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5화
(115)
“……발렌 님.”
“발렌시아누스 대공!”
나는 아득한 고함을 들으며 눈을 떴다.
아직 하늘이 새까만 게 기절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은 거 같았다.
“저를 뭘 그리 애타게 부르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몸 상태와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조심하세요. 조심.”
루디가 내가 목을 가누는 걸 도와주었다.
내 사지는 다 붙어 있었고, 신발도 무사했다.
왼손은 여전히 비늘에 뒤덮여 있었지만, 그걸 불만스러워할 상황은 아니었다.
주변은 깔끔한 평지가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언데드 거인들이 토막 난 채 흩뿌려져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내가 고요했던 회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인하고도 피폐한 그 눈이 흔들렸다.
세베릭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왜 그랬습니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세베릭 대공. 그대가 시체 폭발에 당해 쓰러지면 나 역시 끝장입니다. 그대를 살리는 게 나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세베릭은 잠시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믿으신 겁니까?”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는 사실이 배경에 깔린 말이었다.
루디의 손이 약간이나마 떨려서, 그녀가 그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루디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못 믿을 모습을 보여주셨어야지요. 한없이 고결하신 북부 대공 전하가 아니십니까?”
나는 세베릭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세베릭 대공도 나를 믿었잖습니까? 내가 대공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대신 어떻게든 거인 주술사를 해치워줄 거라고요.”
“그건…….”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양자택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결국 같은 곳을 보지 못한 사람을 상대로는 더더욱.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담하게도, 때로는 상대를 믿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대가 먼저 나를 믿어주었기에, 나도 그대를 믿었습니다.”
상대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믿었다는 사실에 감정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었다.
피폐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보통 그런다.
너 죽고 나 죽자며 덤비는 기상천외한 미친놈들 사이에서, 믿음을 주는 사람은 고마울 뿐이었다.
세베릭이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내 옆에 서더니 루디와 함께 나를 부축했다.
거의 나를 들고 가는 수준이었다.
루디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늑대 모피에서 탄 냄새가 났다.
우리는 짐마차들이 나아간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하고도 고요한 길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예. 세베릭 대공.”
“방금 그대가 북부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요?”
“중앙과의 교섭은 모두 그대에게 맡겨 두고, 저는 최전방 요새에 머물 수 있을 테니까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제가 중앙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고 도망치면 어쩌시렵니까?”
그가 목소리를 착 깔며 말했다.
“북부의 연인이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야지요.”
나는 코웃음치며 답했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못 죽일 걸 뻔히 아는 인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베릭이 쓰게 웃었다.
나는 그가 진짜 하고 싶어 하던 말을 알 거 같았다.
나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세베릭 대공. 같은 제국 안에서 왜 이렇게 쓸데없는 신경전이나 소모전, 주도권 싸움, 명분 싸움에 힘을 쏟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한 대 똘똘 뭉쳐 침식자와 이물, 마수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해도 모자랄 판인데.”
나는 신경전, 소모전, 주도권 싸움, 명분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전리품 분배가 합의되지 않은 전쟁은 시작도 할 수 없거나, 적을 쓰러트린 뒤 다시 싸우게 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오늘처럼 강한 적을 맞아 싸우고 나면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신경전이고, 무엇을 위한 명분 싸움인지.
“그럴 때가 온다면 대영주끼리 쓸데없이 서로를 견제할 필요도 없고, 이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이 황량한 광야를 떠돌 필요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세베릭이 은은한 웃음으로 답했다.
함박눈 같은 웃음이었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 선조 중에는 북부의 정령이나 기이를 사랑하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저희 선조들도 똑같습니다.”
모든 혈통 관리가 치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쓰러트리고 죽여야 할 적과 피를 섞는다는 건 미친 짓이었지요. 지금이야 모든 귀족이 이종족 혼혈이지만, 그때는 아니었으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미친 짓 덕에 후대의 저는 온갖 진기한 혈통을 다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겨울을 몰고 다니고, 정령인 켈피를 손으로 붙잡았으며, 시체 폭발을 견뎌낼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은 미친 짓 같아도 그게 후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세레라지에도 이 말을 들었다면 동의할 거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장 깊은 곳에서 끝내 같은 곳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그대를 믿었고, 그대가 나를 믿었으니,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요한 회색 눈이 나를 꿰뚫어 보았다.
나는 찰나의 찰나에 회귀 전 삶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아쉬움이었다.
어떻게든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복달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비열한 술수로 자결시켰다.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소문을 아시지 말입니다.”
“제 소문도 만만찮습니다. 과거 몇 번 충돌했던 북동부 영주들은 아직도 북부 대공이 갓난아기만 먹고산다고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다시 마주 보았다.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친밀감 만드는 데에는 썩 훌륭한 말이었다.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이제 친구입니다.”
세베릭이 한 걸음 더 나왔다.
“히이익!”
그때 루디가 숨을 들이켰다.
“왜 그래?”
“……발렌 님.”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초점 나간 녹색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조금 빨리 걷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왜?”
“선착장에 걸어 다니는 시체가 바글바글해요.”
* * *
델루시아토 백작령의 늪지를 막 빠져나온 선원들과, 거인 언데드가 나오는 광야를 밤새도록 달려온 마부들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빨리! 더 빨리!”
“기사님들도 지쳐 가신다!”
“판자 사다리 내리고 손수레 가져와!”
그러나 그들은 누구 하나 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착장 전체가 언데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우우우우!”
“끼이이이이이이이이!”
형태가 흐릿한 고스트인 ‘레이스’와 우는 여자 ‘벤시’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날았다.
그 울음소리를 들은 선원들이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판자 사다리에서 손수레를 밀다 중심을 잃고 물로 빠지는 짐꾼도 있었다.
파앙! 피앙! 피앙!
스켈레톤 궁수들이 뼈로 된 볼트를 쏘아댔다.
손가락 세 마디 크기의 뼛조각은 천 옷을 가볍게 뚫고 사람을 쓰러트렸다.
“우워워워!”
크고 작은 좀비들이 해일처럼 달려들었다.
두셋이 합쳐지며 어보미네이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 끔찍한 군대를 막아내고 있는 건 세베릭이 데려온 한 줌의 수행원들과 몇 명의 기사들뿐이었다.
아몬 신의 사제가 한 명 있지 않았다면 이미 레이스와 벤시 탓에 모든 선원이 미쳐 서로를 죽였을 것이었다.
“전사의 긍지를 가진 저들을 축복하사…….”
만월은 아니었지만, 달이 뜬 날이었고, 달의 광기로 세례를 받은 선원들은 언데드의 사기를 이겨내고 전투적으로 곡식을 배로 옮겨 실었다.
“잘하고 계십니다.”
르세나는 코피를 줄줄 흘리는 사제에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축성 받은 강철로 만든 검이 벤시의 목을 베고 레이스를 터뜨렸다.
그녀의 검은 날이 넓지는 않았지만 두툼했고, 끝이 날카로워 뼈와 살을 헤집기에도 제격이었다.
그녀는 왼손에 두 뼘짜리 단검을, 오른손에 세검을 들고 언데드들을 해체했다.
사악, 사아악!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대군을 상대해야 했기에 마나 블레이드를 마음껏 뽑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마나 블레이드를 옅게 두른 세검으로 좀비의 무릎을 깊게 찔러 비틀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망가진 좀비가 바닥에 쓰러졌다.
“우워워워!”
푹!
동시에 그녀를 물어뜯으려 아가리를 벌리는 다음 좀비의 눈알에 단검을 박아 넣고, 힘껏 팔을 비틀며 머리통을 까 버렸다.
르세나는 손으로 주변 좀비들을 먹어 치우며 점점 거대해지는 어보미네이션에게 달려들었다.
쿵!
어보미네이션이 덩굴 같은 힘줄이 솟은 손을 내려쳤다.
르세나는 오른발을 축으로 빙그르르 돌아 피하고 놈의 양 무릎 뒤쪽을 깊게 찔렀다.
“뿌우우!”
일순 놈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때 그녀는 놈의 목덜미를 세검으로 찌르고 그대로 그어 내리며 잘라 냈다.
피잉! 피잉! 피잉!
“이런……!”
백 구도 넘는 스켈레톤 궁수들이 르세나에게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판금 갑옷은 강화 마법진이 여럿 새겨진 고급품이었지만, 막대한 사기가 실린 볼트와 화살을 모두 막아낼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캉, 카가가강, 카앙!
그때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하얀 인영이 있었다.
“르세나 경.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텐티아가 늠름하게 소리치며 온몸으로 화살과 볼트를 막아냈다.
막대한 사기도 그녀의 온몸에 흐르는 붉은 색채를 뚫지는 못했다.
그녀는 한 손은 장검의 크로스가드에 닿을 정도로 바싹 올려 쥐고, 한 손으로는 손잡이 끝 동그란 쇳덩이인 퍼멀을 잡았다.
“하아!”
늑대 같이 포효한 그녀가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오르는 장검을 상하좌우 종횡무진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베어 올라간 검이 언데드들의 허벅지, 허리, 상체, 목을 반으로 잘라 냈다.
서걱!
유성처럼 떨어진 검이 어보미네이션의 한쪽 다리를 베어냈다.
츠카아악!
무용수처럼 빙그르르 돌며 휘두른 검이 스켈레톤 궁수들의 뼈를 쪼개고 부수었다.
두꺼운 갑옷을 입었음에도 그녀의 몸놀림은 유연하고 매끄러웠다.
텐티아는 쳐올린 팔꿈치의 스파이크로 좀비의 머리를 깨고, 종아리를 노리는 발차기로 스켈레톤의 다리를 분지르고, 투구를 이용한 박치기로 구울의 머리와 목을 가슴 안쪽으로 주저앉혀버렸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다! 이 몸이 너희들의 육체에 안식을 주겠다.”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검이 예리하게 휘둘러지고, 좀비의 목이 낫 앞의 밑처럼 베여 나갔다.
그녀는 6m급 언데드 거인이 내리치는 주먹을 피하고, 무릎을 잘라 낸 뒤 머리를 검으로 베어내려 가슴까지 쪼개 버렸다.
‘뜨겁군.’
치이이익!
붉은색 기운이 증기처럼 피어올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뜨거워.’
그녀는 황홀경에 젖은 표정을 투구 안에 감춘 체 검을 휘둘렀다.
피피핏!
집채만큼 거대한 살점 애벌레가 기어와 가시를 날려댔다.
팅, 팅, 티잉!
“워어어?”
정확히 눕힌 검 면을 타고 미끄러진 가시는 좀비들의 다리에 박혔다.
텐티아는 거대한 살덩이를 일도양단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투구의 붉은 리본과 붉은 망토가 멋들어지게 휘날렸다.
그녀를 본 선원들은 그녀가 마치 영원히 뛰는 심장을 가진 전쟁 신의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지옥으로 돌아가라!”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불길처럼 타오르고, 그녀의 일검이 살덩이의 머리를 세로로 쪼갰다.
녹색 체액이 사방으로 튀며 산성 증기를 뿜어댔지만, 그녀는 괘념치 않고 달려들어 왼손으로 몸부림치는 살덩이를 붙들고 얼굴을 언데드들 쪽으로 돌렸다.
산성 체액을 맞은 언데드들이 줄줄 녹아내렸다.
“발렌 대공 전하와 세베릭 대공 전하는 보이지 않느냐?”
텐티아의 외침에 대장선 돛대 꼭대기에 탄 선원이 답했다.
“아직 안 보이십니다.”
텐티아와 르세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데드들보다 더욱 무서운 건, 그 둘 중 한 명만 돌아오는 것이었다.
둘은 모두 각자의 주군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고 미친 듯 성장하며 승승장구하는 망나니 황형과, 절대적인 무력의 상징인 북부 대공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이 ‘고작’ 언데드 거인 따위에게 쓰러졌다는 말은 납득하지 못할 거다.
그때 무엇을 생각하게 될지 두려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 한들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둘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텐티아는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르세나는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북부 대공이 전하를 죽인다면.’
“망나니 황자가 대공님을 죽인다면.”
그때 돛대 위의 선원이 외쳤다.
“오고 계십니다! 오고 계십니다! 두 대공 전하와 시녀까지 모두 있습니다.”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르세나 경. 다행입니다.”
“예. 텐티아 경.”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 * *
소드 마스터와 일류 마검사가 가세한 전장은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고, 결국 모든 곡식이 배에 실렸다.
수백 척의 조운선이 북으로 또 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네들 무슨 일이 있었나?”
“어색해졌군.”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술잔을 나누며 새로 맺은 우정과 생환을 즐겼다.
“아……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저도 함께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했던 생각이 너무나 불경한 것으로 느껴져서, 두 기사는 간판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