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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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는 봄꽃 하나둘 피기 시작한 발렌시아누스의 별궁 앞에 섰다.
거대한 상록수들이 가득 심어져 겨울에도 초봄에도 푸르른 궁이었다.
그녀는 청동 문고리를 그 아래 청동판에 부딪혀 방문을 알리며 생각했다.
소문보다는 덜 화려하다고.
7달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는 이복동생이었다.
그런 주제에 뛰어난 검 실력과 마법 실력을 갖추고, 과감한 결단력으로 일을 밀어붙였으며, 때로는 권력과 작위를 이용해 억지를 부리고, 때로는 한발 물러서 사람을 부렸다.
자신에게 다양한 강점이 있다는 걸 알고, 각각 상황에 맞춰 그 강점들을 섞여 사용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위험하지, 거물이 되기에 딱 좋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들은 대게 먼저 태어난 비슷한 녀석의 손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자는 도전자를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친, 적어도 쳤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제이릴리스가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일은 없었다.
군대를 사랑하는 헬레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모든 비행은 황제가 눈감아줄 만한 일이거나, 황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그가 대성당에 침식자를 몰고 가고, 성기사들을 폭행하고, 홍의주교를 추방하고, 빈민가에서 사람을 베어 넘기고, 홍등가에서 뇌물을 받고, 후작을 참수하고, 상아탑과 함께 수천 명을 살인멸구하려 하고, 결국 성자까지 납치한, 그 모든 일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눈감아 줄 수 있는 영역은 진작 넘었으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게 사리에 맞다.
그렇다고 발렌시아누스가 제이릴리스의 철저한 체스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헬레나는 제이릴리스의 피로 물든 즉위식을 직접 보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황족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파악한 제이릴리스는 상대와 체스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 원목 체스판을 들어 상대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죽이고 이 세상에 와서, 아버지를 죽이고 이 세상의 정점에 앉은 그녀가 공작 따위를 부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헬레나는 발렌시아누스라는 사람을 내적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언젠가 황제가 무력으로 해결할 일을, 자신이 먼저 나서서 훨씬 적은 무력에 술수를 더해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황제 제이릴리스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는 신하가 없으리라.
그게 자신을 꼭 닮은 친오빠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중요한 건, 발렌시아누스를 황제가 언제까지 믿을지다.
‘영원히?’
권력에 위협이 되면 제거하는 것이고, 제이릴리스의 권력은 무력에서 나오는데, 무력으로 제이릴리스를 이길 수 없다는 건 이미 2년 전에 증명되었다.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에서 온 소문으로는 그녀가 용맥에서 용을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돌았으니까.
그걸 발렌시아누스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만능이지, 지존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언제나 민심에 반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제이릴리스에 대한 민심이 ‘무서운 황제 폐하’라면 발렌시아누스에 대한 민심은 ‘천하의 개자식’이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유능해도 권력에 위협이 가지 않는다.
그걸 그 쌍둥이가 모를 리가 없다.
‘서로 아는 거다. 최소한 발렌시아누스는 알아. 자기 때문에 폭동이 나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민심을 얻으면 안 된다는 걸.’
그때 문이 열렸다.
“들어오십시오. 헬레나 대공 전하.”
별궁의 관리인은 맑은 녹색 눈을 가진 상냥한 인상의 시녀, 루디였다.
그녀는 물결치는 듯한 갈색 머리를 단정히 묶었으며,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하얀 블라우스형 원피스 위로 검은 드레스를 입어 단정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헬레나는 작은 연회장을 겸하는 넓은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루디에게서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발바닥에 삼각형을 그리고 걷는 훈련으로 완성되었을 걸음걸이는 갑자기 황소가 와서 들이받아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균형이 잡혀 있었고, 동시에 곧바로 2층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준민했다.
꽤 빠르게 걷고 있음에도 팔이 흔들리지 않아 어딘가 어색했는데, 그건 어느 순간에도 허벅지나 품 안에 숨긴 단검을 뽑기 위한 훈련의 결과임이 분명했다.
눈에 쓴 안경은 금화 수십 닢 가격의 ‘사점 안경’이었는데, 저걸 쓰고 있으면 날아다니는 파리도 화살로 쏴 맞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기도는, 누가 봐도 마나 유저의 그것이었다.
‘암살자. 그것도 마나 유저다. 소문의 그 시녀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키웠다는 잔혹한 결투 광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건가?’
“여기서부터 무장은 해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헬레나는 루디가 그 말을 했을 때 진심으로 망설였다.
하지만 아까 별궁 옆길에서 자신을 포함한 초대객들을 바라보던 쇼트커트 붉은 머리의 기사가, 빈민가에서 침식자 깡패들을 상대로 일기당천의 무용을 자랑했다는 그 텐티아라면, 검이 있든 없든 반항은 의미 없는 짓이었다.
다행히 연회장 문 안에서 혈향 같은 건 풍기지 않았다.
“잘 맡아 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순순히 화려한 장검을 풀어 놓고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하드리탄과 데니아는 막 들어서는 헬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왔나?”
“언니. 왔어요?”
“오랜만이다. 얘들아.”
그들은 7달 전 살아남았고, 능력을 인정받아 황궁에 남을 수 있었다.
헬레나는 ‘황동’, 하드리탄은 내무부 휘하 재무부, 데니아는 황립 마도 공방에 들어갔다.
만나려면 만날 수 있었고, 가끔은 오며 가며 우연히라도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결코 사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설령 사적인 만남을 가져도 그 자리는 친목 이상의 무언가가 되지 않겠지만,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도 그렇게 생각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귀족을 외가로 둔 황족 셋이 만난다는데요.’
‘한 명은 군부를 가진 기사단 소속이고, 한 명은 재무부 소속이고, 한 명은 마도 공방 소속이래요.’
그들이 발렌시아누스라도 당장 목을 날려버렸을 것이었다.
그렇게 란체아가 성자에게 불타 죽은 이후 3달 만에 만나는 셋이지만, 그들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다들 아무것도 못 하고 식물처럼 살았지?”
“말도 마세요. 7달간 소설만 읽었어요.”
“나와 똑같군. 그동안 재무부에서 내가 본 숫자라고는 식후 커피값뿐이다.”
1년간 워낙 좁은 곳에서 부대꼈고, 함께 모험했고, 함께 성공한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도에서 며칠 떨어진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던 5명도 가세해 그들은 한동안 수다에 전념했다.
“4달 정도 온종일 기도만 하니까 진짜로 은총을 내려주시더라. 영원히 거기서 살게 생겼어.”
“말도 마라. 여기도 금서 저기도 금서야. 보려다가 3일 동안 금식 기도 형 받았다. 황족이라고 때리지는 않는데, 굶기더라고.”
“거기서 그…… 아이 씨 이 언니들을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러니까 선황제 폐하의 첩 분들 있잖아. 촌수로는 우리 어머니뻘인데, 우리보다 귀족 서열은 한참 낮은 궁정 귀족 출신 여식들. 다 그 수녀원에 있더라. 생각보다 많이 살아 계시데?”
“나름 즐거워하시더라고. 자기 손으로 뭐 만들고, 기도하고, 1황자님이랑 황태자님 사이에서 피 말리는 세월을 몇 년 보내다 보니 다들 권력욕 같은 건 싹 마르셨더라고.”
그렇게 그들이 수다의 꽃을 피우던 와중, 하인들과 하녀들이 와 앞접시와 애피타이저를 세팅했다.
그러나 향기로운 음식에도 불구하고, 8명 중 누구 하나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들어오십니다.”
분명히 사람을 여럿 죽여 보았을 시녀가 녹색 눈을 번뜩이며 별궁의 주인이 납심을 알렸기 때문이다.
“으음.”
하드리탄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하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빠, 지금 뭐 하는…… 언니도요?”
데니아는 계승서열 한참 낮았던 동생을 대하는 하드리탄의 태도에 경악했다.
그리고 헬레나가 따라 일어나 턱을 당기고 가슴을 펴는 걸 보며 더더욱 경악했고.
“에이 씨!”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결국 따라 일어났다.
“왜 다들 서 있습니까? 드십시오. 신선한 재료로 준비했습니다.”
8인의 생존자, 또는 8인의 배신자 따위로 불리는 황족들은 하나같이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7달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의 발렌시아누스에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때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고작 한 살을 더 먹었을 뿐인데, 마치 수십 년간 국경과 의회라는 두 전장을 오가며 살아온 노회한 황족을 보는 거 같았다.
하얀 제복의 금장 장식과 붉은 띠는 그가 신임받는 황형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고, 샛노란 눈동자는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유쾌하게 넘긴 백금발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염구 같은 망나니의 면을 상기시켰고, 핼쑥한 뺨은 경박한 웃음에 가려진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손등에 남은 비늘 자국이나, 늘 차고 다녔을 검의 무게 탓에 약간 기울어진 걸음걸이는, 그가 능숙하고도 강력한 전사라는 사실을 드러냈고.
자리에 앉아 자신의 잔에 홀로 포도주를 따른 뒤 서슴없이 먼저 들이키는 모습은 원숙한 권력자가 보내는 화해와 안전의 신호였다.
‘그래도 대놓고 독살할 생각은 아니구나.’
‘억지 부리다가는 우리 목이 단숨에 떨어질 거다.’
‘인생을 바꿀 기회다.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거야.’
‘일 좀 시작하게 해주세요.’
‘광명신이시여. X 같은 수도원 좀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래. 죽기야 하겠냐? 아니. 죽을 수도 있겠네.’
‘친정 가고 싶다. 제발.’
각자의 생각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황족들은 값비싼 향신료를 넣어 만든 수프에서도, 올리브유에 구운 소고기와 돼지고기에서도, 전분 가루를 묻혀 튀긴 닭고기에서도, 살점만 발라내 훈제한 생선에서도, 대체 겨우내 어디서 보관한 건지 감도 안 잡히는 신선한 과일에서도 모두 종이 씹는 맛만 느꼈다.
‘간이 이상한가? 나는 맛있는데? 며칠간 대충 구운 양이나 육포만 먹어서 그런가?’
정작 미식을 즐기는 중인 발렌시아누스로서는 무척 당황할 일이었다.
“형들, 누나들. 음식이 다들 입에 안 맞으십니까?”
직각 식사를 하던 헬레나가 기사답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그 뒤로 행정 귀족의 길을 걸으려 하는 하드리탄이 추임새를 넣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맛봐야 해서 너무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
데니아 역시 자존심 같은 건 별궁 밖에 떼놓고 왔다.
“저는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끝났다.
* * *
발렌시아누스는 대충 분위기를 알아채고 일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그게 더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방법이었다.
“우선 헬레나 누나, 하드리탄 형, 데니아 누나까지 셋. 그동안 업무는 좀 익혔습니까?”
하드리탄은 서류는 만져 보지도 못했다며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가 성자를 납치하고도 살아 돌아온 싸움꾼이라는 걸 떠올리며 참았다.
셋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다섯 명, 조금 미안하게 됐습니다. 원래 봉쇄 수도원에 넣어 버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황제 폐하의 명이니 저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이 이를 악물며 답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번잡한 중앙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혔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제가 몇 달 전에 드린 말씀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편지를 쓰라 했죠? 기억합니까?”
셋이 먼저, 다섯이 나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 맹세.”
“외가를 설득하라고.”
발렌시아누스가 배부른 맹수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논조는 뭐든 좋습니다. 애원도 좋고, 설득도 좋고, 협박도 좋고, 호소도 좋습니다. 몇 통을 쓰든 상관없지만, 많을수록 좋습니다. 뭐가 되었든, 충성 맹세를 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오겠다. 이 답장만 받아내면 됩니다.”
발렌시아누스가 8명 모두와 한 명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성공하면…… 약속했다시피 원하는 걸 줄 겁니다. 출세의 기회나 자유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실패하면 돌아가게 되겠지요. 지루한 일상과 감시의 나날로.”
“!”
“물론 알아서 다 하라는 건 아닙니다. 황실도 황실대로 공문을 보낼 거고, 여러 방법으로 당근과 채찍을 쓸 겁니다. 여러분은 그 당근과 채찍 중 하나일 뿐이니 너무 마음에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참으로 부담 가지 않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