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1화
(111)
조운선 한 척에 실린 곡물은 50톤에 달했고, 그건 보릿고개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이 시기에 곡괭이 필요 없는 금광과 같았다.
수적들은 지독하게 달려들었으나, 세베릭은 더더욱 지독하게 막아냈다.
그는 배 한 척에 실린 50톤의 곡물이면 북부 사람들을 몇 명이 살릴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있고, 계산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전하. 계산 나왔습니다.”
르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노트를 펼쳤다.
배 한 척을 빼앗길 때마다 북부의 어린아이 몇 명과 병사 몇 명이 굶게 되는지가 명확한 숫자로 그의 앞에 들이 밀어졌다.
세베릭은 한겨울 그 자체인 조각 같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절박한 강자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추악한 거머리 같은 것들아!”
‘내 피는 내어 줄 수 있지만, 내 사람들의 피는 내어 줄 수 없다.’
그는 텐티아와 함께 물 위를 날 듯 달리며 수적들의 크고 작은 배를 베어냈다.
발렌시아누스가 경탄하다 못해 두려움으을 느낄 정도의 무용이었다.
“돌격해라! 수백 척 중에 한 척만 얻어도 곡식이 50t이다!”
그러나 세베릭은 다음날 두 배로 늘어난 수적들을 보며 침음성만 흘렸다.
탐욕은 언제나 두려움을 이겼다.
자기들도 수백 척이고, 조운선단도 수백 척이니, 한 척은 훔쳐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밤을 꼬박 새워 가며 간신히 물리쳤다.
새벽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여 오는 끔찍한 아침이었다.
그때 발렌시아누스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대로라면 끝없는 소모전을 겪을 게 뻔했다.
극단적인 적들을 상대할 때는 극단적인 해결책이 필요했고, 그는 창대를 매고 악역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대공이 벤 수적들을 돛대에 거는 겁니다. 멀리서부터 본보기를 보이는 거죠.”
“저희가 탄 대장선 한 척에 걸어 봐야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누가 저희 배에만 걸자고 했습니까?”
“예?”
발렌시아누스가 황금빛 눈동자를 잔혹하게 번뜩이며 말했다.
“수백 척 조운선의 모든 돛대에 수적들의 목을 거는 겁니다.”
르세나는 입을 쩍 벌리며 기겁했고, 어지간히 피를 보아 온 세베릭 역시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그에게 죽음은 흔했지만 고결했고, 아무리 상대가 수적이라고 해도, 시신만은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면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일단 명목상 이 선단의 호위 총책임자는 저입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회귀 전 40년간 역사에 기록되어서는 안 될 수많은 끔찍한 전쟁을 보았고, 그 전쟁을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게 하는 옛것들도 보았다.
효수 정도는 자비롭다 못해 유약한 선택지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대에 대한 소문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
“틀린 건 저였나 봅니다.”
세베릭은 눈앞의 소년 대공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걸 후회했다.
저 비인간적인 분위기의 사내는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로 상식을 벗어난 계획을 내놓았다.
마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아니요. 이 세상에 옳고 틀린 건 없습니다.”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오류만이 있을 뿐이지요.”
우정은 권력과 같아 쌓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었다.
하룻밤의 이해는 눈처럼 녹아내리고,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낮 동안 작은 배를 저어 선단 전체를 돌아다니며 시체나 목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나누어 주었다.
수백 척의 조운선 돛대에 시체 수백 구가 매달려 흔들렸다.
물안개 낀 새벽에 시체를 앞세워 고요한 호수 수면을 가르는 선단.
그 풍경은 조운선에 소속된 선원들조차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미친 새끼.”
“말이 안 나온다. 말이.”
“저게 사람이 할 짓이냐?”
“정말 그 동생에 그 오빠다.”
선장들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동행한 하급 귀족 출신의 선주는 아예 배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발렌시아누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이건 아닙니다. 저는 제 배에 망자를 모욕하는 표식을 걸 생각이 없습니다.”
“내게 ‘아니’라고 말하려면, 둘 중에 하나는 가져오도록 해라. 내 것보다 좋은 대책이나 내 입을 다물게 할 힘.”
발렌시아누스는 선주의 얼굴을 고기 다지는 망치로 내리친 듯 두들기고, 대장선 돛대에 거꾸로 메달아 놓았다.
배에서 선장이 왕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면, 선주는 교황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
그런 선주가 돛대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모습은 모든 선장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고생했네.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하. 황실과 북부에 봉사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가 그날 밤 선주의 얼굴을 혈마법으로 깔끔하게 고쳐 주었으며, 황제와 대공 간 공식 교역에 한정된 독점 교역권을 10년간 보장해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넷뿐이었다.
세베릭, 르세나, 텐티아, 루디.
마침내 선단이 호수 반대편에 다다르고,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한 강에 진입했다.
그때까지 수적들의 추가적인 습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베릭은 드물게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 잔혹한 짓에 대한 혐오감도, 그 짓을 기꺼이 저지른 발렌시아누스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의문이 더욱 컸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왜 이렇게까지 한 겁니까? 아니. 이렇게 하면 될 거라고 어떻게 알았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세베릭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는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발표하듯 말했다.
세베릭이 보기에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비효율성과 비합리성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천 마리 종이학에 감동하고, 못이 촘촘하게 박힌 인형을 보고 소름을 느낍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감동이든, 감사든, 사과든, 공포든, 이렇게까지? 라고 상대가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그가 노란 눈을 비인간적으로 빛내며 답했다.
그는 세베릭에게 그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려 했고, 그건 확실히 성공했다.
세베릭은 하루 동안 발렌시아누스와 마주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 그를 만나려 선실로 찾아갔다.
* * *
선실은 아주 좁지는 않았지만, 몇 걸음 이상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지도 않았다.
장신의 세베릭이 들어오자 선실이 꽉 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심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세베릭을 마주했다.
그는 제이릴리스와 정면에서 맞붙고도 세 번이나 살아남고 때로는 압도한 검객이었다.
폭풍 치는 바다처럼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과 눈 내린 벌판처럼 고요한 회색 눈동자, 눈이 짓눌려 만들어진 얼음 같은 뺨과 유일하게 핏기가 도는 입술.
피폐한 눈매와 핼쑥한 뺨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영광, 믿음직한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품격과 권위.
마치 북부 그 자체가 사람이 되어 찾아온 듯한 사내.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최악의 귀족이기도 했다.
그는 제이릴리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결국 패배했으며, 평생 지켜 온 북부를 남쪽에서부터 망가트렸다.
그는 북부인들을 위해 반기를 든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이었기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그 신념으로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을 황제와 적대하도록 했다.
좋은 귀족은 설령 상대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는 한이 있더라도 영지와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귀족이면 좋겠다.
만약 어딘가 잘못되어 다시 제국이 내전과 전쟁에 휘말린다면, 제이릴리스가 군대를 휘몰아 사방을 쏘다니며 시산혈해를 만들어 나간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막았는데도 침식자들이나 다른 요소로 인해 실패한다면.
그때 그는 좋은 귀족으로서,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북부‘만’을 지켜주면 좋겠다.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셉텐트리오스의 성을 들은 내내 고민했다.
첫 만남부터 폭발을 일으키고, 어색한 사이를 보내다 하룻밤 동안 검과 우정을 나눴지만, 수적들 앞에서 그 짧은 우정은 잠시 갈라졌고, 그는 다시 내 앞에 섰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 좋았지만, 모순적으로 나는 그가 좋은 귀족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이내 세베릭이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사과와 감사부터 전하겠습니다. 대책 없이 불만만을 표해 미안하고, 수적들에게서 조운선들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안도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세베릭 대공. 저 역시 더 온화한 해법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방금까지도 했습니다.”
세베릭이 회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피폐한 눈꺼풀과 서늘한 눈매에 감춰진 그 고요함을 보고 있자면, 나는 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듯 부끄러웠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다시 묻겠습니다. 이곳은 정말 저희 둘뿐입니다.”
그는 거짓말하는 법을 몰랐다.
“황실은 북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하고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역시 제국의 귀족입니다. 북부가 마수와 이물들을 막아내려면 황제 폐하의 지원이 필요하지요.”
그는 그 뒤쪽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이해했다.
황실과 북부가 서로를 경계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 * *
수도에는 북부 대공이 일부러 마수를 다 죽이지 않는다는 괴담이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북부 대공은 모든 마수가 죽으면 그때는 황실이 북부를 버리리라 의심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들의 필요를 남겨두기 위해 마수를 뿌리 뽑지 않는다는 괴담이었다.
북부에는 황실이 일부러 지원하는 곡식과 무기의 양을 줄이고 있다는 괴담이 나돌았다.
북부가 마수를 다 죽이면 그 칼끝을 남쪽으로 돌릴까 두려워한다는 괴담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점점 큰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게 싫었고, 그러다 목이 달아난 사람을 한둘 본 게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의 해법은 어쩌면 담백한 진실이리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예. 황실은 마수와 이물을 막기 위해 북부를 지원할 것입니다. 설령 그 탓에 중부와 남부에 기근이 든다 해도 그리할 것입니다.”
“그럼…….”
“그러니.”
나는 단호히 말을 이었다.
“북부는 무슨 일이 터져도 아래로 눈을 돌리지 말고, 황제 폐하의 은혜를 만끽하며, 마수와 이물의 토벌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세베릭이 감격과 한탄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아주 오랫동안 북부와 황실 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북부가 마수와 이물들을 상대로 승리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말을 세심히 골랐다.
회귀 전의 악전고투를 되풀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든 건 폐하의 뜻에 달렸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폐하는 제게 북부를 지원할 계획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폐하께 북부의 승리를 말씀드리게 된다면, 그 후 북부와 황실의 관계를 정할 때 제 목소리가 끼게 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세베릭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애써 담담히 말했다.
“친구로 대하면 친구고, 적으로 대하면 적입니다.”
“!”
아무리 북부가 독립성이 강하다고 해도 엄연한 봉신 관계다.
‘친구’와 ‘적’이라는 단어에는 양쪽 모두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고요한 회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다만 결코 황실이 북부를 손에 넣고 흔들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실은 각지 대영주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며, 이는 황실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감시하고 간섭하기에 제국은 너무 넓었고, 인구도 많았다.
와이번으로도 수십 일이 걸리는 곳까지 행정력을 뻗을 수는 없었다.
“북부는 앞으로도 셉텐트리오스 가문의 뜻에 따라 통치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니?”
“이 자리에서 세베릭 대공도 약속해주십시오.”
세베릭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 그윽한 눈썹을 움찔거렸다.
나는 회귀 전 삶에서 받고 싶던 모든 약속을 꺼냈다.
“제국 내전이 일어나도 안정을 돕겠다며 남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이 약속에는 어떠한 구속력도 없었다.
애초에 대공쯤 되면 어떤 약속이나 동맹도 영지와 신민들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뒤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건 이 좁은 선실 안에서 울리는 메아리와도 같았다.
내가 한 말도 그랬고, 그가 한 말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고 존중했으며, 그렇기에 그 메아리에 의미를 부여했다.
“예. 약속합니다.”
“타국과 전쟁이 일어나도 소환령이 먼저 내려오지 않는 한 남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 약속합니다.”
마지막이었다.
“그런 일들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아도 황제 폐하의 인가 없이는 남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베릭이 침묵했다.
눈 내리는 밤 같은 고요한 침묵이었다.
“미안합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건 약속할 수 없겠습니다.”
이내 그는 스스로 침묵을 깼다.
단아하고도 잔혹한 진심이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과 내 예상이 맞았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사내인 줄 알았다.
“역시…… 고결하십니다.”
회귀 전에도 그랬다.
제이릴리스와의 전쟁이 필패임을 알면서도, 한때 마수로부터 지켜냈던 사람들을 위해 또다시 검을 들었다.
나는 한 사람을 위해 싸우고, 그는 모두를 위해 싸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원망할지언정 미워하지 못하고, 다시금 그를 도와주고만 싶은 기분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 * *
“세베릭 대공 전하!”
선실 밖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나가지요. 발렌시아누스 대공.”
“좋습니다.”
우리는 한결 가벼운 얼굴을 하고 선실 문을 열었다.
결국 평행선이었다.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마주 보았으나, 같은 곳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는 있었다.
우당탕!
“텐티아 경! 루디? 르세나 경!”
쇼트커트 붉은 머리와 시녀복 자락, 단정한 검은 머리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다 들렸나 봅니다.”
“흐흐흐흐.”
우리는 쓰게 웃으며 선원에게 향했다.
“무슨 일로 불렀나?”
“저들이 엄청난 통행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