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18화 (15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8화

(118)

발렌시아누스는 별궁으로 가는 갈림길 앞에서 마차에서 내렸다.

“루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보고 끝내고 오면 몇 시간은 걸릴 거 같으니까.”

“네. 발렌 님.”

“텐티아 경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게. 북부에서 온 선물은 내 알아서 잘 챙겨 주겠네.”

텐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아닙니다. 호위 기사가 되어 어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선물은 내 알아서 잘 챙겨 주겠네. 경이 강해지는 게 내가 강해지는 일인데, 설마 내가 그걸 빼돌리겠나?”

“발렌 님이라면…….”

“단호히 부정하지 못하는 못난 기사를 꾸짖어 주소서.”

발렌시아누스는 크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믿고 들어가.”

본궁의 시종이 하인들을 이끌고 와 진상품 가방을 들었다.

발레시아누스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양손으로 백금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겼다.

마차 창문에 비친 하인들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면서.

시종이 알현실을 통과하지 않고 올라가는 길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시종에게 물었다.

“폐하의 신변에는 별일이 없었나?”

시종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지난 40일간 8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8번? 많이 줄었구나. 다행이다.”

“예. 그런데 그중 6번이 직접 암살자들을 보내온 거였습니다.”

“슬슬 독이 안 먹힌다는 걸 알 만도 하지. 그런데 백금기사단의 방비가 그렇게 허술했느냐?”

“최근에는 주일마다 예배를 다니십니다. 도로로 나갈 때마다 어느 정도 위험에 노출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청은기사단이 와이번을 타고 옥상을 감시하지만, 이제 놈들은 지붕 처마 아래에 숨어있다가 쇠뇌를 쏘고 달려 나오는 판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혀를 찼다.

“쇠뇌 관리가 안 되고 있는가? 수도 안에서 평민이 단검 이상의 무기를 소지하는 건 위법일 텐데.”

“암살자도 합법은 아닙니다. 전하.”

“그도 그렇군. 알았다. 그런데 시종은 몰라도 하인은 황궁 안에서 단검을 찰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지난 40일간 규정이 바뀌었나?”

그곳은 본궁 안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운 한기와 뽀얀 먼지만 소복했다.

“쳐!”

시종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진상품 가방을 내려놓은 하인들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단검과 몸놀림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단검도 좋은 철로 만들었다. 하인이 아니군. 매수나 협박을 한 게 아니라 잠입한 거야. 본궁 시종장이 이걸 몰랐을 거 같지는 않은데, 그까지 한패인 건가? 아니면 하인과 시종을 납치하고 변장한 건가?’

가까이에서 양손을 잡힌 뒤 당황하는 사이에 단검을 몇 번 맞으면, 어지간한 실력자도 쓰러진다.

하인 여섯 중 넷이 달려들었고, 둘은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붙들었다.

푹!

네 하인이 있는 힘껏 단검을 찔러 넣었다.

양쪽 아랫배, 갈비뼈 사이, 명치 등 모두 치명적인 급소였다.

지이익!

그러나 단검은 하얀 제복조차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무슨!”

시종과 하인들이 모두 당황했다.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의 힘이었다.

“놓아라.”

발렌시아누스는 서늘하게 명령했다.

하인들이 계속 칼질을 했지만, 당황한 손끝은 훈련받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놓지 않겠다면 놓게 해줄 수밖에.”

화로처럼 달구는 불꽃.

‘아콰테그’가 순식간에 모루에 올라간 시뻘건 쇠처럼 달아올랐다.

그를 붙잡고 있던 두 하인이 손바닥을 감싸 쥐고 침음성을 흘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유려한 손동작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옷이 문제라는 걸 알아챈 하인이 그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퍼억!

그는 하인의 가랑이 사이를 힘껏 걷어차며 응해주었다.

“너희는 모두 와이번핏으로 가 잘근잘근 씹어 먹힐 것이다!”

도망치는 시종의 다리에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을 한 방 먹여 주고, 하인의 얼굴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얼굴이 얇은 얼음 조각처럼 깨지더니 단단하게 굳힌 밀랍과 화장품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변장이었군.’

저 멀리서 백금 기사와 근위병들이 달려왔다.

* * *

황제의 집무실에서는 온 수도가 내려다보인다.

본궁 자체가 산 중턱에 지어진 건물이고, 집무실은 기둥 높이가 25m인 알현실 바로 위층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려하다기에는 텅 비었고, 검소하다기에는 샹들리에가 찬란한 그 방에 발을 들였다.

“황제 폐하. 제가 돌아왔사옵니다.”

“오는 길에 암살자들을 만났다 들었다. 괜찮은가?”

황제 제이릴리스가 나를 바라보며 낭랑히 웃었다.

볕을 등진 백금발 테두리가 하얗게 달아올랐고, 오밀조밀한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거대한 창문을 등지고 온 수도를 배경 삼아 앉아있는 그녀는 옥좌에 앉아있을 때보다도 더더욱 권위가 느껴졌으니, 나의 황제께서는 오늘도 아름다우셨다.

나는 정중히 답하고, 가볍게 물었다.

“모두 와이번핏으로 보냈사옵니다. 억양을 보니 수도 사람이 아닌 듯하던데, 혹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시옵니까?”

“너무 많아서 문제로다. 안 그래도 짐 역시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아서 피곤하구나. 그대가 그 피곤을 덜어 줄 만한 희소식을 가져왔기를 바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소식을 가져왔다.

제이릴리스가 뱀처럼 웃으며 손짓했다.

“그럼 짐 앞에 앉아 이야기해 보아라. 그대가 어떤 난리를 치르고 왔는지 실로 궁금하구나.”

“충성 맹세를 약속받았사옵니다.”

나는 제일 중요한 사실부터 보고하고, 북부 대공 세베릭의 실력과 성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제이릴리스는 제일 중요한 소식을 먼저 전하는 그 화법에 크게 만족한 듯 보였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전형적인 변경의 대공이었사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짊어진 게 너무 많아 사람 한 명 한 명을 챙길 수 없어 차가워 보이나, 그 짊어진 것 모두가 결국 사람을 위해서인 자로구나.”

“정확하시옵니다.”

“또, 네놈은 결국 시체 수백 구를 돛대마다 매달고 호수를 가로질렀다는 말이냐?”

제이릴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사옵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대담하도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입꼬리가 가볍게 위로 올라 말려가는 걸 보며 그녀가 곤란한 질문을 던지리라 예상했다.

문제는 침묵이 내 예상보다 길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내심 침음성을 흘리고 있자니, 황제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조용히 끝나서 놀랐구나.”

“예?”

“짐은 그대가 곡식값 폭등에 대해 ‘다 내가 한 짓이네’라고 말했다고 한순간 내심 파국을 예상했다. 게다가 세베릭과 선실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는 ‘가장 깊은 곳에서 엇나갔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사옵니다. 허나…….”

“짐은 그대가 세베릭이 시체 폭발에 당해 누덕누덕해지는 걸 기다렸다가 충성 맹세를 약속받을 줄 알았다.”

듣고 보니 그것도 나름 괜찮은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

회귀 전에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황제가 딱딱 끊어지는 동작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추궁하고자 하는 게 아니니 마음 편하게 답하거라. 짐은 그대가 우정 때문에 목숨을 건 게 아니라, 목숨 걸고 우정을 쌓으려 한 거 같구나.”

완벽한 정답이었다.

그대로 숨이 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호의가 우정보다 먼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짐은 도저히 그대가 생면부지의 북부 대공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대가 투철한 희생정신이나 인의에 감명받을 사내는 아니지 않은가?”

내가 가진 호의는 아쉬움에서 비롯되었다.

이 고결하고 강대한 사내와 함께 제이릴리스와 제국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

제이릴리스가 말을 이었다

“결과는 좋다. 그대는 짐이 시킨 대로 충성 맹세를 받아 왔다. 짐은 단지 궁금할 뿐이다. 어느 지점에서 북부 대공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품었는가?”

태양을 등진 제이릴리스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고, 황금색 눈동자만 비인간적으로 빛났다.

나는 짧은 호흡으로 숨을 들이쉬며 답했다.

“북부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인재는 흔치 않사옵니다.”

어지간한 상단주 정도만 되어도 인적자원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낮은 직급에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만, 직급과 작위가 높아질수록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아직 자식이 없는 이상, 북부 대공의 직을 맡을 수 있는 건 내가 보기에는 세베릭뿐이었다.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인재입니다. 그런 그와 단순히 재물로 엮인 이해관계 이상의 것을 쌓으면 폐하께 큰 도움이 될 거 같았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묘하게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계속하라.”

“감동을 만들고 마음에 빚을 지우고 감정을 흔드는 건, 비효율이옵니다.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감정을 흔들 수 있사옵니다.”

또한, 하고 운을 떼며 나는 말을 이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 역시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사옵니다.”

“어느 지점에서인가?”

“그는 소드 마스터이며, 고강한 검객이옵니다. 저 역시 검을 쥔 자로서 막연히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런 강자가 저를 정중히 대하니, 제가 먼저 감명받았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었다.

소드 마스터에 대한 동경은 그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자백하듯 말했다.

“저는 폐하의 은혜를 전하다, 제 재물을 내주는 듯 우쭐한 마음을 가졌사옵니다. 그러나 그는 북부 대공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대신, 많은 사람 앞에서 제게 머리를 숙여 보였습니다.”

“음.”

“강자의 호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게 나약한 사람의 마음이니, 저 역시 다르지 않사옵니다.”

강자의 호의라는 말을 들은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내리쬐는 봄볕이 너무 강해서 일순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여유만만하고 흥미에 차 있었다.

“그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배우는 기분이다. 언제나 당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어.”

“감사하옵니다.”

“짐이 통치에 있어 음모와 계략을 쓰지 않는 이유를 아는가?”

나는 곧바로 답했다.

“쓰지 않고도 통치하실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언젠가 쓸 일이 온다면 그대에게 배운 덕일 것이다.”

“과분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찬란하게 웃었다.

“그대의 뜻, 잘 알았도다. 짐은 친구가 아니라 신하가 필요하지만, 짐의 신하는 친구가 필요하겠지. 이제 진상품 가방을 열어 보거라. 그대의 친구가 그대의 체면을 얼마나 챙겨 주었을지 궁금하구나. ”

* * *

진상품을 전할 때는 그걸 받는 사람뿐이 아니라 그걸 가져가는 사람의 체면도 생각할 때가 많다.

‘네가 왔으니 이 정도 챙겨 준다.’ 같은 논리 구조였다.

그런 면에서 북부 대공 세베릭은 내 체면을 제대로 세워 주었다.

만약 이걸 알현실에서 다른 관료들과 함께 보았다면, 그들 모두 입이 쩍 벌어졌을 것이다.

“짐의 눈에도 찬란해 보이는구나.”

최상급 회색 늑대와 백곰 마수의 모피.

뼈에 은으로 마법진을 새겨 만든, 정령을 부리는 피리.

흔히 ‘빙정’이라고 불리는, 빙하 속에서 캐는 신비한 마석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물약.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는 크고 작은 검들.

“발렌 대공. 보아라. 이 검은 마법검이로구나.”

제이릴리스가 장도 한 자루를 뽑고 가볍게 마나를 흘려넣자 칼날에 서리가 끼고 방 안 온도가 확연히 내려갔다.

“필요한가?”

“제 주특기는 화염 마법이옵니다. 폐하.”

“짐 역시 냉기는 즐기지 않는다. 정령의 가호도 딱히 필요는 없지. 마법검들은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배분하겠다.”

나는 그 사이에서 검 두 자루를 집어 들며 말했다.

“단검 한 쌍과 검 두 자루만 가져가도 되겠사옵니까?”

단검은 마법검이었고, 검은 드워프제였다.

“마음대로 하라. 짐은 이 약들이면 충분하다. 긴 마법검들과 피리만 두고 나머지는 내키는 대로 가져가거라.”

제이릴리스가 고른 건 정령 무기나 마법검, 모피나 보석이 아니라, 의외로 빙정과 그걸로 만든 약들이었다.

그녀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 역시 인간보다 신비에 가까우니 말이 통하는군. 고마울 따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