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2화
(112)
수백 척의 조운선이 강변 선착장에 입항했다.
선착장 너머에는 커다란 돌들을 쌓아 만든 관문이 있었고, 그곳에서 병사들과 행정관들이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세베릭 대공.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대의 영토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더 북상해야 하지 않습니까?”
대답은 세베릭이 아니라 르세나 경에게 돌아왔다.
본래 네게 물은 게 아니다, 하고 쏘아붙여도 할 말 없는 무례한 행동이나, 그럴 수 없었다.
“이 위로 더 북상하면 넓은 늪지대를 통과하고 다시 강줄기가 이어집니다.”
“올 때 통과한 그 호수와 비슷한 경우로군.”
통행료 이야기를 들은 세베릭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맞습니다. 문제는 그 늪은 수심이 얕아서 조운선이 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북부에서부터 같이 내려왔던 조운선들도 있을 거 아닌가? 올 때는 어떻게 왔지?”
르세나가 세베릭 곁에 붙으며 말했다.
“빈 배는 가벼워서 늪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 육로로 곡식을 옮긴 뒤, 빙 돌아서 늪지대를 통과하고 온 배에 다시 실어야 합니다.”
……제이릴리스가 괜히 운하를 파겠다고 한 게 아닌 모양이다.
아직까지 어떤 제국 황제도 운하를 안 판 게 더 신기했다.
“그리고 지금 저 영주 새끼는 통행료를 요구하고 있고?”
“그런 거 같습니다.”
나는 작은 배를 내리고 텐티아와 루디를 불렀다.
얼마인지 들어는 봐야겠지.
자기 땅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는 건 영주의 정당한 권리다.
나와 세베릭이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아니. 대공이었기에 그걸 더욱 존중해 줘야 했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다 베어 죽이겠다!”
우리는 선착장으로 몰려온 징세관들을 해치고 관문 앞까지 나아갔다.
중간에 한 징세관이 루디에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다가 손목이 돌아간 걸 빼면 아무 일도 없었다.
대공이 둘이나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관문의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자비로우신 델루시아토 백작님께서는 통행료로 화물의 10%를 요구하셨습니다.”
“…….”
이게 영주냐 도적 두목이냐?
도적 두목도 이렇게는 안 해쳐 먹었다.
올 때 한 척 안 빼앗기겠다고 사람을 돛에 매달고 그 난리를 떨었는데, 수십 척 물량을 상납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고, 세베릭은 얼굴을 굳혔다.
기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이곳과 영지 반대편의 선착장 이용료와 짐마차 이용료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곡식을 옮기려면 짐마차를 수배하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시간을 덜어주신 셈이니 결코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 겁니다.”
나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라고? 네놈은 숫자를 대체 어떻게 세는 것이냐? 요즘 곡식 가격이 얼마인지는 아느냐?”
기사 본인도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세베릭 앞에서 어지간한 사람이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주에게 반드시 곡식을 털어 오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듯 이를 악물며 우리 앞을 막아섰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나는 텐티아 경에게 눈짓했다.
“경. 이 도적 소굴 같은 관문을 평지로 만들어버리시오.”
“!”
황제를 섬기는 백금 기사의 출현에, 주술 회로 새긴 갑옷은 고사하고 전신 판금 갑옷도 없는 시골 기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세베릭이 무심하게 한 손을 들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괜찮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도 안 괜찮습니다!”
“황실이 운하를 만든다면 결국 이곳에 만들 겁니다. 아니, 틀림없이 이곳에 만들 겁니다.”
“!”
“황실이 자금을 어느 정도 지원해준다 해도, 이런 변방의 백작이 그런 대공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희 북부로 갈 운하를 파는 데에 들어갈 곡식입니다.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가 관문 바깥쪽에 진을 치고 있는 빈민들을 바라본 거 같았다.
르세나가 목덜미를 잡고, 텐티아가 그녀를 부축했다.
외안 안경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은 거 같았다.
나는 단호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모두 델루시아토 백작의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운하 공사는 봄에는 파종한다고 안 하고, 여름에는 농사짓는다고 안 하고, 가을에는 추수한다고 안 하고, 겨울에는 땅이 얼어서 못 한다고 하겠지요.”
회귀 전에 그따위로 나오던 영주들을 참수하는 게 내 일 중 하나였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그래도 북방 아닙니까? 마수와 이물로부터 지켜주는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등골을 빼 먹으려고 하니 건방지기 그지없습니다.”
기사가 졸도할 거 같은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경! 나를 그대의 영주에게 안내하게! 세베릭 대공.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주십시오. 반드시 협상을 마치고 오겠습니다.”
르세나가 나를 보며 통쾌함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세베릭 대공이 내게 물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상인처럼 흥정을 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세베릭 대공. 기사처럼 협상을 하겠다는 겁니다.”
“기사처럼 협상을 하겠다니요?”
“협상해 달라고 빌 때까지 흠씬 두들겨야지요. 제가 상아탑 원로의 사악한 계획도 그렇게 막았으니, 이번에도 통할 겁니다.”
“예?!”
세베릭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 * *
델루시아토 백작의 도시 델루시온은 인구가 8만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솔레타라온의 화려함이나 프로이하이트의 웅장함에는 비할 수 없었지만, 거친 석재로 지은 건물들에는 특유의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세베릭이 있는 북부와 가깝기에 대규모 마수 무리와 전쟁을 벌일 일이 없었다.
강을 끼고 있고, 안전도 보장받았기에 여러 상단이 모여들었다.
영주는 세금만 잘 내면 상인들에게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영지의 무력은 소수 정예의 기사들에게 의존했다.
‘기사를 많이도 데리고 있군. 영지 수입의 대부분을 거기에 쓰겠어. 무를 경시하지는 않는 건가?’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도시에 들어서서 영주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파악했다.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토가 델루시아토 백작을 만나기 원한다.”
“하, 지금 감히 황족을 참칭…… 백금 기사?”
뇌물 바치러 온 상인들이나 상대하던 저택의 집사는 전신 판금 갑옷 입은 텐티아를 보고 넋이 나가버렸다.
집사는 줄 서서 기다리던 상인들을 내쫓고 셋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응접실 풍경을 보자마자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눈치 한번 빠른 놈이네.’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입고 검과 철퇴로 무장한 기사가 넷, 영주 역시 치렁치렁한 비단옷 아래 흉갑을 입고 있었다.
살이 쪘지만,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두 눈에는 상인들을 상대하며 익힌 총기가 감돌았다.
대공을 만나는데 무장한 기사를 넷이나 데려온다는 거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긴 다리를 꼬고 앉으며 생각했다.
‘말이 잘 통하겠어.’
“발렌시아누스다.”
“이르고르 델루시온 델루시아토입니다. 대공 전하.”
“서로 알 건 다 아는 듯하니. 말이 빨라지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명예롭고 품위 넘치시는 두 대공 전하께서는 제 도시에 들어오실 때 제 명예를 지켜주시겠지요.”
“그래. 안심하게. 우리 둘 중 누구의 명예도 상하지 않을 방안을 가져왔으니까.”
그가 곰 같은 눈에 흥미의 빛을 띠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가 영주의 호쾌한 자비를 보이는 것이지. 제국과 그대의 영지를 지켜주기 위해 싸우는 북부 대공에게 통행료를 감면해주거나 면제해 줌으로써 말이야. ……소문은 그렇게 날 걸세.”
“예?”
“물론 진상은 사뭇 다르지.”
“그 진상대로라면 전하의 명예는 충분히 상할 거 같습니다만?”
말솜씨가 제법인 사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쾌하게 답했다.
“이미 너무 많이 상해서 더 상할 것도 없네.”
“시골 백작을 협박하려다 역으로 붙잡혀 조리돌림을 당하셨다면 충분히 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광대가 높게 솟아 꼭 분노에 찬 본심이 새어 나오는 거 같기도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읊조렸다.
“확인해 볼까?”
다음 순간 루디가 허리춤에서 두 자루 마총을 뽑아 들었다.
사점 안경 너머 녹색 눈이 아찔하게 빛났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손목 하나 흔들리지 않는 깔끔한 속사였다.
이곳 기사들도 흉갑에 강화나 경량화 같은 마법진을 새겼지만, 시그마인 후작의 갑옷처럼 마탄을 튕겨낼 만큼 고급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마법이냐!”
“크윽!”
그들은 명치를 주먹으로 힘껏 맞은 듯한 고통에 비틀거렸다.
그때 텐티아가 몸을 날렸다.
퍼억!
강철 군화가 투구도 쓰지 않은 머리를 걷어차는 소리였다.
“경들은 네 명이니, 너무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기사 하나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발렌시아누스는 대리석 테이블을 이르고르에게 엎고, 그 위로 뛰어올랐다.
“미친!”
이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그는 유쾌하게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흐읍!”
이르고르가 테이블 아래를 붙들고 서서 발렌시아누스의 도약까지 받아낸 것이다.
그 역시 거인의 후예로서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벼우십니다?”
그가 수백kg짜리 테이블을 허공으로 집어 던지며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재빨리 구르며 천장과 테이블 사이에 끼어서 짓뭉개질 위기에서 벗어났다.
떨어지는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이르고르가 두 손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타격과 유술을 겸비한 북부의 무술이었다.
한 번 잡히면 상대가 누구라도 허리를 분질러 버릴 수 있었다.
쿵! 쿵! 쿵!
큰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천장을 친 테이블이 떨어져 바닥을 부수고, 이르고르가 발렌시아누스에게 태클을 걸었다.
콰드드드드득!
발렌시아누스가 벽까지 떠밀려 등을 거세게 부딪치고 신음성을 흘렸다.
“크윽!”
이르고르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을 붙들고 기술을 걸려던 순간, 그는 두 손이 지글지글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화로처럼 달구는 불꽃.”
주문을 외운 발렌시아누스의 옷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본래 북부인들이 얼음 골렘을 잡을 때나 검이나 작살창에 제한적으로 쓰는 마법이었다.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걸 옷에다 쓸 수 있다는 건 더욱 놀라웠다.
양산을 준비하는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를 받아서 제복에 먹여 두었기 때문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이르고르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를 향해 가학적으로 웃어 보였다.
“진득하게 감싸 안는 불꽃.”
불꽃 한 조각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이르고르의 얼굴을 덮었다.
온도를 조절했기에 거인의 피부를 태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숨을 막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르고르가 당황하며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지만, 불꽃은 꺼지다가도 다시 타올랐다.
황족의 마법은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텐티아 경은 숨을 30분도 참을 수 있다는데, 그대는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온도를 조절해도 불은 불이었다.
고요한 물속에서 숨을 참는 건 얼굴이 불타고 있는데 숨을 참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르고르는 그게 말이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혹시 입을 열면 입에도 불이 번질까 두려워 한마디도 못했다.
발렌시아누스는 하얀 제복을 더더욱 달구며 멋들어지게 웃었다.
“계속 어울려 주도록 하지.”
숨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백작을 향해 불타는 옷을 두른 발렌시아누스가 관절기를 걸었다
* * *
“1년 365일 내내 이물과 마수들로부터 북방을 수호하는 셉텐트리오스 가문에 대한 존중과 경애의 표시로, 짐마차 대여 비용을 제외한 모든 통행료를 면제하겠소. 향후 운하가 건설될 경우, 북부 대공의 선단은 운하 통행료도 반값만 받겠소.”
델루시아토가 세베릭 앞에서 선언했다.
어쩐지 불에 그을린 듯 탄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원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곡식 자루와 상자를 짐마차에 실기 시작했다.
이르고르가 도망치듯 돌아가고, 세베릭은 발렌시아누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저 꼴이 되었는데도 웃는 겁니까?”
“황실에서 운하 건설비용의 70%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본래 50대 50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더군요. 남은 예산의 절반인 10%는 유랑민 구호에 쓰겠다는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대공은……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세베릭은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보며 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실실 웃으며 답했다.
“원래 75%를 부담할 예정으로 예산을 짜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