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0화
(120)
세레라지에의 반응은 예상외로 온화했다.
바빠 죽겠다며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서 들어오렴. 동생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힘껏 후려쳐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진짜 세레라지에는 어딘가 잡혀 있고, 눈앞의 세레라지에는 비슷한 체형에 그 하인들처럼 밀랍과 화장을 이용한 변장을 한 암살자일지도 몰랐다.
“누나치고는 너무 친절한데.”
나는 약간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공방 안에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안쪽 실험실에서 한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윤기 없는 하얀 머리를 칼같이 기장을 맞춰 단발로 자르고, 붉은 눈과 갈색 피부를 가진 단신의 마법사였다.
그녀는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찼고, 왼손에 나무 의수를 쓰고 있었으며, 암적색 바탕에 노란 무늬가 들어간 붉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파이넬시아.”
외모로만 보면 세레라지에보다 훨씬 어려 보였지만, 그녀는 선대 황제 때부터 황립 마도 공방에서 공방주로 살아온 화염 마법사였다.
다양한 화염계 공격 마법 스크롤을 개발하고 개량해 죽음의 대행자로 이름을 날렸고, 동시에 여러 화염 차단 마법진을 개선에 기사 갑옷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상아탑 유학파였으나 권력욕에 불타 스스로 탑을 나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레라지에와 비슷한 인생을 수십 년쯤 먼저 살았다고 보면 된다.
“누나. 그런데 아까 반말을……?”
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묻자, 세레라지에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반말이지. 나는 대공이지만 파이넬시아는 백작이잖니?”
나는 그녀가 어쩌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겠다.
지난번에 상아탑에서 칠흑학파 원로를 작위로 찍어 누른 뒤로 이렇다.
작위로 난동부리자는 계획을 먼저 제안한 건 나다.
즉, 수십 년 후배가 까마득한 선배 앞에서 반말하는 꼴을 만든 데에는 내 책임도 있다.
“아니…….”
내가 뭐라 하려 하자 세레라지에가 검지를 세워 내 입술 앞을 막았다.
“안 도와줄 거면 입 다물고 있으렴.”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괜찮습니다. 2년 전까지는 대공을 하루에 수십 명씩 가르쳤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나와 세레라지에는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그 수십 명의 대공이 지금 다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꽤 섬뜩한 말이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파이넬시아도 노괴는 노괴였다.
그녀가 붉은 보석 달린 지팡이를 짚으며 웃었다.
“세레라지에 전하. 이제 막 스물을 넘긴 나이에 막대한 성취를 얻으셔 들뜬 마음 이해합니다. 저 역시 화염 파도 마법을 개발했을 때 그랬지요.”
파이넬시아가 얼굴에 어울리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와 영광과 힘. 세상이 내 것 같았습니다. 그전까지 전투용 주류 스크롤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던 선배들에게 공격을 받아 왼팔이 잘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선후배끼리 덕담이나 나누고 있는 줄 알았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왜 세레라지에가 나를 환영했는지 알겠다.
파이넬시아는 소위 ‘꼰대짓’이나 하려 여기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녀는 경고하려 찾아온 거였다.
이곳은 그녀에게 상징적인 연구실일 뿐이고, 그녀의 대형 공방은 황궁 밖에 있다.
그녀는 범위 공격 화염 마법 스크롤로 자리를 잡은 장인이자 상인이기도 하다.
세레라지에가 최근에 개발한 건 ‘전격 확산’ 마법이다.
전격 특유의 강한 공격력과 방어가 힘들다는 장점을 내세워 이미 제이릴리스의 눈에 들었다.
즉, 세레라지에는 파이넬시아에게 있어서 미래의 경쟁자였고, 파이넬시아는 세레라지에를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반쯤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권력자였다.
파이넬시아가 뼈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에 세레라지에의 앞을 등으로 막아설 생각을 하며 마나의 흐름을 주시했다.
그러나 나는 곧이어 한 가지를 더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세레라지에가 협박이나 경고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그녀 역시 제 잘난 맛에 빠져 사는 마법사였다.
“그래. 나도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단다. 결말이 참 인상적이었지.”
“왼팔을 잃은 게 인상적이었다니…….”
“아니.”
세레라지에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
파이넬시아가 흠칫했다.
“결국 선배는, 선배가 개발한 그 화염 마법으로 나잇값 못하는 그 늙은이들을 모두 쓸어 버렸으니까.”
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파이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세레라지에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파이넬시아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었다.
“……벼락같은 성공이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선배 역시, 그 불길이 언제까지나 활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 * *
파이넬시아가 공방을 나섰다.
털썩, 세레라지에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동생아. 커피 좀 주겠니?”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가져오며 말했다.
“괜찮아?”
세레라지에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죽을 거 같구나. 역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만만히 보면 안 될 정도가 아니라 그냥 누나보다 강한 거 같은데?”
“저 나이에 저 얼굴로 나보다 약하면 죽어야지. 실력과 독기 하나는 나도 인정한단다.”
“누나가 황제 폐하 말고 누구를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세레라지에가 옅게 웃었다.
“왜 파이넬시아 백작은 키가 저렇게 작은지 아니?”
그건 회귀 전에도 몰랐다.
“왜?”
“그때 선배들이랑 싸우면서 몸이 너무 많이 타 버렸거든. 주교급 성직자도 못 살릴 수준이었다는구나. 남은 몸 조각을 모아서 혈마법사들이 거의 육체를 재구성하다시피 했다고 한단다.”
혈마법은 살과 근육을 되살리는 데에는 아주 유용하지만, 뼈를 다시 자라게 하는 데에는 약간 약했다.
당장 몸이 숯덩이가 되었으니 일단 살이라도 붙여 놔야 했겠지.
그 상태로 결국 살아남아서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정말 거물 중의 거물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런 거치고 피부는 깨끗하네?”
“신성력 치료도 몇 년간 꾸준히 받았겠지. 돈이야 많은 분이잖니.”
“그런 분이 와서 뭐라 하면 그냥 말이라도 네네, 하면 안 돼?”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었다.
“나는 마법사란다. 자존심 상하느니 죽는 게 낫지.”
“이런 젠장.”
그녀가 제자를 시켜 한쪽 실험실에서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가지고 왔다.
“올 줄 알고 미리 만들어 왔단다.”
나는 잠깐 실례, 하며 그녀의 볼을 콕 찔러 보았다.
말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니?”
“밀랍은 아닌데? 누나 나한테 뭘 잘못한 거 있어? 평소였으면 지금쯤 벼락이 날아왔어야 하는데.”
“부탁할 건 있단다.”
나는 손가락을 떼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뭐든지 들어줄게.”
세레라지에가 의외라는 듯 금은요동을 크게 떴다.
그녀가 뾰족한 손톱 끝으로 내 뺨을 콕 찔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이상하구나. 네가 내 부탁을 그렇게 순순히 들어줄 애가 아닌데.”
그야 내 비룡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마법약 제조자가 누나니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하여간 들어준다니 기꺼이 부탁하겠어. 슬라임의 핵을 최대한 많이 구해주면 좋겠구나.”
“그게 그렇게까지 귀한 시약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슬라임의 핵은 어지간한 마법 시약 상점에서는 다 판다.
“지름 10cm 이상으로.”
“아. 그럼 좀 이야기가 달라지지.”
핵의 지름이 10cm가 넘으려면 슬라임이 4년은 살아야 한다.
모험가 길드 통해서 들어오는 걸로는 수량이 부족하고, 결국 양식을 해야 하는데, 슬라임 따위를 4년씩이나 양식할 양식업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수도의 온갖 음지를 다 꿰뚫고 있는 망나니였다.
“구해 줄 수는 있어. 그런데 지금 당장 필요한 거야?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거야?”
세레라지에가 제자를 시켜 책 한 권을 가져오게 했다.
그건 옛것 관련 마도서였다.
“이 마도서의 사본이 지금 황립 마도 공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마도서란다. 옛것의 물질화와 제어를 다루고 있지.”
“옛것의 물질화와 제어…….”
듣기만 해도 마법사들이 눈을 번쩍번쩍 빛낼 거 같은 주제였다.
“거기에 필요한 시약이라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쓰일 거 같구나. 흑마법사들 중에는 아예 그쪽으로 공방 자체의 노선을 튼 애들도 있거든.”
“수요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그렇지.”
나는 흡족하니 웃었다.
“잘됐네. 알았어. 그럼 이참에 땅값 싸고 투자 많이 받는 거리에 양식업체를 지을게. 내가 주도하면 다들 기겁할 거니까 누나 공방 이름으로 투자할게. 지분 조금만 넘겨주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수도에 그런 데가 남아있니?”
* * *
꽃이 피고, 가로수에 새싹이 돋고, 사람들의 장신구가 화사해지고, 거리마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봄날.
일주일 전, 황실령 의원 선거가 있었다.
“나는 법을 준수하고 신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제국의 안정과 영광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황립 의회 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47번째 솔레타라스, 제이릴리스 폐하와 광명신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창문 너머로 운하의 찰랑이는 물결에 햇살이 부서지는 게 보이는 웅장한 돔 건물.
빈민가 출신 고아 외다리 소녀는 성자와 황제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맹세했다.
의원 코넬.
무소속.
장애인.
16세.
초선.
교활하고도 총명한 인상의 소녀.
설레고도 두려운 첫 번째 일주일이 지났다.
코넬은 자신의 보좌관과 함께 법령을 다듬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빈민가에도 잘 배운 사람들이 꽤 흘러왔다.
특히 배움 거리와 마법 거리 사이의 그 마굴에서 쫓겨 온 사람들은 아주 똑똑했기에 함께 보좌관으로 쓸 수 있었다.
“오늘도 나오기는 나왔군.”
“이게 무슨 소꿉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내 딸하고 비슷한 나이 같은데…….”
“딸? 내 손녀하고 같은 나이라네.”
“그런데 거기도 의원을 뽑을 수 있는 구역인가?”
“꽤 많이 나아졌답니다. 그게 저 애가…… 아, 실례했습니다. 당대표님.”
사방에서 냉소적인 반응만 돌아왔지만, 코넬은 주눅 들지도 오기 부리지도 않았다.
다들 돈이든 힘이든 지식이든 뭐라도 하나 잘난 곳이 있어 올라온 자들이었다.
모두 어깨 너머로 훔쳐서 결국 그녀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보좌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코넬 의원님. 정말 첫 법안을 이걸로 통과시킬 생각이세요?”
“주변을 봐봐.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저 틈에 비굴하게 머리 숙이고 들어가서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 일단 내 쓸모를 증명해야 저들이 손을 내밀 거야.”
“으음.”
“또 이 법은 우리 거리에 꼭 필요하고 저 사람들도 다들 좋아할 거야. 우리 거리 사람 중에는 빈민이나 깡패 때의 생활이나 버릇을 못 버린 사람이 너무 많아. 그걸 어떻게든 내부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해.”
빈민가에서는 너무 흔한 일이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중범죄다.
치안 유지를 위해 처벌을 하기는 해야 하지만, ‘법대로’ 하면 너무 무겁다.
반대로 아예 관련 법이 없는 영역도 있었다.
분명히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피해자가 나오고 있는데, 처벌을 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법은 강자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기사와 병사들은 외적으로부터는 지켜줬지만, 내부의 싸움은 거의 건들지 않았다.
그나마 치안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진간해서는 빈민가나 홍등가 쪽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 내부적으로 규율을 만들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해.”
코넬은 눈을 빛내며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반원형으로 배치된 좌석 중 맨 앞쪽에 앉아 눈을 빛냈다.
선서 후 처음으로 법안을 들고 온 회의였다.
“저것 보게. 저 핏덩이가 뭔가 법안이랍시고 들고 온 모양이군.”
“불쌍해요. 기부해주세요. 이런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제발 우리 얼굴에 먹칠하지만 않으면 좋겠군.”
엄숙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의원들이 끼리끼리 뭉쳐 떠들었다.
의장이 개회하고, 몇 가지 안건이 빠르게 통과되었다.
지난 2년간 문을 닫고 있었기에, 의회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재확인하고 여러 기구와 위원회들을 설치하는 절차였다.
“그럼 발의 시간이 있겠습니다.”
코넬은 곧바로 손을 들었다.
의장이 제발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하는 수 없이 발언권을 주었다.
당도 계파도 의원 친구도 없었기에, 누구도 코넬이 들고 온 법안을 몰랐다.
“자경단법 일부 개정안 발의하겠습니다.”
의원 코넬.
무소속.
장애인.
16세.
초선.
교활하고도 총명한 인상의 소녀.
“수도 거주 인구 급증에 따라, 야경꾼, 치안감, 위병분들께 협력하는 자경단 조직의 설립과 유지가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그녀가 처음 발의한 법안은 복지도, 투자도, 세율도, 반부패도 아니라 자경단법이었다.
“각기 다른 특성과 인구분포를 가진 지부들을 본부가 일괄적으로 통솔하는 현 상황은 너무나 비효율적입니다.”
귀족들이 사는 거리는 밤에도 불이 환하고, 배움의 거리에서는 낮에도 패싸움이 난다.
“이를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현재의 지부 제도를 폐지하고, 자경단 모집 구역과 운영 구역을 재편하는 것을 촉구합니다. 범위는 제출한 자료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장은 기겁하며 자료를 넘겼다.
“!”
[(전략)……이에 따라 자경단 모집 구역을 각 의원 선거구로 한정 짓고, 운영 주체를 지역에……(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