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4화
(114)
봄 같지 않은 봄의 광야에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되살아난 거인들이 저 멀리서부터 지축을 울리며 다가왔다.
쿵! 쿵! 쿵! 쿵!
바위 같은 회색 피부와 곰 같은 체구, 푸른 안광이 어우러져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붉은 살점이 드러나 있거나, 아예 팔 한쪽이 없는 개체도 있었다.
그게 그들의 무시무시함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우오오오오오오오!”
16m급 거인에게서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은 침식자가 아니라 언데드이기에 포효에 정신 파동의 힘은 실려 있지 않았지만, 대신 지독한 사기가 실려 와 근육을 굳히고 정신을 뒤흔들었다.
짐마차 행렬이 조금만 늦게 출발했다면 말들이 죄다 죽어 버렸을 정도였다.
“죽어서도 시끄러운 놈들입니다.”
세베릭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거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발렌시아누스는 안주머니에 붉은 약과 푸른 약이 있는 걸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습니다.”
“거인들과 싸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최근에 인간보다 거대한 이족보행 침식와 싸워 본 적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거인들과 싸울 때 주의해야 할 점 몇 가지만 말해드리겠습니다.”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세베릭이 고요하던 회색 눈에 눈보라 같은 격정을 담으며 말했다.
과거를 떠올린 그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지며 분노의 감정이 새어 나왔다.
“거인은 생각보다 똑똑합니다.”
“예? 똑똑이라고 하셨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되물었다.
예로부터 거인과 지성은 거리가 먼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 말을 한 게 세베릭이 아니라면, 그는 코웃음을 쳤을지도 몰랐다.
“물론 저놈들이 전략을 사용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게 변수입니다.”
“덩치만 크고 멍청한 괴물이라고 생각해 얕잡아보다 한 방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해했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간격을 두고 느슨한 포위망을 만들려 하고 있으니, 각개격파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큰 놈을 칠 테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혹시 모를 거인 주술사를 견제해 주십시오.”
세베릭이 제복 앞 단추와 셔츠 소매 단추를 풀고, 검을 뽑았다.
손잡이 끝 퍼멀에 푸른 보석이 박혀 있고, 칼날에는 회색과 하얀색 물결무늬가 들어간 보검이었다.
시이이이이이잉-.
칼날이 길게 울고, 서늘한 푸른 빛으로 달아올랐다.
그 빛을 받은 이목구비 또렷한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피폐하지만 책임감 넘치는 눈매와 굳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일순 일그러지고.
“다시 죽여주겠다. 영혼과 몸뚱이 모두.”
타앗, 소드 마스터가 땅을 박찼다.
발렌시아누스의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였다.
세베릭이 파도 같은 남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광야를 내달렸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거인 뒤로 피어오르는 흙먼지의 길과, 그 거인을 향해 쇄도하는 서늘한 푸른빛의 길이 보였을 거다.
세베릭이 혜성 같은 궤적을 남기며 검을 쳐들었다.
긴 검에 푸른 빛이 넘쳐흐를 듯 겹겹이 쌓였다.
검의 극의, 태산을 가른다는 오러 블레이드였다.
그가 거인을 100m 앞두고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냈다.
우우우우우우웅!
초승달처럼 뻗어나간 오러 블레이드가 부채꼴로 퍼지며 거인의 무릎을 훑었다.
퍽!
고기를 짓뭉개는 듯한 소리가 났다.
본래라면 푸딩을 벤 듯 잘려 나가야 했지만, 죽음의 힘을 받아 다시 일어난 거인의 육체는 생전보다도 단단해져 있었다.
“끄어어어어!”
그게 무릎이 절반 정도 잘려 나간 거인이 그대로 앞으로 엎어지며 울부짖는 이유였다.
쿵!
수십 톤에 달하는 거구가 지면에 엎어지자 굉음이 울렸다.
타앗, 세베릭이 단 한 호흡에 남은 100m 거리를 좁혔다.
거인이 거대한 손바닥을 들어 파리를 잡듯 세베릭을 내리쳤다.
세베릭은 눈보라 같은 분노를 다스리며 검을 베어 올렸다.
손목과 손 사이, 정확히 관절을 노리는 일격이었다.
사아악!
어지간한 마나 블레이드나 마법도 통하지 않는 거인의 육체가 푸딩처럼 잘려 나갔다.
쨍그랑!
떨어져 나간 손은 어느새 꽁꽁 얼어 있었고, 지면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회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얼음 조각을 튀겼다.
탁, 타앗, 타다닥!
세베릭이 거인의 팔뚝을 밟고 달려 올랐다.
허겁지겁 달려온 4m급 거인이 세베릭을 향해 거대한 손을 뻗었다.
하얀 털로 뒤덮인 손에 말라붙은 피가 흥건했다.
세베릭의 회색 눈이 거인의 목을 흘깃 바라보았다.
일직선으로 달리던 그가 그 속도 그대로 4m급 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산 자는 질투하고 갈구하는 언데드는 가까워지는 생기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북부 대공은 그 벌어진 턱 아래쪽으로 검을 베어 올렸다.
검술 교본에 나올 듯 깔끔하고 유려한 올려 베기였다.
장검이 곡선을 그리며 치솟고.
서, 걱!
거인의 목뼈를 푸딩처럼 자른 검이 목 뒤에서 튀어나왔다.
손수레에도 못 실을 크기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4m급 거인의 몸은 관성으로 아직 서 있었다.
타앗, 세베릭은 그 단면을 박차며 머리 잃은 몸뚱이를 무너뜨리고, 다시 16m급 거인의 팔뚝으로 돌아왔다.
그가 16m급 거인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발렌시아누스가 눈을 한두 번 깜빡일 정도였다.
세베릭이 거인의 어깨를 박차고 거인의 목을 향해 뛰어올랐다.
푸르른 오러 블레이드가 타오르며 그 검이 4m도 넘는 길이로 변했다.
그때 거인은 푸른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 16m급 거인이 그대로 폭발했다.
콰앙!
푸른 화염이 버섯처럼 치솟고 지름 700m 안에 있는 모든 풀과 관목과 바위가 그대로 갈려 나갔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용처럼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로 다가오는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래지 않아 마나를 품은 언데드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로…… 생각보다 똑똑하네.’
되살아난 거인 주술사가 ‘시체 폭발’ 주문을 사용한 것이었다.
시전자도 시체인지라 동족의 시체를 이용하는 걸 비난하기에도 뭣했다.
그는 혀를 차고 잠시 실소했다.
이미 죽은 놈들끼리 서로 터트리며 싸운다는 사실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폭발에 정통으로 휘말린 세베릭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지만, 늑대 모피 두른 두꺼운 코트에는 적잖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3~8m에 달하는 언데드 거인들이 세베릭을 향해 달려갔다.
뻔히 보이는 작전이었지만,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세베릭.’
“루디. 엄호해줘.”
“네. 발렌 님.”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와 50m 간격을 두고 마나가 느껴지는 거인을 향해 달렸다.
그를 알아보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는데, 추악한 머리가 두 개나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배로 못생긴 놈이로구나! 네놈을 보면 시냇물과 거울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것이다!”
발렌시아누스를 본 주술사 거인이 포효했다.
“우워어어어어어!”
단단한 지면이 늪처럼 변하며 그의 다리를 잡으며 했다.
“루디, 조심해.”
“네. 발렌 님.”
루디는 재빠르게 우회했고, 발렌시아누스는 한껏 도약하며 외쳤다.
“아니마!”
발밑에서 거센 바람이 솟구치고, 그는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늘을 달렸다.
‘시체 폭발이라. 기사들의 천적이나 다름없군.’
세베릭은 소드 마스터의 명성답게 분투하고 있었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강인한 거인이 언데드까지 되었다.
죽이려면 몸뚱이를 일도양단하거나 목을 베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접근해야 하고, 접근했다가는 막대한 위력의 ‘시체 폭발’에 정통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콰앙!
거인 하나가 미친 듯 달려 나오고, 폭발했다.
지름 500m가 초토화되고 푸른 불길 속에서 세베릭이 뛰쳐나왔다.
언 듯 보면 무사해 보이지만,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버티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육체는 용의 가죽처럼 단단하지만, 방어를 위해 특별히 강화된 몸은 아니었다.
그 제이릴리스조차 방어기를 따로 만들지언정, 몸으로 받아낸다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입장상 무작정 히트 앤 런 전략을 쓸 수도 없는 상황.
‘외통수네.’
하늘을 달리다 땅에 내려선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과 거인 주술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치겠네. 루디, 100m 뒤로 물러서.”
“네, 네?”
둘과 거인 주술사와의 거리는 500m 정도였는데, 그 중간쯤에 5m급 거인이 한 구 서 있었다.
거인 주술사의 두 얼굴이 씩 웃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놈은 발렌시아누스가 접근해오는 걸 보자마자 강력한 시체 폭발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소드 마스터에게도 통하는 공격이니, 발렌시아누스에게는 치명적일 게 분명했다.
그는 세베릭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세베릭이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내 거인 두 구의 다리를 잘라 냈지만, 다리 잘린 거인들이 미친 듯 기어 오자 결국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각오를 마쳤다.
떠오르는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그가 5m급 거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루디. 시간 좀 끌어주라. 주술사 놈의 눈을 노려줘.”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총을 쥐었다.
강력한 술식이 새겨진 마탄 여섯 발이 각기 장전되어 있었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500m 거리면 거의 권총형 마총의 사정거리 한계였고, 14m급 거인도 점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 마도구의 도움과 충성심이라는 네 개의 빛줄기는, 그녀의 마탄이 나아갈 길을 비추어주었다.
“이…… 게.”
제아무리 마탄이라도 거인의 몸을 뚫기는 어려웠지만, 얼굴과 눈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은 줄 수 있었다.
주술사 거인이 목을 길게 뻗으며 루디를 찾으려 했다.
푸욱, 그리고 까드드득!
그때 발렌시아누스는 5m급 거인의 눈구멍 안에 검을 찔러 넣고 돌리고 있었다.
바람을 달리는 신발, ‘아니마 라멘툼’을 이용하면 그 높이까지 뛰어오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약을 꺼내 들이켰다.
“하아.”
일순 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떨어진 유리병이 깨지는 파삭, 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는 이를 악물며 온몸에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을 일으켰다.
마나 블레이드도 막아내는 단단한 비늘이 그의 온몸을 갑옷처럼 감쌌다.
하얀 제복으로 몸을 단단히 싸매고 있었기에, 비늘이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얼굴과 손뿐이었다.
그는 다시금 검을 비틀어 5m급 언데드 거인이 비명을 지르게 했고, 마나를 심장에서 최대한 끌어 올렸다.
이 정도 마나가 알아서 뽑혀 가게 했다는 그 반동으로 몸이 다 망가질 수도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를 죽일지도 모를 시동어를 외쳤다.
“시체 폭발!”
마법을 쓸 때, 주문이 길어지고, 수인이 복잡해지고, 마법에 대한 이해가 깊고, 시약이 많을수록 체내의 마나는 적게 소모된다.
주문이 짧아지고, 수인이 단순해지고, 마법에 대한 이해가 얕고, 시약이 적을수록 체내의 마나는 많이 소모된다.
발렌시아누스는 방금 주문은 외우지도 않았고, 수인도 없었으며, 이 마법에 대한 이해는 회귀 전에 어깨 너머로 몇 번 본 게 전부고, 가지고 있는 시약 같은 건 없었다.
그는 그런 주제에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그는 눈앞이 흐려지고 코와 눈에서 피가 터져 흐를 정도로 막대한 마나를 지불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지불을 마쳤고, 마법의 법칙에 따른 계약은 이행되었다.
우웅!
14m급 주술사 거인의 두 머리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쪽은 입을 쩍 벌리며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질렀고, 한쪽은 우묵한 눈을 지긋하게 감으며 수 싸움에서 승리한 상대에게 한 존중을 표했다.
콰앙!
다음 순간 언데드 거인 주술사의 몸이 시체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구름이 버섯처럼 치솟고 광야의 대지가 갈아엎어졌다.
중심부로부터 600m 이상 떨어져 있던 루디도 열풍에 나동그라질 위력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들며 5m급 거인을 완충제 삼아 그놈의 몸 뒤로 비늘 두른 몸을 숨겼다.
쿠구구구구구구-!
푸른 폭발에 휘말린 5m급 언데드 거인이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지며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이윽고 푸른 불길이 그를 덮칠 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등을 돌렸다.
그 같은 망나니는 누군가를 믿을 수밖에 없을 때 제일 약해졌다.
‘세베릭. 뒷일은 맡기겠어. 그대가 기절한 내 목을 베어 버리지는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