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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13화 (15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3화

(113)

백작령의 도로는 빈말로라도 잘 정비되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짐마차들은 끝도 없는 덜컹거리고 또 덜컹거리며 봄에도 겨울 같은 광야를 나아갔다.

“수레를 내놓아라!”

“곡식을 바치며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사방에서 도적 떼가 덮쳐 왔고.

“저 한 알 한 알이 북부 백성들의 피와 살이 될 것이다!”

북부 대공 세베릭은 그가 왜 소드 마스터인지 알려주었다.

텐티아가 한참 싸우다가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바라볼 정도였다.

‘역시 우리 대공 전하가 훨씬 대단하시지.’

르세나는 그걸 보며 내심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끼다가도, 다른 형태의 도적을 만나면 곧바로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리. 처자식이 사흘째 굶고 있습니다.”

“나리, 제발.”

“나리. 부탁드립니다. 한 줌이라도 내어 주십시오.”

그들에게 나누어 준 만큼 북부 사람들에게 갈 몫이 줄어든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악을 낳는다.

그런데 대체 왜 자비가 악을 낳는다는 말인가?

말장난 같지만, 교리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성자 마테오스조차도 고뇌했던 문제다.

세베릭 역시 선의와 선의가 만나 나쁜 결과를 내놓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가 그의 기사들만을 여럿 보냈다면, 그들은 유랑민들을 쫓아내고 강행군했을 거다.

그가 그의 행정관들을 더 데려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계산을 마치고 곡식 한 자루 정도를 내어 주었을 것이다.

오늘 북부 대공 세베릭의 곁에는 그의 기사나 행정관들이 아니라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가 있었다.

“채찍질을 당하기 싫으면 썩 물러서거라!”

그는 자비가 악을 낳는 그 가혹한 상황에서,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잃으킨 성자 마테오스와 다르다는 걸 알았고, 고뇌하는 자 세베릭과도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지르다가도,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그 모습은, 그 역시 지독한 고뇌에 빠져 있다는 걸 알려주었지만.

그는 어쨌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능력 있기에 더더욱 위험한 자입니다.’

르세나는 마침내 발렌시아누스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했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론지었다.

울면서 하든 웃으면서 하든 결국은 하는 사내였다.

그 비정하고도 강력한 행동력을 북부를 위해 쓰게 해 친구로 두거나, 아니면 죽여야 했다.

적으로 두어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녀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짐마차 짐칸에서 밀가루 담긴 큰 통에 앉아 웃으며 작은 잔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 진흙탕을 굴렀던 세베릭이 자리를 가리지 않는 건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피나 융단이 깔려 있지 않으면 엉덩이를 대지 않는다는 발렌시아누스가 저렇게 소탈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는 찬란한 샹들리에 여럿 걸린 무도회장에서 잘 차려입은 아가씨와 춤을 춰야만 할 하얀 제복 차림으로, 거친 나무통 위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웃고 있었다.

“북부의 광산중에는 과거 드워프들이 개발했다는 곳도 많습니다. 깊고 채광량도 많아 여러모로 유용하지만, 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고 있지요.”

“황제 폐하께 보고해서 중, 남부의 유랑민들을 모두 북부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자금이 투입되고 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북부의 유랑민들도 모두 일자리를 얻을 겁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신 중부와 북부 사이에 걸친 다른 영주들에게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해 주십시오. 대공께서 부른 사람들이라는 걸 확실히 하지 않으면 놈들이 죄다 자기 영지에 억류시켜 놓거나 쫓아낼 겁니다.”

그건 세베릭의 무른 태도를 나무라는 듯한 말이었다.

세베릭이 그 저의를 알아차린 듯 쓰게 웃었다.

“북부 대공치고는 무른 모습을 보였지요. 저도 해야 한다면 합니다. 하지만 전장을 떠나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너무 많더군요.”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르세나가 보기에, 그는 마치 세베릭이 손해를 보지 않기를 바라는 거 같았다.

“다른 귀족과의 만남은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가는 놈들입니다.”

“저는 그들 역시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도 믿고 있습니다.”

“자주 봐야 할 사람끼리는 예의를 지키고 의리를 지킵니다. 하지만 중부와 북부 사이에 걸친 다른 영주들은 다릅니다. 다시 볼 일이 거의 없잖습니까? 그러니 10%를 통행료로 내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겁니다.”

“하하하.”

발렌시아누스가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대공께서는…… 너무 강하십니다.”

“예?”

“너무 강해서, 가진 게 많아서, 목표가 코앞이라서……. 여유가 생겼고, 숨을 돌리려 하고 있으십니다. 그때가 제일 위험합니다.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없기에, 자신이 얼마나 여유를 낼 수 있는지 모르고 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묘하게 경험담 같은 말이었다.

르세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하던 생각과 완전히 같았다.

세베릭이 회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조언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대공.”

르세나는 둘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고민했다.

언젠가 마주칠 걸 알면서 서로를 향해 웃는 모습이, 고결해 보였다.

* * *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나는 모닥불가에 앉아 텐티아 경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텐티아 경. 힘든 건 없나?”

그녀는 그 늠름한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온종일 앉아만 있어서 좀이 쑤시는 게 힘듭니다.”

“사실상 경과 기사 몇몇이 이 거대한 행렬의 호위를 도맡고 있잖나?”

“전하가 아무 말이나 내뱉지 못하도록 감시하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경이 보기에 세베릭 대공의 검술은 어떤가?”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빛냈다.

세레라지에에게 마법을 물어본 거 같았다.

“완벽하십니다.”

“제이릴리스 폐하와 비교하자면?”

“제이릴리스 폐하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한 천재라면, 세베릭 전하는 정석적이고 알고도 못 막는 천재입니다. 배울 점은 세베릭 전하에게 훨씬 많은 거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제이릴리스는 체계적으로 마법이나 검술을 배운 게 아니었다.

회귀 전의 제이릴리스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면 ‘대체 이걸 왜 못하는 건가?’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었지.

“경은 정말 솔직하군.”

“전하도 솔직하시잖습니까.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겠는가? 칼날을 숨긴 비밀과 깜짝 놀랄 만한 의외성 없이는 이 험악한 세상을 해칠 자신이 없는데.”

“전하도 소드 마스터에 오르면 세베릭 전하 같은 성격이 되실 거 같습니까?”

“되어 봐야 알겠지. 일단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텐티아 경이 쓰게 웃었다.

“다시 태어나도 정정당당해질 수는 없으시다는 겁니까?”

나는 시간을 거슬러도 정정당당해질 수는 없었다.

“정정당당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텐티아 경이 웬일로 그렇게 멋있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재빨리 변명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이르고르의 저택에서처럼 시간도 없고 마음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기습과 협박 말고는 답이 없다는 소리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극을 벌이지 않고 정면에서 싸우셨잖습니까? 저는 그거면 만족합니다.”

……내 도덕심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낮아진 건지 모르겠다.

“사실 인질극을 벌일 생각도 했었네. 그런데 인질극은 생각보다 비효율적이야. 인질을 죽인다는 협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정말로 인질을 죽이는 순간 나까지 망하는 거니까.”

텐티아 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 전에는 비효율이야말로 감정을 불러일으킬 방법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의 분노를 일으켜 봐야 뭘 얻을 수 있겠나? 나도 얻어야 할 게 있기에 자리에 나간 것인데.”

“그럼 켈피와 싸운 이후의 담화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켈피가 아니라 수적과 싸운 뒤의 담화였지. 대단한 건 아니었네. 결국 말뿐인 말들을 서로 믿고 싶어 한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야.”

대공으로서 달리는 평행선이 격돌하지 않기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우정을 지킬 수 있기를.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말하지. 진작 언급했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까지 밀렸군.”

나는 확신하며 말했다.

“그 켈피가 경을 습격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네.”

텐티아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애초에 그렇게 거대하고 강력한 켈피는 이야기로도 듣지 못했습니다.”

사악한 정령이라고는 하나, 어린아이 정도나 노리는 놈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고사하고, 소드 엑스퍼드에게 맞설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마 일종의 주술이나 옛것의 힘으로 강화된 괴물이었겠지요.”

“경을 노린다……. 경을 노려서 무엇을 얻을 생각이었을까?”

“결국 전하를 노리기 전 한 걸음 아니겠습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경. 만약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범인으로 제일 먼저 지목받을 자는 누구겠는가?”

텐티아 경이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세베릭 대공이 아니겠습니까?”

“북부와 황실 간 관계는 박살이 나겠지.”

지독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쿵. 쿵. 쿵.

저 지평선에서 푸른 안광을 가진 형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왜 잠이 안 왔는지 알겠군. 기분 탓은 아니었어.”

“예. 어쩐지 쎄하다 싶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상대했던 침식자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옛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이물이 아니라 마수인 거 같기도 했다.

“원근이 이상하군.”

문제는 그것들의 키가 옆에 선 나무와 비슷하다는 거였다.

* * *

밤의 침묵이 깨졌다.

말들은 투레질하고 마부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짐마차 바퀴는 마구 삐걱거렸다.

“으아아악!”

“도망쳐!”

“빨리 출발해야 하네!”

“빌어먹을! 바퀴가.”

혼란에 빠진 마부들을 뒤로하고 다섯 인영이 행렬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르세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거인 무리입니다. 안광을 보니 산 놈들은 아니고, 언데드로 다시 일어난 거 같습니다. 총 열세 놈. 키는 제일 큰 놈이 16m, 제일 작은 놈은 3m 정도군요. 편차가 심합니다.”

루디는 그들의 몸이 상처투성이임을 포착하고 말했다.

“기사님. 다들 몸에 상처가 많은데 왜 그런 건가요? 갈비뼈가 다 드러난 거인도 있어요.”

“너는 그게 보인다는 말이냐? 아무리 사점……. 아니. 그래.”

‘일류 암살자라면 기이한 능력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르세나는 당황을 가라앉히고 새 정보를 분석했다.

“상처가 많다면 아마 토벌 작전에서 도망친 놈들일 겁니다. 일단 자리는 피했지만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거지요. 기쁜 일이군요. 두 번이나 죽여줄 수 있을 테니까요.”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세베릭이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세베릭 대공.”

발렌시아누스는 일행 중 침식자가 섞여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했고, 세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해치우고 앞쪽으로 합류해야겠군.”

“!”

그가 양동일 가능성을 제시하자, 발렌시아누스는 경탄했다.

회귀 전 그가 이끄는 군대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던 전술적 판단력이었다.

“그래도 산을 지나친 다음에 야영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몇 시간만 더 가면 다시 선착장이 나옵니다.”

“곡식을 다시 실을 때가 관건이겠군요.”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짧은 문답을 주고받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자칫하다가는 조운선이 죄다 가라앉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를 향해 말했다.

“텐티아 경. 가게나.”

텐티아는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게 맞는 판단인지 아닌지 고민했다.

‘이런 복잡한 판단 같은 건 하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방금 모닥불가에서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발렌시아누스가 죽는다면, 세베릭이 범인 또는 책임자로 몰리고, 황실과 북부 간 관계가 파탄 날 수도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루디. 잘 부탁한다,”

텐티아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르세나. 부탁합니다.”

“전하!”

외안 안경을 쓴 기사 역시 결국 텐티아 곁으로 따라붙었다.

너무나 다른 두 대공을 섬기는, 너무나 다른 두 기사는 어깨를 마주하고 걸음을 옮겼다.

‘만에 하나 발렌시아누스 전하가 돌아가신다면 제국의 정세는…….’

‘만에 하나라도 세베릭 님이 지지는 않겠지만…….’

각자의 미련과 걱정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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