구나.”

비정한 말이었지만,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로서는 성자가 침식자 한 명 한 명을 치료하겠다고 나서기보다는, 빠르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화의 불꽃을 뿌려 대는 게 더 나았다.

회귀 전에는 없던 힘을 다루게 된 이상, 그가 내가 아는 마테오스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상 달라진다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면밀하게 주시하겠사옵니다. 정 안 되면 다시 납치해 버릴 테니 안심하소서.”

“그러도록 해라. 하하하. 성자는 그리도 사내답게 생겼으면서 와이번을 못 탈 줄은 몰랐구나.”

“저도 놀랐사옵니다. 앞으로 적응시켜야지요.”

* * *

그 뒤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눴고, 혈마법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만은 숨기고 싶었지만, 제이릴리스가 나른히 말하기를.

“안색을 보니 새로운 마법을 배운 모양이구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아마 내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눈치챈 거 같았다.

“……그대로 손아귀 안에서 으깨질 뻔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반사적으로 혈마법을 사용해 벗어났습니다.”

결국 나는 모든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다 토해냈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으로 처분을 기다렸다.

황족은 마법을 익히는 행위 자체를 경계 당하고, 혈마법은 유난히 더더욱 경계 당했다.

제이릴리스라면 마법만 영원히 봉인해버릴 수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너무나도 예상외의 말을 했다.

“살아서 다행이다. 이미 익혔다니 어쩔 수 없구나. 잘 단련해 폭주하거나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예, 예?”

“이리 말할 줄 몰랐구나? 짐이 그대의 목을 칠 줄 알았나?”

차마 부정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용찬 의식을 한 그대는 비룡화가 진행될지언정, 어지간해서는 침식은 안 당할 것이다. 그러니 혈마법을 익히면 안 될 이유도 없잖은가?”

“아.”

“잘 갈고 닦으면 비룡화를 저지하는 대에도 도움이 될 거다. 단련하도록.”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매일같이 연마해 폐하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은 다 지켜냈고…… 가져온 걸 보니 그대도 그대 몫을 단단히 챙긴 모양이군. 성자가 경악하지 않았던가?”

“폐하께 뭐라도 가져가야 제 목이 붙어 있을 거라고 하니 내어줬사옵니다. 소유권은 여전히 교회에게 있다고 하더군요. 황실에 대한 신뢰의 표시라고 하옵니다.”

이게 참 재미있는 일이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에서 성물을 넘겨줬다고 하면 성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퍼지겠지만, 황실의 사절에게 신뢰의 증표를 주었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니까.

“그건 경이 보관하도록 해라. 짐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라.”

“예. 폐하.”

황실 안에서도 그걸 쓸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결국 내게 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그래도 한 번은 뽑아 보고 싶군. 듣던 대로 수수하구나. 성검 ‘영원’이라.”

장식 하나 없는 나무 손잡이와 염색도 하지 않은 갈색 가죽으로 두른 칼집을 가진, 어디 조그마한 장원의 대장장이가 만든 듯한 밋밋한 장검.

나는 애용하던 제식 장검 옆에 그 검을 차고 있었다.

“뽑아 보시겠습니까?”

제이릴리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고결한 황제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가? 짐은 명예와 영광, 세속의 부와 권력, 미식과 무력과 안정을 탐욕스럽게 열망하고 또한 배분하는 자이다. 초연하고 고결한 정화자 따위는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구나.”

그녀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 같았다.

나는 당연히 뽑을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제이릴리스가 나를 슥 훑어보더니 웃었다.

“하하하하. 그대의 옷차림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구나. 온갖 화려한 장식과 그 밋밋한 검이라니.”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더 어울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혹시……?”

“안타레스 백작과 도르카이시스 백작이 감사의 표시로 그대에게 선물을 보냈도다.”

그녀가 집무실 책상 아래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서 하얗게 염색한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신발이 한 켤레 나왔다.

“지금 신어봐도 되겠사옵니까?”

“그게 예의잖느냐?”

천만다행히도 내 발에 잘 맞았는데, 묘하게 튼튼하고 편안한 동시에 정갈하게 생겨서 어디서든 신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흡족하니 웃고 있으니, 제이릴리스가 말했다.

“그 신발의 이름은 ‘아니마 라멘툼’이다. 마나를 주입하며 ‘아니마’라고 시동어를 외치면 발바닥 쪽에서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와 몸을 띄우거나 밀어줄 것이다. 거리는 마법사들의 ‘점멸’과 비슷하다고 하더구나.”

금속과 보석을 쓰지 않고 마도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백작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받기에 충분한 값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제가 써도 되겠사옵니까?”

“짐에게는 맞지도 않고, 짐이 뛰는 게 더 빠르니라. 짐의 수족이 강해짐은 짐이 강해짐과 같으니, 그 신발을 신고 짐을 위해 열심히 달리도록 해라.”

나는 기쁘게 웃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수도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이제 대영주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 제국을 안정시켜야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자 예전에 살려준 얼굴들이 떠올랐다.

장교가 될 헬레나, 재무에 밝게 될 하드리탄, 미래의 정령술사 데니아, 그 외 5인.

“예. 폐하. 대귀족을 외가로 둔 황족들에게, 외가로 보낼 눈물겨운 편지를 쓰라 이르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흡족하니 웃었다.

노란 눈동자가 비인간적으로 빛났다.

“그래. 그대가 짐의 뜻을 잘 헤아리니, 실로 평안하구나.”

* * *

물결치는 짙은 금발과 불꽃 같은 붉은 눈, 야심만만한 사자와 같은 인상의 여인.

헬레나는 세간에서 ‘8인의 생존자’나 ‘8인지의 비겁자’라 불렸다.

세레라지에에게 칩을 내주지 않은 홍등가 지배인들과 침식자였던 란체아의 주도로 이뤄진 ‘대탈출’.

그때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복 남매들의 탈출 계획을 밀고했고, 살아남았다.

그 뒤로 그녀가 황동 기사단에 배정받은 지 거의 7달이 다 되어갔고.

그녀에게 주어진 업무는 일일 단련과 전술 서적 읽기, 워게임 참여뿐이었다.

“하아.”

헬레나는 메뚜기 떼가 쓸고 간 듯 황량한 책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출세했다면 형제자매를 팔아넘겨 부귀영화를 얻었다는 평이 억울하지라도 않지, 매일같이 기사들과 섞여 단련만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실 ‘황동’은, 근위대를 이끄는 ‘백금’, 바깥으로 나도는 ‘청은’, 치안감들을 거느린 ‘흑철’과 달리, 평화로울 때는 할 일이 많이 줄어드는 편이었다.

대규모 원정군 자체가 거의 꾸려지지 않았고, 소수의 정예병과 신병 교육부대인 교도대를 유지하는 건 기사의 일이 아니라 휘하 장교들의 일이었다.

‘흑철’이 휘하에 치안감들을 두고 수도 치안을 관리하듯, ‘황동’은 휘하에 장교들을 두고 군대를 관리했다.

물론 합동 훈련도 몇 번 했고, 실전에 들어가면 함께 움직이게 되지만, 일단 네 기사단의 단장 이하 일반 ‘가신 기사’들은 거의 ‘지휘’를 할 일이 없었다.

헬레나가 꿈꾸던 ‘지휘관으로서의 기사’는 영주로 살다 전쟁이 터지면 군대를 징집해서 올라오는 ‘봉신 기사’였다.

남들은 왜 고귀한 황족이 냄새나는 평민들과 섞여 복잡하고 피곤한 군대를 이끌고 싶어 하냐고 묻지만, 그녀는 그게 좋았다.

깃발과 피, 불과 철, 아주 오래된 영광.

치열한 전장에서 쌓게 되는 병사들과의 우정.

‘나를 따르라!’

현실은 오늘도 워게임 복기나 하는 신세였다.

“망할.”

심지어 너무 잘 만든 워게임이라서 할 때마다 계속 감질났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당장이라도 모병한 뒤 어디론가 행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때 단장이 그녀를 불렀다.

“헬레나.”

헬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 쥔 오른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며 예를 표했다.

그는 ‘황동’ 안에서 유일하게 병사들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며, 장교진을 부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본래는 단장이라도 황족인 그녀에게 반존대해야 했으나, 헬레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름뿐인 작위 따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고 전해달라는군.”

“관심 없습니다.”

얼굴과 작위만 보고 그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없었다.

그녀를 원하고, 그녀가 원하는 건…….

“발렌시아누스 대공이다.”

“다음부터는 그것부터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레나는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한 번 그녀의 인생을 바꿔 준 이복동생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인생이 바뀔 듯한 예감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