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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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40년의 경험상 이런 대화는 어디 조용한 고급 주점이 아니라, 배움의 거리 근처 시끄러운 커피 하우스에서 하는 게 제일 나았다.
“이번에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북부 대공 죽이려고 한 거 들었냐?”
“이 주문을 음각할 때는 이 술식을 추가하는 게 더 안정적이지.”
“졸업하면 결혼하고 싶은데, 나 졸업할 수 있을까?”
“최근 통과된 자경단 법안, 너 그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까 학생회에서 ‘올드 스콜라’ 애들 다 끌고 가는 거 봤어?”
혈기 왕성한 학생들이 소문, 공부, 진로, 시사 등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야기를 꺼내도 다 저 소음에 묻혀버리니 도청 마법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발렌 전하. 바쁜 사람 불러 놓고 이리 기다리시게 하시면 안 됩니다.”
파이넬시아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텐티아 경의 눈이 피같이 붉은색이라면, 파이넬시아의 눈은 불같이 붉은색이었다.
“파이넬시아 백작. 그렇게 바쁘다면서 내 공방에 찾아올 시간은 어떻게 냈니?”
그녀와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이 이 테이블에 한 명 더 앉아있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색이 다른 두 눈을 빛내며, 새침한 얼굴로 독설을 퍼붓는 천재 마법사.
“먼 후배가 같은 실수를 하려 하고 있으니, 선배로서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세레라지에 전하.”
“실수라고 하기에는 그걸로 얻은 게 너무 많지 않니? 선배.”
둘의 눈동자 사이에서 불꽃이 튈 거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나는 둘 사이에 가볍게 끼어들며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파이넬시아. 한 명만 더 오면 되네. 마르쿠스 의원이 보면 좋아할 얼굴이야. 기다려 주게나. 어쩌면 그대도 그 애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으니. ……아, 마침 오는군.”
탁. 탁. 탁.
커피하우스 문이 닫히고, 지팡이 소리가 났다.
적갈색 칼단발 머리에 영악하고도 총명한 인상의 최연소 의원, 코넬이었다.
코넬은 들어오자마자 마르쿠스 의원과 마주 보고 앉았다.
세레라지에는 파이넬시아와 마주보고 앉았고, 나는 테이블 끝에 앉아서 중재자처럼 굴었다.
물론 매우 한쪽으로 치우쳐진 판정을 내릴 중재자였다.
하지만 나 말고 마법 공방과 의회와 재개발을 총망라해서, 각 분야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천칭의 여신처럼 굴었다.
그녀 역시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걸 생각하면 어찌어찌 우겨볼 만도 했다.
“자.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거 같군.”
두 마법사와 두 의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칭호를 받은 젊은 노인, 화염 마법사 파이넬시아.
배움의 거리 북쪽을 선거구로 삼은 공방주이자 의원, 마르쿠스.
희대의 천재, 세레라지에.
최연소 의원, 코넬.
나는 그들의 면면을 한 번씩 확인했다.
솔레타라온의 높으신 분들이라 불리기 충분한 이들이었다.
“세레라지에 누나? 시작해도 좋을 거 같아.”
“그래, 동생아. 선배님?”
그녀가 파이넬시아를 바라보며 서늘히 웃었다.
“후배가 가설 하나 세워 왔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입은 웃고 있었지만, 파란색과 노란색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소설이 아니라 가설이기를 바랍니다. 전하.”
파이넬시아는 문자 그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어린 외양에 어울리는 ‘나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언뜻 보면 세레라지에가 어린애를 괴롭히는 거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세레라지에는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을 대했다.
“전격은 공격 용도의 마법 중 여러모로 효율적이지만, 범위 공격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지금까지 강자를 저격하는 용도로만 사용해왔잖니.”
“그렇지. 후배.”
“그런데 내가 개발한 확산 마법진 덕에 이제 그 효율적인 전격을 범위 공격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단다.”
파이넬시아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 보였다.
“선배는 범위 공격용 화염 마법 스크롤과 화염 마법 마도구로 성공한 마법사잖니?”
세레라지에는 갑옷을 파고드는 전격처럼 스며들었다.
“그래서 선배는 나한테 그 시장을 빼앗기고 매출에 타격이 올까 불안해했겠지.”
* * *
파이넬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외견에 어울리지 않는 능청스러운 태도였다.
“재미있는 가설이구나.”
“선배만 불안을 느끼는 건 아니었어. 선배가 공방을 둔 이 거리의 의원도 불안해했지.”
세레라지에와 파이넬시아가 동시에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마르쿠스는 그 큰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몸을 떨었다.
“그는 의원인 동시에 공장주잖니. 싼 땅값과 인력을 무기로 여러 공방들을 자기 거리로 흡수하고 있는 새 의원이 눈에 거슬렸을 거야.”
세레라지에가 싫은 파이넬시아.
코넬이 싫은 마르쿠스.
“선배는 이 거리에서 고용도 창출하고, 투자도 하고 있지. 둘은 여러모로 면식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단다. 그래서 둘이 손잡고 나랑 코넬을 엿 먹이기로 한 거잖니?”
파이넬시아가 그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수십 년간 황립 마도 공방에서 살아남은 노괴의 표정이었다.
“증거는 있습니까? 전하?”
“당연하잖니. 나는 내 동생과 달리 이길 수도 없는 승부를 걸지 않는단다.”
나도 그런데.
내가 그렇게 보이나?
다 계산하고 행동하는 거였는데.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다.
세레라지에가 마도서 몇 권을 꺼냈다.
“이거 양산되는 마도서 아니잖니? 확인해보니까 직계 사본이던데, 원본은 선배가 학생 때 쓴 거더라?”
마도서는 원본이 있고, 그 원본을 베낀 사본이 있고, 그걸 베낀 양산본이 있다.
처음으로 지식을 담는 행위 그 자체로도 마나가 깃들기에, 원본에 가까울수록 좋은 마도서이다.
아무리 학생용이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 마도서도 사본이 몇 권이나 나돌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걸 왜 그 ‘올드 스콜라’인지 뭔지 하는 깡패들이 가지고 있었을까 궁금해지잖니.”
“!”
마르쿠스 의원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굴렀다.
파이넬시아가 혀를 찼다.
세레라지에가 두 의원을 바라보며 웃었다.
“며칠 전에 코넬 의원이 자경단법을 개정했지. 그게 옛 빈민가에서나 자경단이지, 이런 곳에서는 다 깡패 새끼들 사병으로 부리겠다는 거잖니.”
“어어.”
“너도 그렇게까지 좋은 반응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구나. 이미 수족처럼 부리는 학생 출신 깡패들이 많아서 굳이 법까지 고칠 필요 없었는데, 다른 의원도 사병을 가지게 되니까 배 아팠던 거 아니니?”
내가 얻을 건 없는데, 남들이 얻는 건 있다.
상대 경쟁의 관점에서 보면 큰 손해였다.
“저는…….”
마르쿠스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코넬이 아, 하며 짧게 탄식했다.
어지간한 코넬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세레라지에가 서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둘이 머리 맞대고 나랑 코넬을 엿 먹이겠다 결심한 다음에, 마르쿠스가 데리고 있던 깡패 새끼들을 선배가 마도서 주고 고용한 거잖니.”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의분으로 이글거렸다.
“선배. 이럴 수가 있니? 우리는 의원이 아니라 고상한 마법사잖니?”
두 의원의 얼굴이 썩어들어갔지만, 두 마법사는 괘념치 않았다.
그야 남 욕이니까.
“연구비와 보호 때문에 세속 군주에게 머리를 숙일지언정,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었니? 다른 선배들의 추잡한 견제 때문에 그런 몸이 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존경스러운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왜?”
차라리 파이넬시아가 세레라지에에게 싸우자고 했다면, 세레라지에가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는 허무한 세속의 권력 놀이를 지양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한다. 선배도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니? 세월 따위가 그 열정도 다 태워버린 거니?”
“전하.”
처음으로 파이넬시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세레라지에가 벼락처럼 일갈했다.
“구름 위에서 살던 나를 왜 다시 이 추잡한 진흙탕으로 끌어 내린 거니! 내 동생이나 하고 다닐 말을 왜 내가 하게 만드는 거니!”
마침표를 찍는 듯한 말이었다.
* * *
파이넬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품속에는 고급 파이프를 꺼낸 뒤, 연초를 채우고 마도구로 불을 붙였다.
나는 그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수십 년간 황립 마도 공방에서 살아남은 노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기를 내뱉은 그녀가 악마가 깃든 소녀처럼 웃었다.
“전하. 공방에 사고가 난 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마르쿠스와 그렇게 손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
세레라지에가 눈에 핏발을 세웠다.
“저는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그는 고작 4년짜리 의원일 뿐입니다.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손을 잡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격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천칭의 추를 기울였다.
세레라지에가 잘 말하기는 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그녀는 언쟁에 맞는 인재가 아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라는 말이 있다.
억지에는 억지로, 궤변에는 궤변으로, 부정부패에는 부정부패로.
나는 자랑스럽게도 그 모든 분야에서 정점을 찍어 본 적이 있었다.
“격은 맞지 않아도,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은 있지.”
나는 목소리를 착 깔고 엄지와 검지를 붙여 원을 만들어 보였다.
두 의원과 두 마법사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의원에게 받을 게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마르쿠스와 파이넬시아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연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제이릴리스 앞에서 아주 많이 짓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서는 이런 능력보다 검술과 마법을 성실하게 연마하고 싶었건만.
이번 생에서도 거짓으로 쌓아 올린 게 진실을 압도할 때가 많아서.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황실 지원금 리베이트.”
“!”
“업계 관행으로 15%로 정해져 있다고 알고 있네.”
파이넬시아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파이프를 쥔 손도 함께 떨렸다.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파이넬시아. 지금까지 이 거리에 공방을 꽤 많이 짓지 않았나?”
리베이트라는 게 있다.
지불한 금액의 일부를 이후에 돌려주는 제도다.
문제는 낼 때는 길드 돈이나 상단 돈, 황실 돈으로 내고, 돌려받을 때는 그 직원이나 행정관 개인이 받아서 횡령한다는 거다.
아예 뇌물처럼 쓰일 때도 많다.
황실에서 행사가 있다고 했을 때, 장식에 쓰일 꽃이 1천 송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이때 업무를 맡은 행정관이 금화 10닢에 1천 송이를 파는 꽃집이 아니라, 일부러 15닢에 1천 송이를 파는 꽃집에 간다.
거기서 5닢 더 비싼 값에 꽃을 사고, 꽃집 주인은 행정관에게 3닢 정도를 되돌려 준다.
꽃집 주인도 돈을 벌었고, 행정관도 돈을 벌었다.
이런 놈들을 잡아다 목을 치는 게 내 일이었다.
두 번째, 황실 지원금.
마법 공방에서 전쟁용 스크롤이나 마도구만 만드는 건 아니다.
방금 파이넬시아가 사용한 ‘라이터’ 같은 민간용 마도구 시장 규모도 만만치 않고, 만들기도 훨씬 쉽다.
당연히 마법사들은 민간용 마도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황실은 ‘전시에 전쟁용 마도구를 집중적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대형 공방을 짓는 마법사에 지원금을 준다.
“분명히 그대도 막대한 지원금을 받아 가며 공방을 지었겠지.”
이때 코넬이 세레라지에에게 해 주었듯, 그 거리의 의원이나 건축 길드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준다.
그들이 아무리 비싸게 불러도 황실 지원금 끼고 들어오는 마법사들은 척척 내준다.
처음에는 연구만 하다 세상 물정을 몰랐겠지만, 언젠가는 리베이트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돌려받는다.
“위에서 받을 때는 공방 지으라고 받은 예산이지만, 돌려받으면 내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거든.”
이거 회귀 전에 많이 잡았고, 또 그만큼 많이 했다.
나는 옛 추억에 젖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달콤했을 거야. 세상의 비밀을 깨우친 거 같고. 거액이 한 번에 들어오는 기분은 아주 짜릿하거든. 어두운 비밀을 공유하는 동업자하고만 느낄 수 있는 우정도 있지.”
세레라지에가 얼굴을 굳히고, 코넬이 이를 악물었다.
파이넬시아 역시 함께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한번 뇌물을 받으면 계속 받아야 하네. 의원에게 우리 거리의 공방들이 빠져나갈 거 같다는 말을 들으면 원래 쳐다보지도 않았을 깡패 새끼들에게 직계 사본 마도서를 내어줘야 하지.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약점을 잡힌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나는 마르쿠스를 향해 눈을 돌렸다.
처음으로 그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