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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17화 (15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7화

(117)

대장선으로 날아온 침식자는 곧 북부 기사들의 손에 다진 고기처럼 변했다.

타락한 물의 정령은 소환 해제되고, 그 침식자 역시 성기사들에게 붙들려 상자에 들어갔다.

검문이 이어지고, 조금씩 동쪽 하늘이 밝아져 왔다.

더 이상의 침식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하. 광명신께서 허락하신 모든 권능을 사용했지만, 이 이상으로는 찾지 못하겠습니다.”

“혈마법로 분석해본 결과 모두 순수한 사람입니다. 배 창고나 짐 안에 숨은 생명체는 없습니다.”

“아몬신께서도 다른 옛것들에게 투지를 불태우지 않으십니다.”

성직자들과 마법사, 아몬신도들이 대장선 간판으로 건너와 보고했다.

준동은 끝났다.

하지만 누구 하나 준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침식자가 검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고래고래 외친 단말마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제일 불편하고 불경한 눈빛을 보내온 건 혈마법사들이었다.

제아무리 황실이라고는 해도, 발렌시아누스의 피는 도저히 인간의 피 같지 않았다.

용찬 의식의 결과임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는 의심이었다.

텐티아는 그 눈빛을 보고 마법사를 향해 일갈했다.

“네놈. 두 눈이 뽑혀야 예의를 차리겠느냐?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시다. 고개를 조아리거라.”

혈마법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백금 기사의 살기를 버텨낼 수는 없었다.

그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오만불손하고 의심에 차 있었다.

“네놈!”

“텐티아 경. 되었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근거 없는 의심과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일에 익숙했다.

그때 사제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전하. 혹여 더러운 피가 튀지 않으셨을까 걱정되옵니다. 제가 전하께 다시 한번 정화의 빛을 쐬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한 정화의 빛이 그의 몸을 쓸었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그의 무결함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어느 선장이, 선원이 먼저 이야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말한 게 중부인인지도 북부인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꼭 침식자라서 세베릭 전하를 죽이려 한 게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

제국 수도 솔레타라온에는 북부 대공이 일부러 마수를 다 죽이지 않는다는 괴담이 파다했다.

모든 마수가 죽으면 그때는 황실이 북부를 노리리라 의심해서 그렇다는 괴담이었다.

북부에는 황실이 일부러 지원하는 곡식과 무기의 양을 줄이고 있다는 괴담이 나돌았다.

북부가 마수를 다 죽이면 그 칼끝을 남쪽으로 돌릴까 두려워한다는 괴담이었다.

“황제 폐하가 우리 세베릭 전하를 견제하시는 건…….”

“그래서 자기 오빠를 보내서…….”

“이미 침식자들과 밀거래한 적이 있다고…….”

그들은 발렌시아누스가 침식자라는 것뿐이 아니라, 세베릭을 죽이려 했는지 아닌지에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선장 하나가 고래고래 외쳤다.

“발렌시아누스 전하가 오는 길에 돛대마다 시체를 걸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모든 배마다 시체가 걸려서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 말입니다!”

“!”

북부는 신비와 기이와 미신이 살아 숨 쉬는 땅이었다.

시체 수백 구를 돛대에 걸어 두는 건 누가 들어도 어떠한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몬신도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대장선 간판으로 훌쩍 뛰어 건너왔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제가 아까도 조금 긴가민가했었던 거 같습니다. 너무 이질적으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게 전하께서 황족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다른 기운이 섞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것도 용찬 의식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걸 말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미 눈빛이 오만불손하구나.”

북부의 기사들이 하나둘 눈빛을 교환했다.

성기사들이 간판 위로 조금씩 모여들었다.

북부 출신 선장 하나가 고래고래 외쳤다.

“똑바로 말해라! 사악한 켈피가 세베릭 전하를 공격하게 한 게 네놈이지!”

그 말을 들은 루디는 곧바로 마총을 뽑아 사내에게 겨누었다.

“이……!”

“루디!”

발렌시아누스가 황급히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방아쇠를 당겼으리라.

그걸 본 북부인들과 선원들의 눈빛은 더더욱 차갑게 식었다.

그들은 마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르는 건 더욱 무서운 법이었다.

검을 뽑으려 한 병사도 있었다.

“멈춰라!”

르세나가 날카롭게 외쳐 제지하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간판을 걸어왔다.

그녀를 본 다른 기사들이 물러서며 길을 텄다.

단정한 검은 머리에 차분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외안 안경을 쓴 행정관이자 기사.

“발렌시아누스 전하.”

“르세나 경.”

“침식자의 거짓말로 불편을 겪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네. 저 불경한 자들로부터 나를 분리해 주겠나?”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외안 안경 너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모시거라.”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직감했다.

‘침식자도 암살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능하고도 위험한 자는 제거 순위 1순위지. 르세나의 경계심을 너무 많이 샀어. 세베릭과의 친분을 과시한 게 독이 되었다.’

북부의 기사들이 발렌시아누스를 둘러쌌다.

그때 텐티아가 검을 뽑았다.

“나는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이분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 * *

일기당천의 북부 기사들과 일당백의 중장 정예 보병들, 늑대의 영혼을 가진 전사들과 신의 가호를 받은 성기사들.

북부의 거물 르세나와 북부 대공 본인.

그 모두의 앞을 막아서며 붉은 머리의 기사는 외쳤다.

“텐티아 경.”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짜 위험한 상황에서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텐티아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제 주군의 걱정을 잘라냈다.

“르세나 경!”

“…….”

“그대는 결국 기사가 아니라 행정관이고자 하는가? 답하라!”

“……!”

대치 상황에서 제일 먼저 움직인 건 아몬신도 전사였다.

그는 발렌시아누스에게 느껴지는 용언의 기운과 옛것의 기운을 잘 구별하지 못했고, 텐티아의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감히 세베릭 전하 앞에서 검을…… 아아악!”

아몬신도 전사가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텐티아는 왼손으로 그가 뻗은 손을 잡아채고, 허리를 틀며 힘껏 당겨서 강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동료가 맥없이 날아가는 걸 본 다른 아몬신도 전사들이 변이를 시작했다.

그들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강철 같은 손톱이 자라나고, 갑옷 같은 털가죽이 몸을 덮었다.

텐티아는 마나 블레이드를 검에 두르며 답했다.

붉은 증기 같은 살기가 그녀의 갑옷 관절 마디에서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북부 기사들과 성기사들도 검을 뽑았다.

텐티아는 돌진하는 요새와 같은 그들을 달아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몸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라서, 져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적이 강해서, 그래도 왠지 질 거 같지는 않아서,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어서.

그녀는 기사 무훈시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연하의 주군 앞을 당당하게 막아섰다.

“텐티아 경! 비키시오.”

“나는 죽어도 명예로운 기사로 남지만, 너희는 모두 비겁자로 남을 것이다.”

“그는 그대 같은 기사가 목숨을 바칠 만한 상대가 아니오.”

“모두가 입을 다문다 해도. 너희 스스로는 알고 있겠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모함일 뿐이라는 것!”

“그걸 확인하기 위해……!”

“북부와 황실 사이에 흐르는 막연한 불안감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려 드느냐? 차라리 검을 뽑아 들고 자웅을 가리자 해라!”

“말이 안 통하는구려!”

“이, 비겁한 자들아!”

텐티아와 북부 기사들이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텐티아와 북부 기사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을지언정,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걸음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동자를 용의 눈동자처럼 세로로 바꾸며 말했다.

“세베릭.”

“…….”

“이해합니다.”

“!”

세베릭이 회색 눈을 부릅떴다.

함께 수적과 싸우고, 켈피와 싸우고,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 보고, 서로 목숨을 한 번씩 걸어가며 친구가 되었다 한들, 그들은 결국 욕망이 아니라 신념으로 사는 자들이었다.

세베릭은 발렌시아누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셉텐트리오스 북부 대공은 황형 솔레타라스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사악! 챙! 챙! 츠카악!

둘 사이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고, 강철 주먹이 강철 투구를 후려갈겼다.

북부 기사가 텐티아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텐티아는 늑대인간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그 너머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백발 금안에 하얀 제복, 오만하고 경쾌하고 잔혹한 인상의 사내.

남색 머리에 회색 눈, 진중하고 책임감 넘치며 강인한 인상의 사내.

그 둘의 눈매가 날카로우면서도 피폐하고, 피폐하면서도 날카로운 건 우연이 아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르세나와 이야기가 다 된 행동일 테니, 황실에 항의해서 곡식을 더 받아내는 거래 도구로 쓰리라.

그러니 그는 이제 자신에게 등을 돌려야 했다.

그 책임감 넘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어?”

발렌시아누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남몰래 캐스팅하던 불꽃 마법을 흩었다.

세베릭이 검을 뽑아 들고 난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 * *

세베릭의 검술은 교본 그 자체였다.

정확한 박자로 휘둘러진 검이 텐티아와 얽힌 기사들을 떨어트렸다.

챙!

그는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텐티아의 검을 쳐내는 동시에 그녀의 옆구리를 노리던 한 북부 기사의 망토를 잡아당겨서 난전에서 떨어트렸다.

“대공 전하?”

카드드득!

텐티아와 북부 기사 셋의 검이 얽혔다.

세베릭은 검을 베어 올려 네 검 모두의 균형이 흐트러지게 한 뒤, 어깨, 팔꿈치, 손목에서 회전을 넣어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북부 기사 셋의 검을 아래로 꺾고 밀어내는 동시에, 왼손을 뻗어 텐티아의 흉갑 위를 짧게 끊어쳤다.

지이익!

텐티아가 간판 위에서 몇 걸음 밀려났다.

발렌시아누스는 당황하며 난전에 끼어 들었다.

상황이 돌아가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 죽어라!”

그는 텐티아의 망토를 잡고 늘어지는 늑대인간을 붉게 달군 손으로 지지고, 텐티아에게 태클을 시도하는 성기사를 길게 밀어 차 난전에서 떨어트렸다.

성기사 둘이 달려들어 신성력 타오르는 검을 내리쳤다.

그는 되려 몸을 내밀어 성기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읏!”

“어?”

그들도 대공을 죽일 수는 없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일순 검 끝이 흔들리고, 그때 발렌시아누스는 한 성기사의 턱을 힘껏 차올렸다.

“아니마!”

펑!

바람이 터져 나오는 기세로 얻어맞은 성기사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다른 성기사가 발렌시아누스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세 발의 마탄을 얻어맞고 우그러진 갑옷 부위를 감싸 쥐며 그대로 누워버렸다.

“제가 성기사를 쏘다니……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발렌 님을 위해서라면!”

캉! 퍽! 퍼억!

난전에 끼어든 마지막 북부 기사와 텐티아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주먹과 발차기를 날려댔다.

강철 건틀릿에는 스파이크가 돋아 있었고, 숙련된 기사들은 그곳에도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장검은 근거리에서 주술 회로 새겨진 갑옷을 상대하는 데에 썩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텐티아의 어퍼컷이 북부 기사의 아래턱을 후려치고, 북부 기사의 발차기가 텐티아의 정강이받이를 강타했다.

카드드득!

불꽃이 튀고 철판이 비명을 질렀다.

세베릭이 마지막 북부 기사를 뒤에서 잡고 옆으로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발렌시아누스도 세베릭에게 일권을 날리려던 텐티아의 팔을 붙들었다.

세베릭은 텐티아를 고요히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텐티아 경. 내가 내 친구를 만나도 되겠는가?”

발렌시아누스가 넋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텐티아는 검과 건틀릿에 두른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를 흩으며 한 걸음 물러섰고, 세베릭은 발렌시아누스 앞에 섰다.

그가 마법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외쳤다.

“나, 세베릭 하이니스 셉텐트리오스가 말한다.”

그동안 쌓아 왔던 권위가.

“나는 황형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수적과 싸우고, 켈피와 싸우고, 거인과 싸웠으며, 서로 목숨을 한 번씩 구해준 끝에 친구가 되었다.”

곧 믿음이 되었다.

“우리의 우정은 침식자 따위의 혓바닥에 놀아날 만큼 얕지 않으니, 모두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눈 내리는 밤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도대체……!’

선실 옆에서 르세나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작게 물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세베릭 역시 작게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대공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지금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러다 보면 조금 비겁하고 뻔뻔한 소리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아.”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 * *

황실에서 청은 기사 몇 명이 2인용 안장을 얹은 와이번을 타고 첫 번째 요새 도시로 찾아왔다.

올 때는 거의 한 달이 걸렸지만, 돌아갈 때는 일주일이면 될 것이었다.

발렌시아누스와 세베릭은 그곳의 와이번핏에서 작별 인사를 마쳤다.

“세베릭. 이제 최전선으로 가는 겁니까?”

이곳은 북부의 마지막 요새였고, 최전선까지는 또 수십 일이 걸렸다.

“예. 발렌. 여름에 수도까지 가려면 어서 가서 대형 군락들을 박살 내야겠지요.”

“!”

충성 맹세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발렌이 다음 조운선에도 곡식을 가득 실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부를 다 약탈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 주겠습니다.”

“그러지는 말고요. 그랬다가는 제가 기겁하면서 남하할지도 모릅니다.”

북부 대공과 황형은 장갑을 벗고 악수를 했다.

텐티아와 르세나 역시 악수를 했다.

르세나는 여기저기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배신감에 눈이 돌아간 텐티아에게 결투를 빙자해 맞아 생긴 상처였다.

“르세나 경. 다음에는 행정관이 아니라 기사로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네.”

“그건 전하들께서 하시는 바에 달렸겠지요.”

“그럼 기사로서 만날 수 있겠군.”

발렌시아누스는 세베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회귀 전 가장 치열하고 지독하던 적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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