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0화
(110)
켈피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뽑자면,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고른다.
아홉 아이가 숲속 연못으로 놀러 갔는데, 말 한 마리가 다가와 머리를 숙였고, 신이 난 아이들은 하나둘 말에 올라탔다.
마지막 아이인 아홉 번째 아이는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올라탈 때마다 등허리가 길어지는 걸 보고 기겁해서 도망쳤다.
‘그게 꼭 등허리가 아니라 저런 곳도 늘릴 수 있는 거였군.’
발렌시아누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20m 정도로 길어진 목을 바라보았다.
켈피가 텐티아와 세베릭을 여섯 개의 발굽과 아가리로 견제하며 뒤쪽으로 목을 줄줄 뽑아내고 있었다.
꼭 우스꽝스러운 기린을 보는 거 같았다.
쿵, 갑판이 크게 흔들리고, 조운선들 뒤로 따라붙던 대장선이 멈춰 섰다.
“등허리예요.”
루디가 겁먹은 눈을 하고 외쳤다.
켈피가 물고기 쪽 허리도 길게 뻗어 배 아래를 칭칭 감아버린 것이었다.
“텐티아 경. 조심하시오.”
세베릭이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서늘하게 말했다.
“내게 휘말릴 수도 있으니.”
푸른 보석 박힌 그의 검이 찬란하게 달아오르고, 태산도 가르는 오러가 차가운 불길처럼 타올랐다.
사악!
말을 닮은 거대한 아가리가 반으로 잘려 나가자 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베릭은 굽어진 채로 20m 하늘로 치솟은 머리가 발광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곧바로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고쳐 쥐고는, 갑판 위로 올라온 수십 개의 다리를 노렸다.
텐티아 역시 그의 뜻을 알아채고 발굽에서 검을 뽑아 다리 위쪽에 겨누었다.
그녀의 검이 붉게 빛나고, 켈피의 다리 중 세 개가 잘려 나갔다.
또 다시 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단면을 본 텐티아는 침음성을 터뜨렸다.
“전하! 이건 살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세베릭 역시 당황하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켈피의 몸은 마치 아주 크고 질긴 오렌지 알갱이가 여럿 뭉쳐서 이루어져 있는 거 같았다.
얇고 질긴 막을 베어 봐야 그 안에서 쏟아지는 건 호수물 뿐이었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거품 끓어오르는 소리가 나고, 막 잘려 나갔던 다리 여섯이 다시 자라났다.
알갱이 막 안에 호수물이 차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르세나가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섰고, 텐티아와 루디는 무의식적으로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저 몸뚱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하군. 적어도 베기로는 죽이지 못하겠어.”
그녀들의 대공은 잔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저 기이한 악의 정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이상하게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기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마경과 침식자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세베릭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북부의 온갖 괴이와 신비, 마수와 싸워 왔다.
회색 눈과 노란색 눈을 마주치자, 둘은 불꽃이 튀긴 듯 서로의 생각과 뜻을 이해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남도 알고 있다는 건 때로는 참 즐거운 일이었다.
“세베릭 대공. 내가 저 녀석의 몸뚱이 쪽을 불로 지지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령인 만큼 물질의 법칙이 안 통해도 이상하지 않군요. 용의 불길도 그렇게 막을 수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에는 말로, 칼에는 칼로, 신비에는 신비로.
“좋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럼 내가 저 녀석을 붙들어 놓겠습니다.”
켈피가 길어진 목을 뻗어 세베릭을 감으려 했다.
세베릭은 기다렸다는 듯 켈피의 속박에 몸을 맡겼다.
늘씬한 장신이, 겨울 산 같은 어깨가, 파도 같은 남색 머리카락이, 수려한 얼굴이, 켜켜이 조여드는 검은 켈피의 목 사이로 사라졌다.
우드드득!
메아리처럼 울린 끔찍한 소리에 르세나가 몸을 떨고 텐티아가 침음성을 흘렸다.
거대한 말머리 달린 20m 길이의 굵은 목에 제대로 휘감긴 사람이 살아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베릭은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인간보다는 신화 속 북부의 거인과 괴물들에 더 가까웠고, 지고의 육체를 가진 소드 마스터였다.
우드드드득!
갑판에 올라온 수십 개의 말발굽이 길게 끌리는 소리였다.
켈피가 북부 대공을 물속으로 잡아 당기는 게 아니라, 북부 대공이 켈피를 되려 물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텐티아와 르세나와 루디는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인간의 몸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생명체를 잡아끄는 모습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르세나 경!”
“알겠소!”
“저도-!”
루디가 방아쇠를 당기고, 텐티아와 르세나가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텐티아의 마나 블레이드는 불같이 타올랐고, 르세나의 마나 블레이드는 심야의 고요한 설원처럼 빛났다.
마탄에 맞은 다리가 터져 나가고, 검에 베인 다리가 잘려 나갔다.
드드드드득!
결국 켈피가 세베릭에게 질질 끌려 나왔다.
“전하! 놈이 몸만 늘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르세나가 재빠르게 외치자, 세베릭이 회색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쩌저저저저저저적!
주변 온도가 내려가더니, 켈피의 몸뚱이 안 물이 빙수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히이이잉?!”
처음으로 사악한 정령의 울음소리에 당황이 섞였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켈피를 조소하며 갑판 위를 달렸다.
그의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세로로 갈라지고, 그의 장검에 탐욕스러운 불길이 타올랐다.
‘이게 뭔 X같이 웃긴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섞인’ 놈들은 대부분 그 경계가 약점이었어.’
일단 말 흉내라도 내는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 경계선이 갑판 난간 아래쪽에 걸쳐 있었다.
푸욱!
발렌시아누스는 용언의 불길 두른 검을 켈피의 몸 안에 찔러 넣고 그대로 달렸다.
달빛 아래 백금발이 반짝반짝 빛나고, 위험한 눈동자가 위엄 있게 이글거렸으며, 탐욕스러운 불길은 불씨 하나 튀기지 않고 정령의 몸뚱이를 먹어 치웠다.
“발렌 님! 위험해요!”
루디는 그가 갑판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자 다급하게 외쳤다.
말과 물고기의 경계를 노리려면 사실상 배에서 뛰어 내리며 베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말리는 게 맞을지 수건과 화로를 준비하는 게 맞을지 고민했다.
발렌시아누스가 하얀 제복 차림으로 몸을 날렸다.
츠카아아아악!
불꽃 두른 검이 그 주인처럼 사납게 휘둘러졌다.
그는 달리던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고, 말의 몸뚱이와 물고기의 몸뚱이에 동시에 용언의 불길을 심어 주었고, 그 대가로 발 디딜 곳을 잃어버렸다.
발렌시아누스는 2월 호숫물이 가까워지는 걸 보며 외쳤다.
“아니마!”
두 백작의 선물, 바람을 품은 신발 아니마 라멘툼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사아아아!
호수 표면에 파문이 일어날 정도로 거센 바람이 신발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고, 수면 아래 심연을 향해 추락하던 발렌시아누스는 다시 달빛 찬란한 하늘로 솟구쳐 올렸다.
어느새 오른손의 검은 역수로 고쳐 쥐었고, 왼손은 오른손 손목을 단단히 쥐며 손목이 꺾이지 않게 보조하고 있었다.
제국 검술 3단계, 자리이타.
그의 검이 정확하게 두 생물의 경계선을 노렸다.
세로로 갈라진 노란 눈을 가학적으로 번뜩이는 백발의 대공을 보며, 세베릭은 웃었고 르세나는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서걱!
깔끔한 소리가 울리고 말의 몸뚱이와 물고기의 몸뚱이가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용언의 불길이 양쪽 안쪽으로 파고들며 천천히 그 몸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다시 갑판 위로 올라섰다.
세베릭은 갑판 위로 몸을 걸치고 있던 켈피의 몸이 축 늘어지는 걸 느꼈다.
“물속에서도 불타는군요.”
텐티아는 배 아래를 확인하며 말했다.
배를 칭칭 감고 있던 물고기 쪽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발렌시아누스의 검에서 옮겨붙은 불이 오렌지 알갱이 같은 그 얇은 막을 죄다 태우고 있었다.
물속에서 붉은빛이 비치는 게 신비로우면서도 어색했다.
“정령이니까. 영혼이 불타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네.”
발렌시아누스가 답했다.
“그럼 저놈은 지옥에 떨어진 거군요.”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사악한 정령은 지옥에 떨어져 마땅하지.”
세베릭이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을 받았다.
낮고 호쾌한 목소리에 꾸며내지 않은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실로 합당한 말씀입니다.”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베릭을 따라 검을 검집에 넣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불꽃 마법사인 줄로만 알았지, 검 실력이 그렇게 고강한 줄은 몰랐군. 괜찮다면 앞쪽 갑판에서 다시 보여줄 수 있겠나?”
세베릭이 호기심 넘치는 눈을 하고 말했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건, 관점에 따라 제국 검술의 유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냉기 능력도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두 사내는 회색 눈과 금색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잃을 거 많고 짊어진 게 많기에 조심스러워야 했지만, 서로에게 얻어내야 할 게 많다는 핑계가 있었다.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었지만, 그래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 * *
북부 대공과 망나니 대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쪽 갑판으로 걸어갔다.
텐티아는 투구를 벗고 짓눌린 붉은 머리카락을 약간 흐트러트렸다.
그녀는 모피 두른 코트와 붉은 띠 찬 하얀 제복의 등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황족의 우정이라. 지켜져도 깨져도 낭만입니다.’
그러나 르세나는 외눈 안경 너머 검은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세베릭 전하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본인과 다른 사람으로, 욕망 어린 인간으로 보신 모양입니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본 발렌시아누스의 동기는 욕망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너무나 강한 신념인 탓에 주변에서 보기에는 욕망으로 보일 뿐.
그녀 또한 세베릭과는 다른 의미로 발렌시아누스와 비슷한 인간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신념은 우연히도 그의 이익과 아주아주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신념대로 살면 이익을 보고, 그래서 얼핏 욕망으로 보인다.
‘제이릴리스.’
2년 전 16살의 나이로 즉위한 어린 황제.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
수백의 형제자매를 죽인 친족살해자.
피로 물든 제관을 스스로 쓴 반역 황제.
수도에서 이름을 떨치는 망나니 황형의 신념은 분명 그녀에게 있었다.
결국 황제가 북부를 대하는 태도가, 그가 북부를 대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럼 과연, 황제 제이릴리스는 북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은 북부가 마수와 이물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니 중앙이 손해를 보더라도 북부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르세나는 앞 갑판에서 들려오는 두 대공의 기합 소리를 들었다.
세베릭은 역대 북부 대공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며, 지금 북부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매우 뛰어났다.
앞으로 10년, 아니 5년이면 모든 마경과 이물 군락, 마수 군락을 다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 제이릴리스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북부를 어떻게 대할까?
‘그래. 모두 다 내가 지시한 일이네.’
‘정확히 짚었네. 내가 북부를 경제적으로 영원히 황실에 종속시키려 했어.’
‘그건 세베릭 대공의 길이지,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길이 아니네.’
그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판단력과 신념이 있는 사람이, 대공의 작위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제이릴리스의 곁에 있다면…….
르세나는 흐뭇하게 웃는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텐티아가 시선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리 죽상이십니까? 승리를 즐기십시오. 달이 참 밝지 않습니까?”
늠름한 얼굴에 붉은 입술과 붉은 눈.
백금색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전도유망한 기사.
르세나는 반쯤 반사적으로 입이 열리는 걸 느꼈다.
“경이 부럽네요. 머리 잘 돌아가는 주군을 섬겨서.”
약간의 한숨과 회한이 섞인 목소리가 입김과 함께 흘러나왔다.
의외라는 듯 텐티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답했다.
“제가 부럽다니요? 저는 경이 부럽습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가 세베릭 전하의 절반의 절반만큼만 고결해도 훨씬 마음이 편할 겁니다.”
르세나가 외안 안경을 빛나며 고개를 저었다.
“텐티아 경. 그래도 주군이 조금 약삭빠르게 이득을 취해야 기사도 편한 법이에요.”
텐티아는 입술을 지긋하게 깨물다 말했다.
“제 얼굴에 침 뱉는 소리 같아 말하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경의 주군이 이득을 위해 성자를 납치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진짜 답답한 걸 모르시네요. 전리품을 분배할 때…….”
너무나 다른 두 대공을 섬기는, 너무나 다른 두 기사의 밤도 함께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