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3화
(123)
발렌시아누스는 눈앞에 솟은 6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큰 벽돌로 쌓은 뒤 회반죽을 깔끔하게 칠한 좋은 건물이었다.
“누나는 마법사잖아. 저 좁은 통로 안에 들어가서 싸우려면 답이 없어.”
“그래서 불을 지르자고?”
그의 파격적인 발언에 세레라지에와 진이 동시에 난색을 표했다.
“다 태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학생회에 이 일을 의뢰한 건물주도 궁정 귀족 나리이신지라.”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도 숨은 쉬어야 할 거 아니야? 일단 정문 출입구를 열고, 연기를 피워서 계속 올려보낼게. 정화 마법도 없는 공기를 만드는 게 아니니까 곧 알아서 다들 기어 나오겠지. 그럼 누나가 전기로 지지고, 진 네가 잡아서 각 아카데미에 넘겨.”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의 처벌권은 각 아카데미 학장에게 있었다.
본래는 대귀족의 자제들이나 오는 곳이 수도 아카데미였고, 당연히 그들은 하나하나가 수틀리면 내전도 불사할 어마어마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사고를 쳐도 아카데미 안에서 덮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제는 그 전통도 희미해지고, 어느 정도 있는 평민들도 다들 오는 곳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특권은 아카데미 학생에게 남아있었다.
올드 스콜라 조직원들이 자퇴를 하는 게 아니라 장기 휴학 중인 이유도 그것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퇴학만 면하면 그만이고, 혹시 퇴학당해도 다른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된다.
가서 아카데미 학생들 간 패싸움에서 이 악물고 활약 몇 번 해주면 그 아카데미에서 다시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놈들 진짜 난전 전문가였는데. 죄다 징집해서 시가전에서 잘 써먹었지.’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며 긴 주문을 마쳤다.
“자욱하게 번지는 불꽃.”
와이번 폭격에 대비한 연막으로 사용할 정도로 많은 연기를 내는 화염계 마법, ‘회색 눈물’이었다.
연기만 나고 불꽃은 안 피어오르는 실패한 불꽃 마법이라서, 아예 연기를 피어오르게 하는 마법으로 개량했다고 한다.
허공에서 주먹 세 개를 뭉친 크기의 불덩이에 일렁이더니, 곧바로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진은 바람 마법을 캐스팅해 피어오르는 연기를 죄다 통제에 넣었다.
세레라지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렌시아누스는 건물 정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쥐었다.
방범 마법이 깔린 게 느껴졌지만, 그는 제 몸을 믿었다.
콰득!
그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문고리가 미믹처럼 튀어나오며 그의 손을 물어뜯었다.
그걸로도 뼈가 부러질 만큼 강력한 위력이었지만, 거기에 대해 문고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전기 충격까지 흘려댔다.
치이이익!
치지지직!
발렌시아누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공격들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목을 털며 문고리를 뜯어내며 정문을 열어젖혔다.
“요즘 애들 화끈했지.”
혼란의 시대이자, 낭만의 시대였다.
‘퇴학당하는 애들은 죄다 징집해다가 헬레나 누나 밑으로 보내버려야겠다. 자기 부하들 생기면 종일 굴릴 사람이니까.’
휘이이잉!
열린 문 안으로 진이 연기를 불어 넣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연기를 후광처럼 두르고 마굴 같은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알림 마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와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계단은 건물 복도 좌우에 있었고, 그는 오른쪽 계단을 택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콜록, 콜록! 야! 불난 거 같은데?”
“알림 마법 소리 안 들리냐? 누가 쳐들어온 거야!”
“일어나! 이 멍청한 새끼들아!”
어제의 숙취와 연초를 즐기고 있던 휴학생들이 삼삼오오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들은 곧바로 후회했는데, 복도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에 물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망할!”
“앞이 안 보여!”
후욱!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쿨럭, 쿨럭.”
방 안 창문은 얼굴 정도만 꺼낼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그나마 큰 복도 창문을 열거나, 아니면 건물 밖으로 나가려 계단으로 향했다.
“그래. 기어 나오는구나.”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던 건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개망나니 발렌시아누스였다.
* * *
“왜, 왜?”
“왜 멈춰? 미친놈아.”
“아니…… 여기에. 대공 전하가.”
“아직도 술이 안 깼…… 으아아악!”
“그, 그 북부 대공을 암살하려고 했다던!”
그들은 소문에 밝았고, 가장 최근에 추가된 악명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백금발에 하얀 제복을 입은 발렌시아누스가 연기를 사신의 망토처럼 두르고 계단을 올랐다.
연기 속에서 번뜩이는 한 쌍의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인간이 아닌 듯한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휴학생들은 잠시 얼굴을 마주 보다 떠올렸다.
“어제 빈민가에서…… 그 불꽃 마법사.”
“……조졌네.”
“으아아악!”
눈이 돌아간 휴학생 하나가 곧바로 ‘전격 화살’을 영창했다.
숙련된 학생다운 속도와 솜씨였다.
“그렇게 나와야지.”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검은 철로 만들어진 보검 ‘흑루’를 뽑았다.
황금빛 찬란한 마나 블레이드가 한 차례 빛나고, ‘전격 화살’이 튕겨 나갔다.
‘좋네. 잘 만들었어.’
잡철로 만들면 마나가 잘 통하지 않았다.
마나가 착착 달라붙고 쭉쭉 스며드는 느낌이 있어야 좋은 검이었는데, ‘흑루’는 확실히 제식 기사검보다도 한 수 위였다.
전격 화살을 캐스팅했던 휴학생이 다시금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막아!”
“젠장!”
“신체 강화 주문 좀 써 줘!”
마법으로 강화된 발차기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흑루’의 자루 아래 달린 달걀만 한 쇳덩이를 활용했다.
빠악! 빠악! 빠악!
무릎 아래나 위, 또는 정강이를 내리찍힌 다리들이 부르르 떨고, 그럼 발렌시아누스는 그 발목을 잡아 계단 아래로 냉큼 끌어당겼다.
우당탕탕! 우당탕!
휴학생 깡패들이 나무 계단을 데굴데굴 두르며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우리가 더 많고, 여기는 피할 데도 없어. 복도 끝에서 주문만 쏴!”
그들은 역시 난전의 전문가들다웠다.
황족의 등장이라는 초기의 혼란이 가라앉자마자 침착함을 되찾고 조직으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학생들이 복도에 진을 치고 영창했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불꽃 화살’이, ‘바람 주먹’이, ‘충격 전격’이, 발을 묶는 ‘수렁늪’이 날아들었다.
흑마법사도 여럿 있는지 ‘그림자 묶기’나 ‘결막염’, ‘도깨비불’, ‘이명’, ‘환시’, ‘붉은 두드러기’, ‘환각통’ 같은 저주도 심심찮게 보였고.
희귀한 파괴술사가 뭐 이렇게 많은지 ‘힘의 창’이나 ‘염사 칼날’, ‘염동 산탄’도 여럿 보였다.
노랗고, 파랗고, 빨갛고, 보라보라한 빛줄기들이 날아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하얗게 웃으며 나아갔다.
피시식!
치이이익!
색색의 주문들이 그의 몸에 맞고 그대로 흩어졌다.
텅, 텅!
“뭐, 뭐야.”
“망할!”
조금 강한 주문도 그를 잠시 멈칫하게 하는 게 그만이었다.
천재 마법사 세레라지에가 나름 마음먹고 쏜 주문도 버텨낸 그였다.
날고 기다고 해 봐야 결국 취업 못 한 떨거지 깡패들이 그의 마법 저항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몇몇이 대지 계열 주문으로 발을 묶으려 하거나, 추가로 주문을 퍼붓거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발렌시아누스가 40년쯤 더 많이 겪어본 일들이었다.
“자. 놀아보자.”
그는 뛰어오르며 대지 계열 주문을 피했다.
단검을 든 놈 여럿이 앞뒤에서 달려들었다.
위, 아래층에 있던 놈들이 계단으로 내려온 거였다.
그들은 몸에 신체 강화 주문을, 단검에 전격 부여 주문을 걸어 놓았다.
이에 발렌시아누스는 순간적으로 철문을 왈칵 열며 대응했다.
“아악!”
졸지에 정강이로 문을 걷어찬 놈이 그대로 복도 바닥을 구르고, 방 안에 숨어 있다 막 튀어나오려 했던 놈이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그는 놈의 멱살을 달군 손으로 잡아 동료들에게 던지고, 날을 눕힌 ‘흑루’로 놈들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아악!”
“찔러!”
“칼이 안 박히는데?”
똥철로 만든 단검을 비늘 돋은 손아귀로 부러트리고.
“미친! 칼을 맨손으로 부러트려?”
발등을 밟고 팔꿈치로 턱을 후리고.
“아니마!”
출력을 조정한 바람 신발을 이용해 놈들의 가랑이 사이를 사정없이 올려찼다.
“다 같이 조져!”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조금 인원이 몰린다 싶으면 과감하게 지져 버렸다.
우당탕!
후열에 진을 치고 있던 올드 스콜라 조직원들은 다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불꽃이여, 내 손에 깃들어…….”
“바람이시여!”
“흔들리며 피어나는…….”
하지만 다급하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눈앞의 동료들이 박살 나는 걸 보면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연기는 점점 더 자욱해지고만 있었다.
“바람, 켈룩! 콜록!”
“눈은 침침. 쿨럭! 에취!”
“저주를 너한테 걸었……! 쿨럭!”
용찬을 한 발렌시아누스는 불과 연기에 거의 면역이 되었지만, 올드 스콜라 조직원들은 아니었다.
“못 참겠다!”
“아악!”
그들은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복도 창문을 열어젖히고 신선한 공기를 탐하며 기침을 해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런 그들의 등을 한 번씩 떠밀어 주었다.
“아아악!”
쿵, 쿵, 철푸덕!
3층에서 올드 스콜라 조직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예 싸우지도 않고 곧바로 1층으로 뛰쳐 나오는 놈들도 여럿이었다.
세레라지에는 지팡이를 땅에 내리치며 새침하게 웃었다.
“역시 내 동생이로구나. 이런 꼴보기 싫은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잖니.”
번쩍!
진은 떨어진 조직원들을 묶으며 말했다.
“칭찬이십니까?”
“칭찬으로 들으면 칭찬이고, 욕으로 들으면 욕이란다.”
진은 그 긴 생머리와 금은 요동에 떠오른 잔망스러운 눈웃음,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 참 닮은 거 같다고.
* * *
악명을 날리던 휴학생 폭력 조직.
‘올드 스콜라’는 공식적으로 토벌되었다.
진은 학생회 멤버들을 불러 그들 대부분을 칭칭 묶어 각 아카데미로 보냈고, 일을 의뢰한 궁정 귀족은 학생회에 약간의 기부금을, 진 개인에게는 더 많은 기부금을 보냈다.
연기를 빼려 문을 다 열어 놓은 건물, 발렌시아누스는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돈 될 만한 물건들을 챙겼다.
“누나. 이거 시약 아니야?”
“고급 유황과 천둥새의 깃털이라. 꽤 괜찮은 거구나. 잘도 알아봤네. 이리 주렴.”
“돈주머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역시 같은 돈벌레로구나. 생각이 거기서 거기네.”
“고상한 마법사님? 그런데 왜 손바닥을 이리로 내밀고 있는 겁니까?”
“으흠. ……음. 이건 괜찮구나.”
그러던 와중 세레라지에는 괜찮은 화염 마도서 몇 권을 건졌다.
“얼마나 좋은데?”
아주 희귀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정식 출판이 된 교과서 같은 마도서도 아니었다.
“딱 아카데미 수준에서 미치도록 탐낼 만한 마도서란다. 실용적이고 실전적이지.”
발렌시아누스는 방을 박박 뒤져서 거의 모든 돈주머니들을 압수했다.
때로는 방 하나에서 둘 이상이 나올 때도 있어서 더더욱 치밀하게 수색했다.
진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자. 절반은 네 거다. 가서 사생아들이랑 회식해.”
그의 얼굴에 곧바로 봄꽃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래. 너도 회장 되어 보니까 알겠지? 네 밑에서 네 말 따르는 애들이 다 네가 먹여 살려야 할 애들이다.”
발렌시아누스가 그 웃음을 보며 늙은이처럼 웃었다.
진은 일순 그에게서 기사 출신이라던 검술 학과 노교수의 그림자를 보았다.
“왜 그래?”
발렌시아누스가 나른하지만 서늘하게 물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진은 긴장감을 털어내며 답했다.
“전하가 여기 온 건 이 녀석들을 잡아들이려는 게 아니라, 무언가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저 다섯 명, 아니. 여섯 명 모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습니까?”
어디에선가 본 듯한 마법사 여섯이 1층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세레라지에와 발렌시아누스는 진의 물음에 잠시 얼굴을 마주 보고, 별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남색 고깔모자를 쓴 금은 요동의 새침한 마법사와 백금발을 뒤로 넘긴 황금색 눈의 망나니.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와중에 큰 복도 창문을 등지고 앉은 이복 남매는 썩 아름다웠다.
“동생아. 네가 말하렴.”
“그래. 진. 이 거리에 시약 공방 같은 거 여럿 있지?”
배움의 거리라 통칭하고 있지만, 그곳은 의원 선거 구역으로만 따지면 몇 개가 합쳐진 규모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 공방주 중에 의원도 한 명 있을 거고.”
“네. 그렇습니다.”
“불러올 수 있어?”
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학생 표가 제일 중요한 선거구에서, 인망과 무력을 모두 가진 학생회장은 의원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네. 마르쿠스 의원님에게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하면 될까요?”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레라지에 대공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 그래야 알아들을 거야. 이 앞 커피 하우스로 불러줘. 오늘 수고했고.”
“네. 전하.”
진은 빠져야 할 순간을 알았다.
그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학생회 소속 사생아들을 휘몰아쳐 여섯 깡패들을 질질 끌고 현장을 떠났다.
* * *
“왔네.”
“그래.”
커피 하우스에 사내 하나와 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곰 같은 덩치에 고급 정장을 입고 진한 수염을 기른 부르주아 의원, 마르쿠스였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키가 그의 절반이나 될 소녀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윤기 없는 하얀 머리에 붉은 눈, 커피 같은 갈색 피부를 가진 대마법사.
파이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