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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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귀족을 외가로 둔 황족들이 각자의 성격대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역사와 숫자로부터 제이릴리스의 장기 집권을 예상하고, 하루빨리 가세하는 게 새 황제의 치세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자도 있었고.
봉쇄 수도원에서 매일 금식 기도에, 고행에, 별 시답잖은 일들에 동원되어 힘들고 미쳐버릴 거 같다며 눈물을 쥐어짜는 자도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절박했다는 사실이었다.
‘내 부대를 받으려면 많은 신뢰가 필요하다. 삼촌이 빨리 가세해 줘야 해.’
‘장기적으로 황권 강화는 기정사실이다. 총독령도 넓어지고만 있어. 이참에 영지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수도의 궁정 귀족으로 합류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이건 너무 나갔나? 아니야. 그분들이 실지배하는 상단이 몇 개인데. 이 정도는 진작 눈치채셨겠지.’
‘내게 그 드문 정령 술사의 재능이 있다는데…… 꼭 제대로 개화해야 해. 세레라지에 그 애는 나랑 동갑에 이미 번듯한 공방까지 차려 놓고 있잖아…….’
‘이 X 같은 봉쇄 수도원!’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황족들에게 과제를 넘겨주고는, 과감하게 손을 뗐다.
‘7달이나 썩었으면 이제 다들 생각은 나 끝났겠지. 수도가 안정화되는 걸 다 봤을 거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하겠지.’
사람은 적응과 관성의 동물이다.
게으르게 살던 사람은 게으르게 살고 싶어 하고, 부지런히 살던 사람은 부지런히 살고 싶어 하고, 잔혹하게 살던 사람은 잔혹하게 살고 싶어 한다.
신민들은 황제의 폭정보다 겨울 빵값과 보릿고개를, 침식자보다 도시 깡패들을 더욱 무서워한다.
제이릴리스가 세금을 올렸다면, 지금쯤 회귀 전 역사대로 폭동이 두어 번쯤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를 앞세워 홍등가를 털어서 국고를 채웠다.
그 덕분에 재무대신은 제이릴리스의 의중에 맞춰 군비를 증강한 예산안을 가져올 수 있었고, 동시에 증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있었다.
‘세금 안 올리고 깡패 새끼들 잘 잡아들이면 그게 명군이지. 피로 물든 즉위식은 제국 역사에 흔하고. 언제는 황제가 1년에 6번씩 바뀐 적도 있었다는데.’
발렌시아누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부름을 받아 왔다. 황제 폐하는 안에 계시나?”
시종은 군기가 바싹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안에 계십니다.”
황형 발렌시아누스.
성자를 1달간 납치하고 와이번을 타고 대성당 담을 넘은 희대의 망나니.
깡패들과 궁정 귀족들에게 상납금을 받고, 술 분수와 홍등가의 고급 춘희들을 별궁 안에 들여놓고 주지육림의 연회를 연다는 탕아.
경박하게 뒤로 넘긴 백금발과 유쾌하고도 오만하고 어딘가 씁쓸한 미소.
갑옷처럼 두른 하얀 제복과 비인간적인 노란 눈동자.
제멋대로 살다가 제멋대로 죽을 듯 막 나가는 미친 황족.
“그래. 그럼 들어가겠다.”
“예!”
그런 소문의 주인공치고는 이례적으로 시종과 시녀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종잡을 수 없는 소년 대공.
발렌시아누스는 황량하고 호화로운 집무실을 가로질러 제이릴리스에게 다가갔다.
업무를 돕기 위해 주변에 대기하는 행정관과 시종들은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한눈에 둘이 들어올 때가 많지 않고, 옷 입는 스타일도 달라서 가끔 까먹지만, 둘은 쌍둥이였다.
행정관은 비인간적인 노란 눈동자들이 잔혹한 웃음과 함께 마주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 황제에 그 황형, 그 오빠에 그 동생이라고.
“폐하. 처리했사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여덟 대귀족을 설득할 것이옵니다.”
“수고가 많았다. 최소한 대귀족들이 똘똘 뭉쳐 충성 맹세를 거부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겠구나.”
“그렇사옵니다. 어느 대귀족도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자와 손을 잡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행정관은 피부로 알아챘다.
처음부터 대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8인의 생존자’를 이용한 게 아니었다.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다른 대귀족들이 알게 해서,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막은 거였다.
‘저 녀석은 언제 다시 황실에 붙을지 모른다.’
다른 대귀족들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 주는 게 첫 번째.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황실에 붙어 버려?’
8인의 대귀족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게 두 번째.
저 둘이라면 그 분위기에서 충성 맹세의 물결을 만들어 모두 끌어안겠지.
그럼 그의 황제는 다시 대륙 절반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된다.
그다음에는?
행정관은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어떤 거대한 흐름을 목격한 자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경외감일 것이었다.
* * *
나는 제이릴리스의 집무실 책상 앞쪽에 마주 앉아 가볍게 친족들의 동향 보고를 마쳤다.
딱히 그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무시 받을 환경에 처하게 한 건 아니었다.
헬레나를 황동 기사단 쪽으로 보내 달라 청한 건, 황동 기사단만이 군의 지휘와 관련이 있는 기사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이 세상이 너무 평화롭다는 거다.
침식자 문제가 사방에서 터지고 있는데 뭐가 평화롭냐고 하겠지만, 회귀 전에 비교하자면 그렇다.
그때는 제이릴리스가 매일같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진노의 창과 불꽃의 비를 내렸으니까.
당연히 회귀 전의 황동 기사단은 무진장 바빴고, 헬레나는 황제의 첨병으로서 출세 가도를 걸었다.
그러나 지금 제국은 적어도 아직은 내전에 휘말리지 않았고, 평화로운 시대의 황동 기사단은 남은 세 기사단이 질투할 정도로 편한 생활을 한다.
물론 그 편하다는 게 훈련과 워게임이지만, 근무를 서는 ‘백금’, ‘흑철’이나 임무를 나가는 ‘청은’에 비하자면 편한 게 맞다.
하드리탄도 그렇고 데니아도 그렇다.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고, 머리 잘 굴러가는 인재가 있으면 바로 써야 했다.
데니아 역시 전장에서 다양한 정령 마법으로 공을 세운 만능 술사였고.
난세가 영웅을 낳으니, 영웅이 없는 건 세상이 평화롭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셋이 나른한 일상을 보내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만, 이걸 말했다가는 셋이 너무나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올 테니, 나만 알고 있도록 하자.
어쨌든 인재를 계속 놀릴 수는 없으니 일을 줘야 한다.
셋이 경험을 쌓을 만한 적당한 자리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내 생각의 틈을 깨트렸다.
“……그러나 반드시 미리 포섭해야 할 대귀족이 있다.”
“예. 폐하.”
미친.
대화를 놓칠 뻔했다.
셋은 나중에 생각하자.
제이릴리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노란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그대는 제국에 대공 작위가 몇 개 있는지 아는가?”
나는 재빠르게 답했다.
“폐하와 소신이 꽤 줄였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하하하하!”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질문이 이상했구나. 황실을 제외하고 묻는 것이다.”
“그럼 하나뿐이지 않사옵니까?”
도르카이사스도 안타레스도 모두 몇백 년 전에는 한 왕실의 이름이었다.
제국은 수많은 국가를 정복하며 탄생했고, 어지간한 왕가나 그 왕가의 영토는 제국에 복속된 뒤에 백작으로, 백작령으로 격하 당했다.
일반적으로 왕가가 복속해오면 공작 작위를 주는 게 전통이지만, 그랬다면 제국에는 공작만 수백 명일 거다.
작위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따라서 지금 제국에서 황족을 제외하면 대공 작위를 가진 건 단 한 명뿐이었다.
“북부의 대공, 셉텐트리오스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 북부의 이물들과 마수들을 막아내고 있는 제국 제일의 대영주이니라. 제국이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끝없이 국력을 소모하지 않을 수 있는 게 그 덕이지.”
나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 제이릴리스를 죽일 뻔한 유일한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한때 그는 북부의 마경들을 모두 닫아내고 이물과 마수들을 토벌한 영웅이었다.
그는 내전기에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지만, 제이릴리스가 성자를 이용해 반란 영주들의 영지를 ‘정화하고’ 있는 걸 알고 나서부터 황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지켜낸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는 걸 볼 수 없다며 북부의 대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회유했지만, 그는 끝내 귀족 연합의 손을 잡았고, 그 뒤로 우리는 적이 되었다.
그는 검술로는 그 제이릴리스조차 고전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북부의 거대한 요새들을 이용해 수성전을 펼치니 어떻게 뚫을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서 자결하게 했던 거 같은데.
……생각만 해도 씁쓸해지는 기억이다.
“중요한 인물이고, 황실도 어지간한 요구는 모두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당근이 아니라 채찍이 필요할 때도 있지. 황실이 북부를, 셉텐트리오스를 제어하는 방법을 아는가?”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릴리스가 관절 반지 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답을 재촉했다.
“곡물이옵니다.”
“정답이다.”
그녀가 진정 기쁘다는 듯 웃었다.
“매일 술만 마시고 놀았으면서 그건 또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그래. 제국은 복부를 곡물로 관리하고 있다. 설령 기근이 들어 남부와 중부의 농민들과 도시들이 죄다 고사하고 아사한다 해도 북부에는 곡물을 보내 줘야 하나니.”
저걸 시행해 본 나는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굶어 죽는 사람에게 곡물을 빼앗아 싸우는 사람에게 주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독한 징세관들도 결국 눈물을 보였고, 제이릴리스도 그날 독한 술을 마셨다.
나도 그때 별 생각을 다 했던 거 같다.
북부가 무너지면 제국이 무너진다는 걸 수천 번 되뇌었지.
제이릴리스는 그런 내 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올해에는 밀과 보리, 옥수수와 콩 모두 작년에 비교해서 30% 이상 보낼 예정이다. 중부에 빈민들과 아사자들이 폭증하지 않을 선에서 지금 보낼 수 있는 물량을 죄다 끌어모았다.”
제국의 경제 기반은 농업이고, 농업은 생산량을 올리기 힘들다.
30%를 더 보낸다는 말은, 원래 다른 곳으로 가야 할 물량 30%를 뺐다는 뜻이다.
내 얼굴이 굳는 걸 보았는지, 제이릴리스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다. 작년에 북부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 생산량이 15%가 감소했다는구나.”
“!”
세간의 인식과 달리, 북부의 흑토는 농업 생산량도 높은 곳이다.
거기서 15%가 줄었으면, 우리가 평소보다 30%를 더 보내 줘도 간신히 손해를 면하는 수준일 거다.
“지금 곡물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면 그 거대한 요새에 싸울 수 있는 자가 없어질 테니.”
“예. 정말 어쩔 수 없군요.”
제이릴리스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은혜는 베풀 수 있는 때 제대로 베풀어야 하고, 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으로 받아야 한다. 북부 대공 역시 그걸 알고 있겠지.”
그렇겠지.
“곡물 운송 행렬에 그대를 따라 보내겠다. 북부 대공을 만나고 짐의 은혜를 전하거라. 내년에도 같은 양의 곡식을 받고 싶다면 올해 여름에 수도로 찾아오라고.”
“명 받들겠사옵니다. 그럼 소신은 북부로 올라가 대공을 만나면 되는 것이옵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와 있느니라. 함께 올라가면 되느니.”
* * *
나는 루디와 텐티아 경을 대동하고 운하 중앙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제 막 봄이 오는데, 너는 또 북부로 가는 거니?. 가서 덜덜 떨고 감기 걸려 오려무나.”
“나는 용찬 덕에 추위 안 타. 봄철에 꽃가루 마시고 재채기나 실컷 해라.”
세레라지에는 마도구 개발과 자유 연구에 미쳐 황실 마도 공방을 떠나지 않았다.
“이거나 가지고 가렴. 일단 하나뿐이니 꼭 필요할 때만 먹도록 해. 너같이 어리석은 동생 놈이 그때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파란 약?”
“일단 완성했단다. 시제품이니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 혹시 팔다리가 떨어져도 놀라지는 말고 붉은 약을 다시 먹으렴.”
“나가 죽으라고 기도를 해라.”
“……잘 다녀오렴.”
“……누나도 연구 잘하고.”
그렇게 또 한동안 얼굴을 못 보게 되었다.
……자유 연구하다가 침식당해서 참수당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네. 아닐 거예요.”
짐가방을 든 루디가 내 속을 읽은 듯 말했다.
텐티아 경이 늠름하게 웃었다.
“혈족을 걱정하시는 그 마음, 참으로 정직하십니다.”
“정직? ……아 저기 좀 보게.”
나는 선착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부끄러워하시기는…… 오오!”
텐티아 경이 탄성을 내지르고 루디가 목소리를 떨었다.
“대단하네요.”
그곳에는 수백 척의 우묵한 조운선들이 줄지어 있었다.
수많은 일꾼이 개미처럼 움직이며 곡식 자루를 배에 실었다.
아직 들어오지도 못한 배가 운하 바깥쪽 강에 한참 남은 거 같았다.
북부 대공과 그 신하들을 찾으려 선착장 주변 고급 식당과 커피 하우스를 둘러보았다.
10분쯤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회귀 전에 들어본 그 목소리였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뒤돌며 정중히 인사했다.
“셉텐트리오스 전하.”
이번에는 부디 황실과 북부 사이에 좋은 결말을 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