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9화
(119)
즐거운 진상품 배분 시간이 끝났지만, 그 길로 웃으며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진짜 무거운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이릴리스가 빙정들을 집무실 책상 안에 쏟아 넣으며 말했다.
“침식자가 그대를 정확하게 노린 건 처음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마테오스 때도, 진 때도, 수도원에서도 그랬다.
지금까지 늘 내가 찾거나, 어쩌다 보니 엮이는 식이었지, 그들이 정확하게 나를 쫓아온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충돌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라고 생각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옛것 숭배는 선교사가 없이도 번지지.”
“그렇사옵니다.”
어딘가에서 울리는 정신 파동을 듣거나, 침식자들이 써 놓은 문자를 읽기만 해도 노출이 된다.
건강하고 신실한 신도라면 이겨낼 수도 있겠지만, 유난히 힘든 날을 보냈거나 마음이 약하다면, 옛것은 꿈을 타고 들어와 조금씩 정신을 변질시키고 끝내 몸까지 침식시킨다.
그렇게 침식자가 되면 몸을 유지하기 위해 좋든 싫든 계속 제물을 바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족들을 만나게 된다.
즉, 하나의 뚜렷한 조직이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점조직이 느슨하게 연결되어있는 형태다.
당연히 박멸이 힘들지만, 그만큼 놈들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힘들다.
결국 놈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은 강한 개개인 수준의 사건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번에는 다른 거 같구나. 프로이하이트 후작가에서도 불길한 흔적들이 있었지.”
“예. 후작은 정황상 누나의 부활을 꿈꾸고 침식자 조직과 교류하고 있었사옵니다.”
“알첸베르크에서는 아예 수도원장을 타락시켰고.”
“도르카이시스 백작은 어찌 되었사옵니까?”
그가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안타레스 백작가의 후계자에게 언데드들을 유인했다는 심증이 있었다.
그 백작가 도련님의 침식된 부분을 살리기 위해 수도원장이 침식을 택하게 되었으니, 애초에 침식자들이 도르카이시스 백작부터 엮여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것 때문에 주일마다 대성당에 가서 마테오스를 만나며 조사 상황을 듣고 있는 참이다.”
“제게도 그 내용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이단 심문관이 백작의 도시에 방문해서 올린 보고다. 도르카이시스 백작이 언데드 3천과 침식자 수백을 대대적으로 토벌했고, 그 와중에 침식자를 상대로 심각한 공격을 당했다더구나. 침식이 너무 심해지자 사제에게 정화 받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
나는 그 내막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딸과 가문을 위해서 모든 걸 짊어지고 갔군요.”
“귀족다운 죽음이었으니 거기서 덮기로 했다. 백작령 전체를 아주 깔끔하게도 청소해 놓았더구나.”
“자비로우십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로 끝났으면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백작의 신변은 수십만 영민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다.
백작을 침식자로 끌어들인다면 영지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게 하는 일도 가능했다.
침식자들의 음모가 점점 과감해지고 또 치밀해지는 게 느껴졌다.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정말 앞일은 모르는 일이다. 그대가 목숨 걸고 복부 대공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복부와 황실 간 관계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나는 그 말을 듣고 침음성을 흘렸다.
세베릭이 나를 믿지 않았다면 그대로 복부와 황실 간 관계가 박살 날 뻔했다는 게 다시 실감이 났다.
고작 침식자 세 놈 따위에게 대공 둘이 농락당할 뻔한 거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니 짐이 그대를 믿을 수밖에 없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결과는 내놓지 않는가?”
황제가 의도적으로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하며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점조직으로는 꿈꾸지 못할 거대한 책략들이다. 이제 놈들이 거대한 조직을 이뤘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구나.”
“결코 수도 안에 지부를 만들게 해서는 안 되옵니다. 또한 지방 영주들이 침식되는 걸 특히 경계해야 하겠사옵니다.”
아르고스와 대립했던 홍의주교 바오로안이 했던 말이었다.
지방을 거점으로 침식자들이 번지고 있다고, 세속 영주들을 믿을 수 없다고.
“그대의 말이 옳다. 감시와 일괄된 간섭을 위해서는 결국 또 교회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겠구나.”
제이릴리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말씀만 해주신다면 언제든 성자를 와이번에 태우고 바라시는 곳으로 날아가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었다.
“그래. 짐의 망나니여. 믿음직스럽구나.”
* * *
나는 빙정이 빠진 진상품 가방을 들고 별궁으로 돌아갔다.
제이릴리스가 왜 그 약들을 골랐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감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딱히 그런 걸 먹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어쩌면 연구해서 양산해보려는 건지도 모른다.
제이릴리스는 기사들의 실력을 평균적으로 올리는 일에 몰두했고, 의외로 공공복리에 신경을 썼다.
그녀는 여전히 기사들에게 직접 제국 검술을 가르쳤고, 집광식 가로등을 올해부터 수도에 설치한다.
“돌아오셨어요? 손 닦으시고 쉬세요. 과일 썰어 드릴게요.”
루디가 초록 눈을 반짝이며 살갑게 맞아주었다.
회귀 전에는 기껏 임무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 봐야 나를 반겨주는 이 하나 없었다.
“발렌 전하? 보고는 잘 마치셨습니까?”
텐티아 경이 막 씻은 듯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퇴근하랬더니 별궁 뒤쪽 연무장에서 단련했던 모양이다.
“경도 어지간히도 성실하군.”
그녀는 평소와 달리 품이 넉넉한 평복 차림이었는데, 보기 좋게 살짝 탄 얼굴과 달리 손은 핏줄이 파랗게 비쳐 보이는 하얀색이었다.
아마 투구는 벗어도 건틀릿은 빼는 일이 없어서 그럴 거다.
“크흠. 사실 오늘은 전하만큼이나 전하가 들고 올 가방을 기다렸습니다.”
그녀가 머리카락만큼이나 짙게 얼굴을 붉히며 진실을 토로했다.
“마땅히 그래야지. 호위 기사와 측근들을 배부르게 해주는 건 황족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네.”
나는 과일을 깎아온 루디에게 옆에 앉으라 권하고, 커다란 진상품 가방을 열었다.
“미리 말해주지만 마법검들은 모두 폐하가 가져가셨네.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배분한다고 하시더군.”
텐티아는 다행히도 실망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정말인가?”
“평소 스타일 따라 달라지는 편인데, 저 같은 경우는 하마 전투와 난전을 할 일이 많다 보니, 제가 원할 때 바로바로 마나 블레이드가 뽑혀 나오는 게 중요합니다. 마법검은 아무래도 검신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보니 조금 신경 써야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건 또 몰랐군. 그럼 이건 어떤가? 드워프제 은철장검이라네.”
나는 가방 안에서 장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텐티아 경이 금화를 본 나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립 공방의 검들도 어디서 꿇리지는 않습니다만, 이건 욕심이 안 날 수가 없군요.”
“그렇게 좋은가?”
그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검을 얻을 수 있다면 왼손이나 자식 정도는 내줄 기사들이 줄을 설 겁니다.”
나는 텐티아 경에게 그대로 검을 건네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검을 검집에서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소리가 맑게 울리고 넓적하고 두툼한 칼날이 거울 같은 검 면을 뽐냈다.
가죽을 감은 긴 손잡이와 크로스 가드까지 통짜 은철이었고, 크로스 가드 중앙에 큼지막한 루비가 박혀 있어 텐티아 경과 잘 어울렸다.
불타는 얼음, 화한(火寒)이었다.
“전하.”
텐티아 경이 희열에 찬 표정으로 내 앞에 왼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디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는 탄상을 내질렀다.
나는 검을 눕혀 들고 말했다.
“텐티아 경. 앞으로도 나와 황제 폐하, 제국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예. 전하.”
“충직하게 주군을 섬기고, 신실하게 광명을 수호하고, 정의롭게 약자를 보호하겠는가?”
“예. 전하.”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검은 경의 것이니, 항상 차고 다니며 내 등을 지켜주게나.”
“예. 전하!”
나는 칼날을 조심스럽게 잡고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텐티아 경이 낭만에 한껏 취한 표정으로 ‘화한’의 자루를 쥐었다.
황제를 섬기는 백금기사에서 한낱 망나니의 호위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억하심정이 있을 거다.
늘 헌신해주는 게 고마울 뿐이니, 이렇게라도 갚아줘야지.
루디는 소설 한 권을 읽고 그 후유증에 빠진 듯 실실 웃고 있었다.
“우와…….”
나는 씩 웃으며 루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루디.”
“네, 네?”
“많은 일이 있었고, 앞으로도 많은 일이 있겠지. 내가 일곱 살 때부터 나를 도와주던 네가, 지금도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울 뿐이야.”
“……발렌 님.”
“네게 이런 걸 주고 이런 걸 부탁하게 되는 시대가 야속하지만, 그 시대에 던져진 이상 함께 나아가려 최선을 다할 수밖에.”
“뭐든지…… 시키기만 하세요. 제가 어디까지고 따라갈 테니까요.”
“이 칼을 받아서 네 몸을 지키고, 네 몸을 지켜줘.”
나는 루디에게 한 쌍의 단검을 내밀었다.
날은 두껍지만, 폭이 좁고 뾰족한 단검이었다.
“그건 마법검이야. 최상급 마도구라서 마나를 거의 소모하지도 않아.”
“어떻게 쓰는 건가요?”
“쥔 체로 손잡이에 마나를 불어 넣어 봐.”
루디가 잠시 집중하자, 단검 날을 따라 순식간에 서리와 성에가 끼며 그 길이가 한 뼘 이상 길어졌다.
살아있는 겨울, 생동(生冬)이었다.
“최대 두 뼘까지 늘릴 수 있어.”
원래도 아주 짧은 단검은 아니라서 두 뼘이 늘어나면 거의 한 손 직검 수준의 길이였다.
루디가 양손에 단검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날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해 보였다.
“발렌 님. 너무 가볍고 좋아요. 잘 쓰겠습니다.”
대장선 간판 위에서처럼 난투가 벌어진다면 루디도 근접전에 휘말릴 수 있다.
그때 그녀가 더 좋은 무기를 들고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가죽 갑옷을 주었지만, ‘아콰테그’도 양산되는 대로 사 줄 거다.
“그래.”
텐티아 경이 ‘화한’을 들며 말했다.
“전하도 한 자루 챙기신 거 같군요.”
“그래. 너무 혹사했더니 슬슬 뿌리에 금이 가기 시작해서 말이야. 경의 검보다는 검면이 좁지. 드워프제 흑철검이라네. 이름은 흑루(玄淚) 검은 눈물이야.”
그녀가 흡족하니 웃었다.
“적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할 거 같은 이름이군요.”
그리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했다.
“좋은 무기도 얻었으니 이제 시험해보아야겠지요. 연무장으로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루디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경.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59.”
* * *
나는 세레라지에를 찾아 황립 마도 공방으로 향했다.
넓은 홀에 온갖 시약과 마도서와 종이와 양피지와 잡동사니들을 짊어진 제자들이 낑낑거리며 죽을상을 하고 다녔다.
다들 한 일주일씩은 퇴근을 못 한 몰골이었다.
듣자 하니 세레라지에 때문에 다른 공방주들이 전부 경쟁심과 의욕에 불타서 연구와 양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더니, 슬슬 그 여파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나는 갓 구운 빵과 햄과 치즈를 담은 바구니를 양손 무겁게 들고 중층으로 내려갔다.
세레라지에의 공방에는 고양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중에는 꼬리가 셋 달린 놈도, 머리가 넷 달린 놈도, 발마다 불길을 피워 올리는 놈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거 고양이가 아니라 슬라임이었다.
……대체 뭔 연구를 하던 거야?
“내가 왔다! 빵 받아 가라!”
죽어가던 생도와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머리를 굽신거리며 바구니를 받아 갔다.
안쪽에서 세레라지에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니? 못난 동생이 온 거 같으니까.”
“그런데 왜 반말을 하는가? 내가 훨씬 선배인데.”
“나는 대공이고 너는 백작이잖니? 꼬우면 다음 생에는 황족으로 태어나려무나.”
슬리퍼 끄는 발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나왔다.
긴 남색 생머리에 푸른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 가학적인 웃음을 짓는 청초한 마법사.
“돌아왔구나. 어쩐 일이니. 망나니 동생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 얼굴을 못 봤으니 인사도 하고, 무슨 연구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하고, 붉은 약이랑 푸른 약도 더 받아내고, 같이 마법 거리에 싸고 좋은 마도구 쇼핑도 갈 겸 해서 왔어.”
“그걸 다 하려면 내가 열 명은 있어야겠구나. 그래도 어서 오렴. 마침 잘됐구나. 네가 막아줘야 할 사람이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