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9화
(109)
기사는 검객이 아니다.
그들은 검객과 달리 온몸을 감싸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검뿐만이 아니라 창과 활도 잘 다루며, 와이번과 군마를 탄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기당천이라 불려 마땅할 인간 흉기들이었고, 그 실력에 마땅한 대접을 받았다.
군주는 기사들은 ‘아주 잘’ 먹여주고 ‘아주 잘’ 입혀주고 ‘아주 잘’ 재워줘야 했으며, 보통 행정관료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고액의 연봉을 줘야 했다.
제이릴리스는 총 200명으로 꾸려진 네 기사단을 유지하는 데에 매년 대도시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황금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역대 제국 황제들을 비롯한 군주들이 자신의 기사들이 픽픽 죽어 나가지 않도록 노력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첸트 연구를 통해 갑옷에 강도 강화 마법진과 탄성 강화 마법진, 내열, 방전, 방화 마법진이 하나하나 덧붙기 시작한 이래로 기사 외의 존재가 기사를 죽일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결국 기사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익사가 되었다.
강 근처에서 싸우거나 해전을 치르던 중 빠져서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다.
평소 그들을 지켜 주었던 두꺼운 갑옷이 그때는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라는 걸 텐티아는 차가운 물 속에서 떠올렸다.
갑옷에 새겨진 항상성 마법진 덕에 얼어 죽을 리는 없었지만, 갑옷 틈으로 들어온 물의 냉기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붉은 눈을 뜨며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달빛과 발렌시아누스의 불꽃이 아득하게 부서지며 일렁였다.
부르르르르르르-.
물거품 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잡았다!”
배가 뒤집혀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했지만, 수적 두목은 환하게 웃었다.
근처의 간부들과 다른 배에 탄 행동대장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수수깡처럼 날려버리던 기사를 배 한 척과 부하 쉰 명 정도로 잡을 수 있었으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대체 왜 배가 부서졌는가? 따위를 묻는 얼간이는 없었다.
그건 수적답지 못한 짓이었다.
수면 위의 함성은 수면 아래의 기사에게 들리지 않았다.
텐티아는 페활량과 체력 모두 초인의 범주에 들어 있었고, 숨을 30분도 넘게 참을 수 있었지만, 호수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더 깊이 가라앉으면 천천히 목이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웃었다.
좋은 부모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좋은 기사셨고, 좋은 남편이었으며, 좋은 아내셨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쓴 지도 오래였다.
언젠가 장기 휴가를 받는다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길게 이야기해 드려야겠다.
위기에 처했을 때 떠오르는 게 진정한 욕망이라고 했던가?
개망나니 대공 황형 발렌시아누스를 아직 갱생시키지 못했다는 게, 기사도를 가르치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아무리 다급했다고 해도 성자를 납치한다는 게 보통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발상은 아니었다.
‘올라가면 한 번 더 말씀드려야겠군.’
텐티아는 이대로 가라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몰랐지만, 지금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웃음을 짓고 있는 수적들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와 왕들과 귀족들과 마법사들은 기사 사망 원인 1위가 익사인 그 상황을 내버려 둘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막대한 예산과 촉박한 시간이 주어졌고, 마법사들은 밤을 새워 가며 결국 답을 찾아냈다.
텐티아는 흉갑 아래쪽에 선명하게 새겨진 마법진을 느끼며 마나를 흘려보냈다.
쩌저저저저저저적!
갑옷 바깥쪽에 성에 같은 얼음이 끼고, 급격하게 그 크기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텐티아의 몸이 순식간에 작은 방만한 얼음덩이에 둘러싸였다.
아래로 또 아래로 가라앉던 그녀의 몸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바람 마법을 이용한 수류 조작부터 불꽃 마법을 이용한 추진까지 별의별 연구를 한 끝에, 얼음이 물보다 가볍다는 기초적인 상식을 이용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최아악!
커다란 얼음덩이가 물살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뭐야?”
“얼음이 얼 계절은 아닌데?”
“설마?”
수적들은 눈을 까뒤집으며 경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갇혀 질식해 죽었겠지만, 기사는 숨을 20분 정도는 참을 수 있었고, 얼음 따위야 설탕공예처럼 부숴 버릴 수 있었다.
쩌저적, 그리고 쾅!
얼음 조각을 박차고 뛰어오른 텐티아가 또 다른 배 위에 올라섰다.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다.”
* * *
텐티아는 수적들의 배를 수십 척 정도 더 침몰시키고, 도망치는 두목의 배에 올라탄 뒤 두목을 산 채로 잡아왔다.
“저는 이곳의 남작님께 허가를 받고 사략 활동을 하는 선장입니다. 저를 함부로 처형하신다면 이곳 남작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두목은 허가증을 꺼내 들고 최선을 다해 혓바닥을 놀렸다.
“사실 피해를 본 것도 없으시잖습니까? 대공 전하와 기사님들에서는 법에 따라 영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셔야 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두목을 발칙하고 귀여운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썩 훌륭한 궤변이었다.
“세베릭 대공 전하. 이참에 이 주변 남작령들을 죄다 정리하고 전하의 총독령으로 만드는 게 어떠십니까?”
“그대에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황실에서 경계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북부와 통하는 운하 사업도 벌이고 있는데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황제 폐하도 이 호수 근처를 한 번 정리하겠다고 말씀하셨고요.”
광오할 정도의 말이었지만, 그걸 말한 게 황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제야 두목은 자신이 감히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될 존재들을 건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시기에 저 정도의 조운선단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갈 존재가 누구겠는가?
‘……북부 대공 셉텐트리오스. 망했다.’
두목이 내심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발렌시아누스는 웃었다.
“네놈. 몸값을 낼 수 있느냐?”
사람은 희망이 생겼을 때 제일 간절해진다.
두목은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고, 텐티아가 나포한 그의 배에서 은화로 가득 찬 궤짝을 죄다 가져왔다.
“앞으로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도록 해라.”
발렌시아누스는 정말로 그를 풀어주었고, 르세나는 대놓고 불만에 찬 시선을 보냈다.
“황형씩이나 되시는 분이 은화 몇 닢에 눈이 멀어 범죄자와 거래를 하십니까?”
세베릭과 텐티아 역시 썩 마음에 드는 표정은 아니었다.
세베릭의 곡식을 노략질하려던 자들을 발렌시아누스가 멋대로 풀어준 만큼, 심각한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희대의 궤변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도망친 수적도 꽤 많았지.”
“그랬습니다만?”
“사략 허가증이 있으면 그걸 발급해준 영주에 대한 의무도 생긴다네. 포로를 함부로 죽이면 안 되고, 몸값도 일정액 이상 받으면 안 되고. 포구나 항구, 강변 마을을 습격해도 안 되지.”
“그래서 두목을 살려주셨다는 겁니까?”
“사략 허가증은 수적 패거리가 아니라 사람에게 발급되는 것이야. 그동안은 놈들이 저 두목 밑에 붙어 있었으니 방금 말한 걸 지켰겠지. 저놈이 없어지면?”
르세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으로 흩어져 강변 마을들을 약탈하겠군요.”
“그래. 잘 알고 있잖은가. 우리가 만약 토벌을 나왔고, 끝까지 추격해 씨를 말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네. 하지만 그게 아닌 이상, 놈을 죽여봐야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야.”
물론, 하고 운을 떼며 발렌시아누스는 정중히 덧붙였다.
“감히 세베릭 대공 전하의 곡식을 훔쳐 가려 했던 무뢰한에게 합당한 값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라면, 내가 큰 실례를 했네. 복수는 기사와 귀족의 명예로운 권리지.”
르세나가 외안 안경 너머 눈을 가늘게 떴다.
세베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르세나는 혀를 차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강변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이상, 세베릭이 핏값을 받겠다고 할 일은 없었다.
텐티아는 투구를 벗으며 물 밑에서 했던 생각을 흩어냈다.
물에 젖은 쇼트커트 붉은 머리가 축 늘어졌다.
“방금도 썩 기사다우신 말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은화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으신 걸 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런가?”
그는 텐티아에게 잘 마른 수건을 건넸고, 텐티아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짧은 머리를 몇 번 문질러 쉽게 말렸다.
“예. 하지만 황형다우셨고 대공다우셨습니다.”
그쯤 되는 자가 기사처럼 일신의 자존심만을 목숨 걸고 쫓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신민들을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는 게 더욱 명예로운 일이었다.
텐티아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돈을 받지 않으셨으면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아릿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수는 없네.”
“어째서이십니까?”
“그랬다가는 황형 같아 보일 테고 대공같아 보일 테니까.”
텐티아는 웃음과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루디를 부른 뒤, 함께 뒤쪽 갑판으로 향하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배는 왜 뒤집힌 건가? 이 날씨에 히드라나 악어 마수 같은 게 지나갈 리가 없잖은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큰 물고기 같은 그림자를 본 거 같은데, 말머리 같기도 하고…….”
이례적으로 텐티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당황한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 옛것의 기운에 상이 흐트러졌거나 실제로 그렇게 생긴 괴물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알기로 말머리와 물고기 같은 게 섞인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그는 즉시 세베릭에게 달려가 말했다.
“세베릭 대공. 아무래도 대장선 근처에 사악한 정령이 하나 달라붙은 듯합니다.”
북부 대공은 이례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곧바로 갑판으로 나왔다.
북부는 혹한 덕에 일반적인 마수는 비교적 적지만, 다양한 기이들이 발에 차이는 곳이었다.
정령인 만큼 일반적인 마수와 똑같이 상대할 수 없어 골치 아플 때가 많았다.
“무엇인지 알 거 같습니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켈피 같습니다.”
세베릭은 회색 눈을 찌푸리며 검을 다시 뽑았다.
켈피, 일반적으로 말머리와 한 쌍의 앞다리를 가지고 있고, 허리부터는 물고기 형태를 한 정령 괴물이다.
특별히 무시무시한 생김새가 아님에도 사악한 정령으로 분류되어 토벌 대상에 오른 이유는.
“그 식인 정령이 여기에도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서 올라와 주면 좋겠군요.”
말의 모습으로 위장해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물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기 때문이다.
텐티아는 다시 투구를 쓰고 일부러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하필 자신이 딛고 있던 배가 뒤집힌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노려지고 있다면, 전하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그 마음을 알아차린 듯 난간 아래에서 물거품이 일었다.
최아아악!
말머리를 한 거대한 괴물이 긴 몸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 * *
만일 내가 노려지고 있다면, 전하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이 한 몸 희생하여,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빨리 죽여버리자.’
텐티아의 입가에 늑대 같은 미소가 깃들었다.
물보라와 함께 튀어 나온 켈피는 소문대로 거대한 말의 상반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말이 아니라, 반투명하고 단단한 질감의 검은 슬라임 같은 걸로 말 모양을 만들어 놓은 거 같았다.
갈기는 수초나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져 훨씬 음침한 분위기를 띠었다.
발굽 달린 다리도 두 쌍이 아니라 수십 쌍이어서, 꼭 문 사이로 튀어나온 손들이 아우성치는 거 같았다.
“히이이이이이이잉!”
켈피가 악몽에서나 나올 듯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가시 돋친 발굽들을 내리쳤다.
“하아아아아아!”
텐티아는 몸속 깊은 속에서부터 포효하며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오르는 검을 베어 올렸다.
다리, 허리, 어깨를 거쳐 올라온 검이 찬란하게 빛나고.
쾅!
텐티아의 검이 켈피의 다리 세 개를 자르고 네 번째 발굽을 절반 정도 잘라 내며 박혔다.
켈피가 다시 울부짖으며 거대한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서억!
“너같이 추악한 켈피는 처음 보는구나. 왜 지금껏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네가 북부에 있었다면 진작 죽였을 텐데.”
북부 대공 세베릭이 서리 두른 검을 내질러 아래턱을 관통하고 입천장까지 꿰뚫었다.
서리가 꽃처럼 번지며 켈피의 아가리를 서서히 얼렸다.
켈피가 거대한 발굽들을 마구 내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갑판이 마구 깨지고 갈라졌지만, 텐티아는 갑옷으로, 세베릭은 철벽같은 몸으로 버텨냈다.
세베릭이 켈피의 아래턱을 왼손으로 잡아당기며 외쳤다.
아무리 정령이라도 소드 마스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발렌 대공! 목을!”
발렌시아누스는 켈피의 목을 올려다보았다.
“세상!”
사람 몸통만큼 굵은 목이 뱀처럼 줄줄 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