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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07화 (14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7화

(107)

2월 중순, 강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매서웠지만, 뱃전에 선 사내에게 이 정도 바람은 봄의 산들바람일 뿐이었다.

북부 대공 세베릭은 수백 척의 선단을 거느리고 강을 따라 북으로 또 북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그의 남색 머리카락과 두툼한 제복이 다시금 파도치게 했다.

‘발렌시아누스.’

백발 금안에 여러모로 비인간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소문만으로는 어지간한 침식자조차 도망칠 대악당이지만, 그는 그런 소문이 널리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세베릭은 그 사실에서 발렌시아누스가 어떠한 종류의 유능함이 있다는 걸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유난히 그 이름이 많이 나오는 곳이 빈민가와 홍등가다.’

어느 영주든 가장 골머리를 앓는 부분 그 둘이었다.

빈민들은 생산하지 못하고, 홍등가는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인구수에 따라 그 둘은 부풀어 오르기만 하고, 제국 수도는 대륙 최대의 대도시다.

그는 수도 솔레타라온의 홍등가와 빈민가가 구제 불능의 인외마경이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사복 기사들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은 그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빈민가는 이제 빈민가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번창해서, 높은 인구 밀도를 무기 삼아 대형 공방의 하청을 도맡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홍등가에서는 노예는 물론이요 수상한 약이나 연초도 찾을 수 없었다.

‘매일같이 드나들며 인간 사냥을 즐기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놀이를 일삼았다지. 여기서 옳은 부분은 ‘매일같이 드나들며’뿐인가?’

세베릭은 며칠 전 그 고급 술집에서 발렌시아누스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일개 기사이자 행정관인 제가 감히 억측하겠습니다. 황실은 북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하는 게 아닙니까?’

그였다면 여기서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거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신분을 이용해 윽박지르거나, 검을 뽑았을지도 몰랐다.

위의 세 가지 방안 중 첫 번째는 제대로 된 방안조차 아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안은 세베릭이 더 잘한다.

‘발렌시아누스가 소문의 망나니일 뿐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큰 낭패를 보았을 텐데.’

세베릭과 르세나는 그 길로 발렌시아누스를 데리고 황제 제이릴리스를 알현한 뒤 황실의 태도를 문제 삼아 더 많은 지원을 받아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모두 다 내가 지시한 일이네.’

‘정확히 짚었네. 내가 황실에게 북부를 경제적으로 영원히 종속시키려 했어.’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동자를 담담히 빛내면서.

세베릭과 르세나는 그 순간 알아챘다.

그건 북방의 거대한 요새만큼이나 단단한 철벽의 논리였다.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더해 봐야 철벽에 돌진하고 수렁에 빠져드는 상황 이상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상대가 수렁에서 뒹구는 개싸움의 전문가라면, 그들이 응해 줄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북부의 남은 창고들이 다 비기 전에 다시 곡식을 채워 넣어야 했으니까.

르세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남쪽도 아직 입김이 나오는군요. 제가 아는 남쪽은 사시사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곳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언제나 입김이 나오지 않나? 경이 생각하는 남쪽은 수도 기준으로도 한참을 내려가야 하네.”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습니다. 전하와 함께.”

르세나는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한 뒤, 보고를 시작했다.

“루디라는 시녀는 시녀 겸 암살자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오래전에 명맥이 끊어진 무기, 마총을 언제나 소지하고 있더군요. 붉은 머리의 그 젊은 기사도 그 갑옷에 어울리는 실력자입니다.”

세베릭은 갈라지는 강물을 보다 물었다.

“경과 싸우면, 이길 수 있겠나?”

르세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실력도 실력입니다만, 무구의 격차가 너무 심합니다.”

“알겠네.”

그만하면 되었다.

세베릭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이 감당 못 하는 걸 감당해주는 게 군주의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어떠한가?”

“배에 탄 이래 선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온종일 명상 수련만 하는 거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불러 주게. 슬슬 수적 놈들의 구역에 들어갈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명목상으로나마 황실이 붙여 준 수송 행렬의 총괄자였다.

물론 말 그대로 명목상이었지만, 그래도 알려줄 건 알려 줘야 했다.

약간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었으니까.

* * *

테이블에 마주 앉은 발렌시아누스의 눈이 열의로 빛났다.

“맡겨만 주시지요. 최소한 이 배 근처로는 한 척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세베릭은 예상외의 적극적인 태도에 당황했다.

북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겠다던 계획에 죄책감이라도 가지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저 황금색 눈동자를 보면 그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생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르세나는 발렌시아누스가 누군가를 태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고 생각했고.

‘종잡을 수가 없군. 오로지 그 순간에 충실한 유형인가? 그런 거라면 조금 이해가 간다만.’

세베릭은 발렌시아누스가 지독한 원칙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발렌시아누스가 들었다면 허탈하게 웃었을 생각이었다.

‘이참에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회복해야겠군. 생각해보면 그때 그 말은 주도권을 얻으려는 트집에 불과했는데, 나답지 않게 너무 긴장했어.’

주도권 싸움은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세게 나간다면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된다.

‘너무 잘하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애초에 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편이었잖아. 수적들이 나온다니 이참에 확실히 보여줘야겠네.’

당신과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날 저녁 선단은 커다란 호수에 들어섰다.

사방에 수평선이 보일 만큼 큰 호수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초저녁부터 갑판에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텐티아와 루디는 그의 곁을 지켰다.

텐티아는 목까지 차오른 의문들을 삼키고 르세나에게 들은 말들만 전했다.

“호수가 워낙 크고 섬들도 많으며, 주변을 둘러싼 가문이 여럿이라서 합동으로 수적들을 토벌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영주에게 허가나, 심지어 후원을 받고, 적대 관계인 가문과 거래하는 상단을 공격하는 사략선들도 여럿이라는군요.”

“무장이나 함선 규모는 변변찮겠군. 불꽃 마법 한 방이면 다 가라앉겠어. 경은 조심하게. 혹시 빠지면 그대로 가라앉을 테니.”

“다 대책이 있습니다. 기사는 용맹하지만 무식하지는 않은 법이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기사에 대한 말을 꺼낸 게, 결국 애써 감췄던 의문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발렌 대공 전하.”

텐티아는 침을 삼키며 한 발자국 다가갔다.

“목소리 깔지 말게. 무섭네.”

발렌시아누스가 난간에 기대 실없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

“북부 곡식 지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관계하신 게 없으시잖습니까?”

희생과 영광.

주군의 불명예를 떠안고 사라지는 기사 역시, 텐티아가 생각하는 기사의 낭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싸움 중에 상대의 눈을 찌를 정도로 기사도와 거리를 둔 사내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한없이 ‘손해 보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왜 내가 관계한 게 없나? 말했잖는가? 모든 걸 내가 지시했다고.”

“성자 납치 사건 후 돌아온 대공 전하가 한 일은 ‘8인의 생존자’와 만나고 놀고먹은 게 전부이시잖습니까?”

“…….”

텐티아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계속 물었다.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발렌 전하라면 후자는 최소한으로, 전자는 최대한으로 챙기려 하실 거 같습니다. 물론 저는 전하가 뼛속까지 악한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하가 얻으신 게 하나도 없으시잖습니까? 왜 책임만 지려 하십니까?”

루디 역시 텐티아의 물음을 경청하며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물 쪽을 확인하고 아직 수적이 없자,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무 논리가 완벽했네. 거기서 대충 억지 부려 봐야 안 통할 거 같았거든. 기선 제압을 위해서는 조금 뻔뻔하게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았어. 어차피 그 상황만 넘기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도.”

“또 다 내가 했다는 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세. 사실 경 잘못도 있겠군.”

“예?”

발렌시아누스는 한 번 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이번 겨울에 유난히 수도 식량값이 오른 거 같나?”

“흉작이…….”

“옛 빈민가 때문이네. 수도에 사람 자체가 늘어났어.”

“!”

“본래 밖에서 들어온 빈민들은 돈이 없어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굶어 죽어야 했지만, 우리가 코넬을 도와 그들이 돈 벌 방법을 만들어줬지. 입이 늘어나고 돈도 늘어났지만, 식량은 그대로니 당연히 값이 오르는 거야. 신기하지 않나? 돈의 흐름을 보면 다 이유가 있다네.”

텐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루디 역시 녹색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그러니 어찌 이게 내가 한 게 아니겠는가? 사람은 살려야 했으니 그때 최선을 다했고, 지금은 또 지금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러다 보면 조금 비겁하고 뻔뻔한 소리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말이야.”

텐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답했다.

“……확실히 조금 비겁하고 뻔뻔한 소리를 해야 할 거 같기도 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제복 단추를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베릭 대공은 그럴 사람이 아니겠지만, 만약 나 같은 자가 북부 대공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했겠나?”

텐티아는 이게 황실 모욕죄에 걸릴지 걸리지 않을지 고민하며 답했다.

“빈민들 따위를 위해 제국의 방패인 북방의 병사들을 굶긴 거냐고 따질 수도 있으시겠군요.”

“그래. 나였으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거네.”

발렌시아누스는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세베릭 대공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 다 내가 한 짓이라고 하자, 그냥 넘어가 주었어. 그는 고결한 사내네. 다음 해에도 다다음 해에도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질 만큼.”

텐티아는 그 말에서 은근한 낭만을 느꼈다.

“다 내가 한 짓이라고 하자,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렇군요. 이참에 발렌 대공 전하도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질 만큼 고결한 사내가 되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꿈도 꾸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건 세베릭 대공의 길이지,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길이 아니네. 나는 사람의 악의를 너무 많이 보았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네.”

텐티아는 그 말이 들숨 날숨 같은 궤변이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넘겼다.

그러나 루디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발렌 님은 이제 고작 18살이신데, 어떻게 저런 분위기로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요? 꼭 겪어보신 거 같네요.”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돛대에 선 사내가 선단이 떠나가라 외쳤기 때문이다.

“수적들이다!”

* * *

수적들은 조운선보다 약간 작은 배를 탔다.

그들은 돈 되는 건 없고, 인간 흉기들만 가득 타 있는 대형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수백 대의 조운선이 줄지어 움직이니, 그중 한두 대라도 훔칠 수 있으면 남는 장사였다.

“아무 배나 챙겨라……! 히이익?”

수적 두목은 뱃머리에서 검을 뽑아 들고 외치다 보았다.

대형선 높은 돛대 위에 선 백발 금안의 사내를.

“황족?”

사내의 등 뒤에서 떠오르는 열 개의 장창 같은 불꽃을.

쐐애애액!

본래 주문을 100m 이상 쏘아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기예였다.

하지만 그는 황족의 힘을 과시하듯 400m도 넘게 떨어진 수적들에게 열 개의 불꽃 창을 동시에 날려 보냈다.

퍼버벙!

불의 창에 꿰뚫린 배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열 척의 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저 개자식이!”

몇 행동대장들이 뱃머리를 틀어 대장선으로 향했다.

“미쳤냐? 돌아와!”

“그대로 놔두면 대장도 죽을 겁니다!”

“형제의 원수를 갚을 겁니다!”

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녀석들은 처음부터 수적질만 해서 기사의 무서움을 몰랐다.

행동대장이 입에 칼을 물고 대장선을 올랐다.

“어서 와라.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그들을 기다리던 건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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