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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25화 (104/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5화

(125)

코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마테오스 못지않은 의분이 타오르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그래.”

“저도 어지간히 타협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타협해야 했던 겁니까?”

코넬의 어깨가 처졌지만, 지팡이를 든 손에는 오히려 힘이 들어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고등재판소에 고소장을 제출하겠습니다.”

코넬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젠장.

마르쿠스가 혀를 차고, 파이넬시아가 코넬보다도 어린아이의 얼굴로 뻔뻔히 말했다.

“해보렴.”

코넬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백작 각하.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시는 겁니까?”

고등재판소는 귀족이라고 해서 봐주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지방 대귀족들이 황실에 들고 온 법적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위해 설립한 기관이었다.

그곳에 들고 오는 소송은 기본 규모부터 급이 달랐다.

인구 300만짜리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이 둘로 갈라져 한 10년씩 싸우고, 그동안 각자 정략결혼을 맺은 탓에 후계와 상속 서열이 꼬일 대로 꼬였는데, 지금 계승서열 1, 2, 3, 4위가 다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문을 쪼개고 싶은데, 영지를 어떻게 나눠야 하느냐?

이런 문제들을 법적으로 해결해주는 만큼, 그곳의 법관들은 모두 이름 높은 궁정 귀족 가문들이었으며, 궁무대신 할머니가 그랬듯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아무리 파이넬시아가 백작이고 이름 높은 마법사라지만, 위세로 어찌해볼 수는 없는 곳이었다.

“깨끗하게 산 척하지 말려무나. 죄인의 딸아.”

파이넬시아가 불을 내뿜듯 일갈했다.

코넬이 얼굴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하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파이넬시아가 그걸 조롱하며 가학적으로 웃었다.

“그 거리에서 죄인 아닌 자가 있을 거 같더냐?”

“!”

유도 신문이었다.

역시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노괴였다.

“빈민가를 통일하고 정화하는 과정에서 너도 피를 흘렸겠지. 의원들이 괜히 서로를 법으로 찌르지 않는 게 아니란다.”

모두가 서로의 치부를 알기에 한번 붙으면 폭로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같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상대가 법을 이야기하는 순간 깡패들을 보내서 입을 영원히 닫게 하려 한다.

기사들은 애초에 외적하고‘만’ 싸우고, 치안감들은 권력과 엮이지 않은 그냥 깡패들 견제하기도 벅차다.

나는 코넬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코넬. 마르쿠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지만, 내가 끊도록 하지.”

마르쿠스가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이런 자리에서 모여서 해결하는 게 아니란다. 기억해두거라. 너도 이제 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야.”

법을 만드는 사람이면 법을 더 잘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 라고 말하기에는, 나나 코넬이나 무법지대를 너무 많이 겪어본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리베이트 건으로 재소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째서입니까?”

파이넬시아와 마르쿠스가 말했다,

“관례란다.”

“많아야 벌금으로 금화 3닢 정도 나오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받았으니까. 네가 줬잖아.”

“이 미친 동생아! 손 떼고 있었으면서 언제 챙긴 거니?”

퍽!

금은 요동을 부릅뜬 세레라지에가 지팡이 끝에 달린 보석으로 내 머리를 후려갈겼다.

“아니, 발렌 님! 그걸!”

코넬이 낭패감에 찬 표정으로 항의했다.

마르쿠스와 파이넬시아가 일순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의원이 되겠구나.”

“이미 너보다 훌륭한 의원 같은데.”

코넬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홀가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리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특유의 눈치로 내가 일을 더 벌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코넬이나 마르쿠스나 나나 벌려 놓은 걸 수습하고 또 벌리는 게 관성인 삶이다.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죄가 생기고, 그럼 소중한 사람들이 죽기에 계속 권력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해악을 적당히 쳐내는 건 황족으로서의 내 일이다.

방금 말했듯, ‘적당히’ 쳐내야 한다.

오늘 ‘올드 스콜라’ 조직을 잡았지만, 그들을 고용하고 있던 마르쿠스는 건들지 않은 거처럼.

그를 찍어내느니, 알 거 다 아는 그를 이용해서 세상을 좋게 바꾸는 게 낫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코넬이 영악하게 웃으며 제 아버지뻘이나 될 사내에게 말했다.

“마르쿠스 의원님. 우리 여기서 끝냅시다. 빈민가 꼬라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마굴을 간신히 청소해서 사람 살 만한 데로 만들어 놨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깽판을 놓으시면 어떡합니까?”

마르쿠스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경쟁자를 보는 눈빛으로 답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코넬 의원. 그럼 내 거리 공방들이 이전하고 싶다고 하거나 분점을 차리려 할 때, 내게 언질만 줄 수 있나? 나도 그들을 설득할 기회는 필요해.”

그 설득이 말일지 주먹일지는 몰랐다.

코넬 역시 그걸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배움의 거리 북쪽이 아니라 옛 빈민가의 의원이었다.

1초간 고민한 그녀가 답했다.

“네.”

내가 제대로 가르친 건지, 알아서 잘 큰 건지 모르겠다.

아마 후자일 거다.

* * *

동맹은 성사하기보다 지키기가 어려웠다.

코넬이 답하기 무섭게, 파이넬시아가 마르쿠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뭘 멋대로 제안하는 거냐?”

마르쿠스가 수염 거친 얼굴에 비굴한 미소를 띠었다.

“백작 각하. 이 정도로 선을 그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공 전하만 두 명이 끼어 있습니다. 게다가 저분은 그…… 명성 높은 발렌시아누스 전하 아닙니까?”

‘악명 높은’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저도 백작 각하 매출 떨어지는 게 걱정됩니다. 제 지분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쪽 공방을 계속 부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나도 적당히 타협하라는 거냐?”

파이넬시아가 불같은 눈을 번뜩였다.

마르쿠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세레라지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 모든 반응을 이해했다.

의원들의 일은 타협이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마법사에게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쿠스와 코넬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백작님. 이건 마법이 아니잖습니까?”

“각하. 의원들 끼고 재미 보셨으면, 의원들 세상 돌아가는 법칙도 존중해 주셔야지요.”

얼굴로도 파이넬시아와 별 차이 안 나는 소녀의 말이었다.

파이넬시아는 섬뜩하게 웃으며 코넬의 눈을 바라보았다.

백 살은 더 살았을 노괴의 압박감에, 코넬이 숨을 들이켰다.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확 깨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네.”

그러나 파이넬시아 역시 선을 아는 자였다.

내가 일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눈치챈 거 같았다.

“그래. 어린 의원아. 네가 맞다. 마법 세상이 있고 의원 세상이 있지. 양쪽 다 다른 방법으로 책임을 지는 거고.”

코넬은 가볍게 눈을 내리깔며 물러섰다.

더는 따지고 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하루빨리 공사를 재개하고 현금이 들어오도록 해야 했다.

투자는 왕창 받고, 또 하고 있는데, 현금 환수가 안 되니 내심 미쳐버릴 지경일 거다.

배상은 바라지도 않고, 더는 난동부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걸로도 감지덕지겠지.

……나중에 뭐라도 적당히 뜯어내서 가져다줘야겠다.

나는 몸을 돌려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해타산으로 조율할 수 있는 의원 쪽 일은 끝났다.

남은 건 감정과 자존심과 힘의 논리가 뒤섞여 돌아가는 마법사 쪽 일이었다.

그리고 내 경험상 이쪽이 훨씬 더 어려웠다.

“누나?”

세레라지에는 내 머리를 후려친 뒤로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거 같았다.

남색 생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너희는 참 어렵게도 사는구나.”

두 의원이 침음성과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대단한 거 같아. 나는 하늘의 이치는 알아도, 사람은 모르겠잖니. 사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의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마법사들은 오락가락하는 사람 마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선배도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했잖니. 공방 안에서 눈치 주는 다른 선배들에게 불벼락을 끼얹으면서. 그러다 몸이 망가지고 팔과 눈을 잃었으면서도 끝내 타협하지는 않은, 마법사다운 마법사.”

그 말을 들은 파이넬시아가 어린 얼굴로 나 같은 표정을 지었다.

후회와 추억이 뒤섞인 아릿한 미소.

세레라지에는 그녀를 보며 새침한 얼굴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잖니. 진리와 타협하고 세속의 부를 택한 끝에서 더러운 뒷공작으로 내 뺨을 친 배신자인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법사다움인지 말이야.”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기에, 마법사들은 논리와 합리를 중요시 여겼고, 그렇기에 효율적이고 실리적이었다.

해 봤는데 되면, 세상이 뭐라 하든 그냥 해버리는 거다.

그 논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지간한 나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마법이 발현되면 진리에 통하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거다.

인체 실험으로 발현에 성공했다면, 그게 진리로 통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우리를 욕해? 이 무지몽매한 새끼들.

검은 성자 마테오스는 이 수도원 종탑 아래 모든 걸 불태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이게 신의 뜻이 맞는지 고민했다.

이때 고민하지 않는 게 마법사였다.

파이넬시아처럼 살면 안 될 거 같았는데, 잘살고 있네?

그럼 내 생각이 틀렸던 거구나.

이게 마법사의 논리였다.

아마 지금 세레라지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 나는 도저히 인정 못 할 거 같잖니.”

그래서 목소리가 저렇게 갈라지는 걸 거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전하.”

“선배가 그 길에서 뭘 찾았는지 확인해봐야겠어.”

“책으로 말입니까?”

“아니. 결투로.”

파이넬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도 다리도 없는 저와 결투를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었다.

“그럼 사과하지 그러니? 나한테 틀린 길을 들이밀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걸.”

파이넬시아가 불꽃 같은 탐욕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내일. 워록 연무장. 지팡이 제외한 공격용 마도구 없이.”

* * *

전투마법사, 통칭 워록들의 공방은 나무뿌리가 아니라 나무줄기 안에 있었다.

지면으로부터 30m 정도 떨어진 넓은 연무장은 넓이가 50m 정도의 원형이었다.

당연히 바닥과 벽 모두 나무였지만, 이 나무는 불에도 타지 않고 산에도 녹지 않았다.

발광하는 꽃을 피우는 덩굴이 여기저기서 자라 등불 역할을 했다.

세레라지에는 남색 긴 생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안감이 붉은 고깔모자를 쓰고, 역시 안감이 붉은 로브를 둘렀다.

모자와 로브와 모두 겉감은 머리카락과 비슷한 남색이었는데, 몇 가지 방어 마법이 걸린 고급품이었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훨씬 더 값비싼 물건도 구할 수 있는 부자이나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세레라지에는 여전히 그 로브와 모자를 애용했다.

그녀의 눈 같은 노란 보석이 달린 지팡이처럼, 그녀의 로브와 모자 역시 옛 스승 게스타르테가 선물해준 마도구였다.

스승은 마법사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다.

세레라지에 역시 마법사, 하면 게스타르테를 떠올렸다.

그 번뜩이던 붉은 번개를.

어둠을 밝히며 나아가던 섬광을.

“누나. 이길 자신 있어? 경력이 많이 차이 나는 건 사실이잖아.”

발렌시아누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결투 재판은 최대한 비슷한 실력의 상대끼리 싸우도록 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싸울 때 남자는 구덩이 안에 들어가 상체만 빼놓고 있어야 했고, 한쪽이 싸움에 능하다면 그는 더 짧은 무기를 쓰거나 갑옷을 벗어야 했다.

조건이 동등한 상황에서 이긴 쪽이 신의 선택을 받은 거라는 논리였다.

“걱정하지 말렴. 너를 따라다닌 덕에 기사 없이 싸우는 건 익숙하잖니.”

“누나가 지면 골치 아파져. 누나가 만든 마도구의 실전성을 의심당할 수도 있다고. 그럼 내가 투자한 돈도 날아가고, 코넬이랑 나는 투자금 메꾸느라 고생 좀 하게 될 거야.”

관객이 구름처럼 모이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소문을 낼 건 분명했다.

적어도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됐구나. 너는 고생을 더 해야 한단다. 그런 걸 걱정하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게 분명하잖니?”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답하고 연무장 한가운데로 나갔다.

그녀는 돈이 아니라 신념을 걸고 있었다.

“전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파이넬시아는 제자에게 결투용 흑요석 지팡이를 받아들며 물었다.

윤기 없는 하얀 머리를 칼같이 기장을 맞춰 단발로 자르고, 불꽃 같은 붉은 눈과 갈색 피부를 가진 단신의 마법사.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찼고, 왼손에 나무 의수를 쓰고 있었으며, 암적색 바탕에 노란 무늬가 들어간 붉은 로브를 입었다.

어린아이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수십 년간 황궁 마도 공방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 온 거물의 품격이 느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화르르르!

파지지직!

그 순간 불꽃과 전격이 맹렬하게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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