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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06화 (14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6화

(106)

하늘은 푸르렀고, 이제 겨울옷이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초봄 날씨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보다 대여섯 살이나 많아 보이는 눈앞의 사내에게 다시금 눈 내리는 차가운 겨울이 찾아온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폭풍 치는 바다처럼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과 눈 내린 벌판처럼 고요한 회색 눈동자.

눈이 짓눌려 만들어진 얼음 같은 뺨과 유일하게 핏기가 도는 입술.

어지간한 장신인 그보다도 약간 더 높은 눈높이와 금실로 장식한 자주색 제복, 빛바랜 회색늑대 모피를 두른 군복풍의 묵직한 코트.

그 못지않게 피폐한 눈매와 핼쑥한 뺨에서 느껴지는 책임자의 고독과 영광.

믿음직한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북방의 품격.

회귀 전과 같이, 북부 그 자체가 사람이 되어 찾아온 듯한 사내였다.

“‘전하’라니. 그리 극존칭을 써 줄 필요 없네. 우리는 같은 대공이 아닌가?”

사실 같은 대공이 아니었다.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수도의 황형과 왕국 몇 개를 합쳐 놓은 땅과 거대한 요새들을 지배하는 사령관은 결코 같은 대공일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인사말에서는 강자의 여유 또는 절박한 자의 호의가 담겨 있다고 해석해야 했다.

“처음 보는군. 정식으로 인사하지. 세베릭 하이시스 셉텐트리오스네.”

발렌시아누스는 그 품격 넘치는 목소리에서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그 정도 되는 사내가 자기 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받아내야 할 약속이 있었고, 고압적이지 않은 태도로 나와 준다면 고마울 뿐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입니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밝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며, 천사 같이 웃었다.

언제나 물에 젖은 듯 촉촉한 백금발이 사르르 떨어지고, 핼쑥한 뺨에 보조개가 파였다.

웃음기를 띈 금색 눈동자는 여전히 비인간적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괴물이 아니라 고급 도가지 인형을 떠올리게 했다.

루디와 텐티아는 제 주군의 처음 보는 얼굴에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루디. 발렌 대공 전하가 저렇게도 웃으셨나?”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웃음을 연기하려 약에 손을 대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본래라면 둘 옆에 붙은 기사나 종자나 문장관이 어디의 사령관이자 어디의 참수자이자 어디의 승리자 같은 수식어를 붙여 줘야 했다.

높으신 분들께서 체면 상하게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 둘의 인사는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언제나 인사보다 중요한 건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었다.

“북부의 대공으로서, 막대한 양의 곡식을 지원해 준 47번째 솔레타라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당황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도 되는 건가?’

47번째 솔레타라스.

사실상 제이릴리스를 황제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회귀 전 그와 죽도록 싸운 걸 생각하면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곡식을 전년 대비 30%가 넘게 증원해 주신 것. 금화 1만 5천 닢을 낮은 이자로 빌려주신 것. 북부와 중앙 간 대로와 운하를 건설해 주신다는 약속. 모두 이 세베릭이 똑똑히 기억할 것입니다.”

“고, 고개 드십시오. 북부의 얼굴이자 제국 제일의 대영주 아니십니까? 함부로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정 문제가 생기면 곡식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충성 맹세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북부 대공 세베릭은 천혜의 요새를 끼고 수십 년간 제국을 괴롭힌 악귀였다.

그런 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찬 가짜 망나니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제가 머리를 숙여 제 신민들과 병사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어디서 누구에게든 고개를 못 숙이겠습니까?”

“진정…… 고결하십니다.”

진심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이 고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같은 황족에게 몇 분은 수십만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그는 한때의 적에게 강력한 검객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품었고, 동시에 세베릭을 감히 동정했다.

폭군 제이릴리스를 따르는 자가 많았던 건, 그녀가 끝끝내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 40년간 군림할 수 있던 건, 그녀가 불꽃 같은 탐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회귀 전에도 궁극적으로 옛것과의 싸움과 승리를 원했고, 내전과 전쟁으로 얻은 세속의 부는 아낌없이 추종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렇게 제이릴리스는 시대를 거느렸다.

세베릭은 그럴 수 있는 사내는 아닌 거 같았다.

제이릴리스가 하고 싶어서 한다면, 세베릭은 해야 하기에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나 의무는 때때로 열망보다도 강한 법이었기에, 발렌시아누스는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강한 동맹은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곡식을 다 실을 때까지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서 커피나 한 모금 하시죠.”

텐티아는 썩어들어가는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기사는 나약한 부르주아 따위의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

세베릭이 난처하게 웃으며 답했다.

“미안합니다. 발렌 대공. 술집이나 식당으로 가시죠. 북부인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텐티아는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나는 회귀 전의 경험과 회귀 후의 경험을 모두 살려 최대한 가깝고 고급스러운 술집을 찾아냈다.

북부인들이 좋아할 만한 술이 많고, 정갈한 분위기에, 퇴폐적이면 안 되었다.

다행히 내 기억은 괜찮은 술집을 떠올렸고, 우리는 부관들과 함께 긴 테이블에 마주앉아 포도주와 위스키를 나눌 수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취향이 아주 고아하십니다.”

“아닙니다. 세베릭 대공. 정말 호쾌하고 사내다우십니다.”

“북부인이 이 정도도 못 마시면 얼어 죽습니다.”

나는 그가 40도짜리 위스키를 얼음도 안 넣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걸 보며 기겁했다.

“하하하하.”

“으하하하.”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아직 우리 사이가 나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누나나 고모나 이모를 선황의 후나 비나 첩으로 보내지 않았다.

당연히 재작년의 즉위식에 죽은 황족들과는 조금도 혈연이 없었다.

물론 제이릴리스가 수백을 베고 옥좌에 올랐다는 소문은 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군주로서,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에게 빵을 먹여줘야 하는 신성불가침한 의무가 있었다.

자기 주머니를 위해 머리를 숙이면 약삭빠르거나 비굴하다는 평을 듣지만,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위해 머리를 숙이는 건 고결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움직인 훌륭한 북부 대공이었다.

까탈스러운 부관을 데려오지만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긴 테이블에서 텐티아 경과 마주 보고 앉은 흑발의 여자가 자꾸만 내게 시비를 걸었다.

느껴지는 기운과 허리에 찬 장검을 보니 기사 같았지만, 금테 두른 외눈 안경과 질끈 묶은 머리, 서류 가방을 보면 행정관 같기도 했다.

“왜 그러나?”

“저는 세베릭 대공 전하의 행정 사무 대리를 맡은 기사 르세나입니다. 저희 대공 전하께서는 감사만 드리셨으니, 저는 실무적인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내용보다도 월권이 아니라는 걸 먼저 강조하는 게, 확실히 실무 경험이 많아 보였다.

세베릭이 난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제 주군의 만류를 뿌리쳤다.

“제게 실무를 맡기신 건 세베릭 전하니, 저는 전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르세나가 세베릭 옆을 따라다니는 이상, 북부의 권력자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태도를 보니 어느 정도 인간적인 친분도 있어 보였다.

나는 술잔을 가볍게 밀어두고 몸을 대각선으로 돌리며 르세나가 보여주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막대한 양의 곡식을 지원해주신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이 물량을 이 시기에 이 정도 규모로 보내주신다면, 창고가 모자라 다 보관하지도 못하고 썩게 될 겁니다.”

“한참 보릿고개를 겪을 시기 아닌가? 그때 맞춰 도착하도록 했는데.”

“중부와 북부는 기후 차이로 보릿고개 시기가 다릅니다. 장기 보관을 하려면 밀가루나 보리가루로 받아야 하죠.”

황실의 행정관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황실은 북부에 밀과 보리는 무상으로 지원해주시나, 밀가루와 보리가루는 정가 구매권과 구매우선권으로 주십니다.”

결국 가루로 된 건 돈 내고 사야 한다는 말이었다.

가서 빻으면 안 되냐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엄청난 양을 다 빻을 수는 없고, 그건 다시 보관 문제가 된다.

물론 돈이 있어도 곡식을 못 구하는 시기니 ‘무조건’ 사 갈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특권이었다.

“어쩔 수 없네. 밀은 세금으로 거둔 황실의 소유물이니 내어줄 수 있으나, 밀가루는 독점적인 제분 길드가 관리하니 말이야.”

“그 길드의 최대 구입처가 황실입니다. 황실은 저희에게 정가 구매권을 주셨지만, 동시에 길드에 밀가루를 팔 때 연평균 가격 대비 400%를 올리셨습니다.”

나도 몰랐던 일이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었네.”

“결국 저희는 장기 보관할 밀가루 물량을 위해서 황실이 빌려주신 그 돈에 손을 대야 했습니다. 낮지만, 이자는 확실하죠.”

“!”

젠장, 행정 쪽은 거의 관심을 안 가지고 있어서 몰랐다.

가만히 듣던 루디와 텐티아가 내 쪽을 바라보며 ‘설마 이번에도 전하이십니까?’ 하는 시선을 보냈다.

아니, 이건 진짜 내가 한 게 아니다.

누구지?

제이릴리스는 이런 음모를 꾸밀 만한 성격이 아닌데…….

“저희는 인구 대비 병사의 수가 많은 만큼, 인구 대비 농업 생산성이 낮습니다.”

본래 농사지어야 할 사람들이 다 창 들고 싸우고 있으니 당연하다.

“결국 식량은 중앙과 남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르세나를 바라보았다.

“일개 기사이자 행정관인 제가 감히 억측하겠습니다. 황실은 북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하는 게 아닙니까?”

그녀가 대충 인물인지 알 거 같았다.

뛰어난 무력을 보유한 기사인 동시에, 군주의 곁에서 인간적 친분을 쌓고, 행정과 정무와 말 못 할 일들에 개입해 어떻게든 일을 굴러가게 하며, 초월적인 권력을 누린다.

딱 나였다.

술만 술술 마시던 세베릭이 달라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회색 눈동자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호흡, 혈류, 기운, 자세, 눈동자 떨림 등을 통해 거짓말을 파악하는 기술이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다.

감사는 감사고, 검증은 검증이다.

세베릭이 합리적인 군주 역을, 르세나가 망나니 역을 맡은 거였다.

나는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베릭을 이해했다.

탐욕에 불타는 자는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선을 지키지만, 의무감에 찬 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해야 한다면 하기에 선을 넘는다.

그로서는 황실이 북부를 어떻게 대하려 하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텐티아 경이 낮게 속삭였다.

“전하. 정말로 이런 기사답지 못한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뻔뻔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모두 다 내가 지시한 일이네.”

황실이 사고를 쳤으면, 내가 친 거여야 한다.

내가 사고 친 건 황실이 지켜줄 수 있지만, 황실이 친 사고를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

르세나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짚었네. 내가 북부를 경제적으로 영원히 황실에 종속시키려 했어.”

* * *

조운선에 곡식을 싣는 작업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동쪽 수문을 통해 강으로 나갔다.

수도 성문 안쪽이었다면 누군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이 아무리 환하다 한들 태양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타악, 그림자 하나가 유난히 큰 배로 몸을 날렸다.

강둑부터 배까지의 거리는 30m도 넘었지만 그건 그들에게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 뒤를 이어 그림자 몇 개가 더 따라붙었다.

“나는 저놈.”

“나는 이놈.”

이상한 말소리를 들은 선원이 가까이 다가와 횃불이 들이밀었고,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눈코입귀 중 입만 있고 남은 셋이 모두 달걀처럼 매끈할 리가 없었다.

“봤네?”

푹, 푹푹!

단검이 휘둘러지고, 피를 마신 그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시 떠올랐다.

선원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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