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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16화 (15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6화

(116)

배는 14일간 더 북쪽으로 향했다.

델루시아토 백작령만 지나면 그때부터는 셉텐트리오스를 섬기는 봉신들의 영지였다.

매일 순찰을 돌리고 매년 대토벌을 벌이는 만큼, 강가에는 언데드도 이물도 사악한 정령도 없었다.

“발렌시아누스. 저 숲에는 제 아버지 때까지만 해도 엘프가 찾아왔습니다. 어릴 때 딱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었지요.”

“대단하십니다. 세베릭. 역시 북부는 신비의 보고군요.”

나는 세베릭의 설명을 들으며 거대한 침엽수림과 만년설이 쌓인 봉우리, 웅장한 협곡의 풍경을 즐겼다.

산에서 떨어진 빙하 조각이 강을 틀어막아 그걸 검과 불로 부수기도 했고, 피로에 지친 선원이 선착장을 잘못 헤아려 곡식을 전달해줘야 하는 봉신을 지나치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해프닝 정도로 끝났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지난번 겨울에도, 지지난번 겨울에도 그대가 나를 위해 3천의 정예병을 보내준 걸 기억하고 있다.”

본래 봉신이 주군에게 지는 의무는 단 두 가지다.

1년에 10%의 세금과 40일의 무급 종군.

하지만 북부는 시도 때도 없이 이물과 마수의 침공이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전하. 중장기병과 늑대 기병을 조련해 오는 가을에 다시 올라가겠습니다.”

세베릭의 모든 봉신이 겨우내 종군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건 환경 때문만은 아니라, 언제나 세베릭이 솔선수범 앞장서서 최전선에서 싸우기 때문일 거다.

……나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수백 척에 달하는 선단 중 절반 이상이 후방의 봉신들에게 향했다.

그 말은, 세베릭은 봉신들에게 나눠줄 곡식을 받아 가기 위해 자신이 황실에 빚을 진 거다.

“세베릭. 단순한 계약 관계는 아닌 거 같습니다.”

“발렌. 북부는 험한 곳입니다. 너와 나를 칼같이 나누며 손해 보지 않고만 살려다가는 같이 죽지요.”

뭉치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흩어지면 무조건 죽는다.

그의 눈매가 강인한만큼이나 피폐하고, 또 피폐한 만큼이나 강인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15일째 되는 날이었다.

앞 간판에서 텐티아 경, 루디와 함께 노닥거리던 내 눈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격이 수백 m에 달하는 두 골짜기 사이에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요새였다.

“어마어마하군.”

“솔레타라온 성벽도 이 성벽 옆에 가져다 두면 왜소해 보이겠습니다.”

“심지어 이쪽은 요새 뒤쪽이잖아요. 그럼 앞쪽은 대체 얼마나…….”

강 양옆으로는 높은 둑이 있었고, 그 위 길로 상인들이 요새에 드나들고 있었다.

요새 앞 경비병은 가죽에 철판을 덧대 만든 좋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무기에는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나는 그 경비병의 경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세베릭. 소드 유저를 경비병으로 쓰는 겁니까?”

“적이 왔을 때, 일단 기사들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세베릭이 내 놀라는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그가 르세나에게 지시하자, 르세나가 상단주에게, 상단주가 선장들에게 지시했다.

수백의 깃발이 올라가고 수백 척의 배가 강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요새 안쪽으로 통하는 강은 수도 솔레타라온의 운하와 비슷하게 방비하고 있었다.

성벽에 아치형으로 구멍을 파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하고, 강바닥까지 박히는 육중한 격자 쇠창살을 내렸다.

“전하.”

르세나의 말에 세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세나가 배에서 내려 요새 안쪽으로 향하더니, 오래지 않아 기사 수십 명과 함께 돌아왔다.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은회색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매끈한 투구를 쓴 기사가 30명, 청동으로 장식한 가죽 갑옷을 입고 보석 달린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15명, 사슬 갑옷 위로 철판을 두른 중장 보병이 50명이었다.

거기에 더해 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또 30명이었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홍의주교 한 명과 이단 심문관 네 명, 전투 사제 여덟 명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나온 무리는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초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얇은 천 옷만 입은 장신의 사내와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묘하게 체구가 크고 눈빛이 부리부리했으며, 철제 무기나 가죽 의복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텐티아 경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발렌 전하. 저들은 아몬 신도들입니다.”

이 자리에 나올 정도면, 저 50명 모두가 고위급 늑대인간 전사들이라는 말이었다.

광명신교 홍의주교와 아몬신교 전사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텐티아 경은 물론이고 루디도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세베릭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요새에 들어가기 전 검문이 있을 예정이다.”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저 멀리까지 퍼졌다.

맨 뒤쪽 배에 탄 선장과 선원들도 그 목소리를 들은 거 같았다.

뭐지? 마법인가? 하는 웅성거림도 따라붙었다.

“얼마 전 한밤중에 언데드들의 습격을 받은 걸 모두 기억할 거다.”

세베릭은 한 박자 쉬어 시선을 모으고 말을 이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몇 배는 더 큰 웅성거림이 퍼졌다.

“우리 중에 침식자가 섞여 있다. 중간에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지금까지 기다렸다.”

이곳은 북부,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강 오른쪽은 깎아지는 절벽이었고, 강 왼쪽의 선착장에는 무장한 병사들과 기사들이 우글거렸다.

“선장부터 노잡이 한 명, 시동 한 명까지 모두 간판에 모여 검문을 받을 수 있도록 해라. 사제님들과 마법사들이 직접 검사할 것이다.”

세베릭은 침식자의 위험 앞에서 다시 겨울 같은 사내로 돌아갔다.

그 역시 가진 게 많고 잃을 게 많은 자였다.

* * *

검문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마법사들이 1차로 혈마법을 사용한 감지 마법을 사용했다.

배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간판에 모인 사람들이 순수한 인간이 확인했다.

사제들이 2차로 신성력으로 배와 사람들을 정화해 확인했다.

침식자가 있다면 바닥을 구르며 몸이 타들어 갈 만큼 강한 정화였다.

아몬신도들이 3차로 다른 옛것을 섬기는 침식자를 만났을 때 생기는 특유의 반응을 찾았다.

그렇게 검증이 끝난 배는 격자 창살 앞에서 기다렸다.

“슬슬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오늘은 술집에서 한잔하려 했는데.”

선장들과 선원들이 애교 섞인 불평과 불만을 들어 놓았지만, 북부의 기사와 병사들은 서늘하게 대응했다.

“불만이 있다면 뛰어내려라.”

“꼭 말씀을 그렇게……!”

스르릉!

“죄송합니다!”

“저희가 조용히 시키겠습니다.”

침식은 중대 사항이었다.

정신 파동으로 한 번 울부짖으면 일대의 수십 수백 명이 침식되었고, 그걸 들은 모든 이들이 악몽을 통해 옛것들을 접하게 되었다.

회귀 전의 검은 성자 마테오스라면 곡식만 요새 안으로 들이고 모든 선원을 불태우려고 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루디는 진작 검문을 마치고 대장선 간판에 남아 있었다.

“혈마법사가 발렌 전하의 혈통을 확인했을 때 기겁하더군요.”

“당연하지. 나는 황족이라네. 일단 드래곤으로 시작했지. 그 뒤로 엘프, 드워프, 인어, 리자드맨, 오거까지 5대 종족이 섞였고, 나가, 바실리스크, 하피, 메두사, 거인, 정령…… 좋다는 건 다 받아들였을 거야.”

“그러고도 인간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그게 인간의 무서운 점이라네.”

그들이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리고 있을 때 세베릭이 다가왔다.

“발렌. 이제 절반 정도 끝났습니다. 내일 새벽까지는 해야 할 거 같은데, 선실로 들어가 쉬시지요.”

“주인이 일하고 있는데 어찌 객이 쉬겠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게다가…….”

“게다가?”

“침식자가 한 놈이라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한 놈이라도 걸린다면 그때부터는 틀림없이 저나 세베릭을 노릴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을 나른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슬슬 걸릴 때가 된 거 같습니다만.”

그가 중얼거리고.

“아아아아악!”

거짓말처럼 비명이 울렸다.

밤의 적막이 갈기갈기 깨졌다.

* * *

사제가 신성력을 뿜는 순간 그는 팔뚝을 예리한 집게발로 변이시켜 내질렀다.

카앙!

성기사가 몸으로 대신 막아내고, 신성력은 예정대로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악!”

침식자가 산성액을 뒤집어쓴 듯 울부짖었다.

“찾았다!”

“목을 찔러! 정신 파동을 못 쓰게 막아라!”

그는 곧바로 정신 파동을 내질러 일대의 선원들을 괴물로 바꾸려 했지만, 성기사들은 능숙하게 그를 제압했다.

단검으로 목을 찔러 소리를 못 내게 막고, 팔다리를 잘라낸 뒤, 축성 받은 상자에 구겨 넣고 뚜껑을 단단히 잠갔다.

“옮겨!”

“침식자를 확인했다! 정신 바짝 차려라!”

이미 검문을 받은 선원들이 덜덜 떨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아직 검문을 받지 않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난간에 나란히 서서 그 황금색 눈과 회색 눈을 빛냈다.

“시작입니다.”

텐티아는 검을 뽑았고, 루디 역시 마총을 쥐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깔끔하게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확신했다.

‘정령이나 언데드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충동질시키는 지배계인 동시에, 자신의 몸을 변이시키는 변이계다. 둘 다 할 수 있는 게 장점이겠지만, 특출난 장점은 없다는 뜻이지.’

이곳은 요새 도시의 코앞이었다.

언데드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을 거고, 본인의 몸을 변이시켜 봐야 소드 마스터 앞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곡식을 실을 때 언데드 거인들과 일반 언데드들을 다 몰아쳤어야지. 너희는 그때 각개격파하려다가 각개격파 당한 거야.’

그는 침식자와 옛것에 관한 전문가였다.

지금 저 침식자들이 보이는 능력만으로는 절대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걸 모를 놈들이 아닌데.’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너무 일이 잘 돌아간다는 것뿐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배들 사이에서 파도가 이는 게 보였다.

조운선들이 들썩였지만,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저 정도는 준비해 줘야지.’

“대공 전하!”

“조심하십시오!”

북부의 기사들이 세베릭과 발렌시아누스를 둘러쌌다.

세베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발렌. 물의 정령입니다. 상급은 되는 거 같군요.”

발렌시아누스는 기겁하며 되물었다.

“저게 어딜 봐서 정령입니까? 물의 악마를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정령은 온몸에 보석 같은 비늘을 단 거대한 푸른 인면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뱀처럼 튀어나오는 이중 턱과 가시 돋친 지느러미, 그리고 열두 개의 불그스름한 눈이 아니었다면, 정령이라고 우기는 걸 어찌어찌 그러려니 들어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아악!”

정령의 아가리에서 사람 같은 턱이 10m 정도 길게 튀어나와 선원 한 명을 우물거리다가 퉤 하고, 뱉었다.

불운한 선원은 수백 m을 날아가 다른 배 간판에 떨어져 데굴데굴 걸렸다.

물의 정령 위에 올라탄 침식자가 두 손을 휘두르며 정령을 부렸다.

사람을 먹었다 뱉어내고, 물을 길게 쏘기도 하고, 순식간에 얼리며 공격하기도 했고, 압도적인 질량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북부의 정예병들이 가득했다.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마법사들은 네다섯 명만 있어도 상급 정령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는 실력자였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사용하면 날아오던 물 공격들이 모두 흩어졌고, 성직자들은 신성력을 뿜어내 아예 정령의 몸을 직접 무너트렸다.

침식자는 정령을 부려 그 와중에도 선원을 집어삼키고 또 뱉어냈다.

선원 하나가 대장선까지 날아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때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며 세베릭을 향해 외쳤다.

“대공, 저놈입니다!”

“!”

북부의 기사들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선원을 계속 먹고 뱉으며 날려댄 건 동료를 접근시키기 위함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마저도 미리 알아채고 알렸다.

우당탕!

침식자 선원이 바닥을 굴렀다.

“아아아악! 팔, 팔이 부러진 거 같습니다…….”

“…….”

“…….”

“팔이 부러진 거 같다고!”

스르릉!

부상당한 척 연기한 게 무색하게도, 이미 북부의 기사들은 그를 다져버릴 준비를 마쳤다.

침식자는 쓰러진 그대로 고개만 들어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두려움과 배신감에 차 떨리는 눈빛 아래 희미한 승리의 고양감을 보았다.

침식자가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발렌시아누스 나리,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희와 함께 북부 대공 세베릭을 암살하기로 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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