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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27화 (10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7화

(127)

황제는 잎이 넓은 식물들이 여럿 있는 공기 맑은 방에서 볕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쪽과 서쪽의 통유리창 너머로 만개한 꽃들이 보이고, 잎 넓은 식물들이 높은 천장까지 자란 탓에 꼭 숲속에 온 거 같았다.

그녀는 관절 반지와 신발을 벗고, 드레스 자락도 걷어 올려서 하얀 다리와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온다면 황제가 애첩으로 데려온 엘프족과 마주친 거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귀부인들은 피부가 타는 걸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제 몸이 불에 지져도 안 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가끔은 건강미를 보이고 싶어 하는 거 같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찬물에 젖은 물수건으로 가리고, 긴 의자에 누워있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여유를 즐기는 게 그녀가 권력을 재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물수건 끝에서 물 몇 방울이 떨어져 백금발을 적셨다.

그 옆에는 악사 하나가 서서 바이올린으로 왈츠 곡을 연주했는데, 얼굴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곡조에는 여유가 어려 있었다.

나는 그 프로 의식에 경의를 표하며 제이릴리스 옆에 섰다.

“그대여. 기껏 휴가를 주었더니 밖에서 사고를 친 건가?”

황제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서늘하고도 예리했다.

이번에는 진짜 사고를 친 게 맞았다.

궁정 마법사들과 의원들의 부정부패에 한쪽 발을 푹 담갔으니까.

나는 그녀가 눈을 가린 걸 알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제이릴리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기껏 눈을 가리고 있는데, 이참에 인상이라도 찌푸려 보지 그런가? 휴가를 줬으면서 왜 또 불러 가지고 들볶는지 짜증도 내 보고 말이야.”

나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폐하. 소신은 오래오래 살고 싶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었다.

“기껍구나. 앉아라.”

“예?”

“옆에 의자가 하나 더 있지 않은가? 펴고 앉으라는 말이다.”

나는 제이릴리스가 시키는 대로 긴 의자를 펴고 앉았다.

그녀는 눈을 물수건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 그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 등을 꼿꼿하게 펴고 주먹을 쥐어 무릎 위에 올리고 앞을 보는 게 아니라, 힘을 빼고 편안하게 눕는 걸 떠올리지 않는가?”

“저는 아니옵니다.”

“구두도 벗고, 소매 단추와 셔츠 단추도 풀고, 허리띠도 느슨하게 하라. 황제의 명령이니라.”

약간 그 목소리에 짜증이 어리려 하자, 나는 황급히 명령을 이행했다.

시녀 하나가 다가와 물수건으로 눈을 가려 주었다.

“몸에 힘을 빼고, 고요히 숨을 내쉬거라.”

왈츠 곡이 아득하게 들려 오는 가운데, 선선하고 촉촉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햇살은 따듯했고, 몸은 편안했다.

옆에 누워있는 게 대륙 제일의 강자만 아니었다면 깜빡 잠들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벨 오라버니.’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나는 황제의 옆 긴 의자가 아니라 군데군데 토끼풀 군락이 있는 잔디밭에 앉아있었다.

저 아래서 작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가 흔들리고, 또래의 이복 남매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샌드웜이 튀어나와…… 이게 아닌데?

* * *

“발렌 대공?”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나는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깜빡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 게 아니라, 깜빡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예, 예! 폐하. 송구하옵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고…….”

어느새 다시 관절 반지를 모두 끼고 머리카락을 정돈한 제이릴리스가 내 옆에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진 머리카락은 찬란하게 달아오르고, 민소매 아래 드러낸 하얀 팔은 얇고 희면서도 잔근육이 잡혀 있고, 두 눈동자는 가학적인 웃음이 어려 반짝거리니, 나의 황제께서는 오늘도 아름다우셨다.

“괜찮다. 이곳은 처음이지 않은가?”

“예. 그렇사옵니다.”

“이 온실에 있는 식물들은 모두 엘프족에 진상 받은 거다. 태양과 달의 기운을 받아 우리에게 전달하지.”

회귀 전에도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서 몰랐던 이야기였다.

“우리의 몸속에도 엘프의 피가 짙게 흐르고 있다.”

엘프는 그 능력과 외모 덕에 많은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통혼하려 했다.

“그래서 이 방에서 쉬고 일어나면 몸과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거다.”

“아.”

확실히 머릿속이 무척이나 맑았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아주 깊이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제이릴리스가 실없이 웃으며 물었다.

“대공은 이제 고작 열여덟이면서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가?”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희는 쌍둥이옵니다.”

나는 허리띠를 재빠르게 채우며 답했다.

“그래. 쌍둥이잖은가? 짐은 이렇다 할 걱정 없이 사는데 왜 그대는 그렇게 죽어가느냐는 말이다.”

“아.”

회귀 때문이겠지.

미래를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급함과 압박감이 생긴다.

미래를 바꾸면 바꿀수록 내가 아는 것과 달라지기에, 조급함과 압박감은 그대로지만 정보는 사라진다.

내가 제대로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그대는 무죄무치이니라. 짐의 혈족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짐뿐이지. 짐이 따지지 않은 일에 그대가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쓸 필요는 없도다.”

내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제이릴리스가 내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절대로 떼어낼 수 없을 듯 강인했다.

“이건 그대에게 힘을 북돋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짐이 그대에게 누군가를 베라 명했는데, 그대가 그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거나, 짐의 명령이 온당치 못하다 여겨 그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보았다.

나는 오랜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감각을 느끼며 답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러니 그대는 모든 손익과 선악과 호불호의 판단을 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짐에게만 책임을 지는 무죄무치란 그런 뜻이니라.”

나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눈만 깜빡였다.

제이릴리스가 서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날카로운 하얀 이빨이 번뜩였다.

“파이넬시아 백작을 불러 민수용 마도구 대량 생산을 허가했다. 그녀는 한동안 그쪽에 전념하며 시간을 벌고, 개인 연구를 다시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는구나.”

“!”

“또한 마르쿠스 의원과 파이넬시아 백작이 황실에 약간의 성의를 표했다.”

황제가 아릿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빼어난 정보력으로 모든 걸 제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건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하고 싶지도 않구나. 신 같은 괴물들과 싸울 계획을 짜고 추진하기도 벅찬데, 알량한 권력 다툼 따위에는 눈도 마음도 가지 않는다.”

이해했다.

회귀 전의 나조차 가끔 이 세상이 너무 연약해 보였는데, 그녀는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짐은 이 자리에 앉아 모래알 같은 신민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그대가 감당치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짐이 나서 적당히 처리할 터이니, 그대는 그대 일에 집중하거라.”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죄 없는 자를 다치지 않게 하려 죄 있는 자를 풀어 주었다. 다섯 종족의 통치자이자 지배자로서 짐은 그것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

그녀가 생각보다도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숨이 멎을 거 같았다.

생각해보니 파이넬시아를 이미 만났다고 했다.

파이넬시아를 부른 건지 파이넬시아가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내막을 들었겠지.

공방들이 필요한 의원과 질투심에 불타는 마법사가 빈민가 깡패 두목 출신 의원과 엮인 일을.

“짐은 정의와 안정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시대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와 달리, 오늘의 안정은 천 년 뒤에도 안정이지 않은가?”

언제나 신민들이 별걱정 하지 않고 생업에 종사하게 해 주는 황제가 명군이라 칭송받았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일을 맺었고, 짐이 그 매듭을 태워 정리했다.”

내가 파이넬시아와 마르쿠스를 그대로 놓아 주었다는 사실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 거 같았다.

“그 자리를 지켜 온 자들도 인재이니. 더는 마음 쓰지 말고, 흔들지 마라.”

내가 수적 두목을 잡았을 때 세베릭과 르세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망극하옵니다.”

망나니인 나는 머리 숙여 인사했고, 폭군 제이릴리스는 내 어깨를 놓아주었다.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대공. 한 가지만 더 말하지.”

“예. 폐하.”

“리베이트는 달콤했는가?”

“!”

눈알이 튀어나오고 아래턱이 빠질 거 같았다.

“고문직 월급으로 살라고는 안 하겠다. 적당히 해 먹거라.”

* * *

나는 세레라지에와 함께 아카데미 옆 맙법 거리를 걸으며 마도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 거야.”

“그러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로만 보인단다.”

“1번. 이 정도가 ‘적당히’니 앞으로도 이 정도로만 해 먹어라. 2번. 슬슬 짐의 선을 넘으려 하니 자중하거라. 누나가 보기에는 어느 쪽일 거 같아?”

세레라지에가 한 가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모르겠구나. 애초에 내게 그런 걸 물어서 무슨 대답을 들으려는 거니? 나는 사람 마음 같은 거 모른단다.”

나는 당황을 넘어 황당한 기분으로 물었다.

“방금은 한 가지로만 해석된다며? 왜 이렇게 오락가락해? 진리를 쫓는 마법사라면 일관성이 있어야지.”

“조용히 하렴. 그냥 네가 두 가지로 해석된다길래 부정하고 싶어서 말해 본 거란다.”

“천재 마법사라는 인간들이 다 이러니까 교회에서 욕을 먹지. 왜 이래?”

“며칠 전에 파이넬시아 선배의 마음과 욕망을 이해한 탓에 짜증이 난단다. 역시 사람 같은 거 관찰하는 게 아니었어.”

파이넬시아 선배 운운하면서 왜 나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건지는 모르겠고, 왜 혀를 차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들어가 보자. 역장 마도구를 팔 거 같구나.”

마법사는 기사나 방어 마도구 없이는 공격에 너무 취약해진다.

돈도 많은 그녀는 이참에 하나 사기로 했고, 나는 겸사겸사 빌붙어볼 생각에 내심 웃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와서 우리에게 인사했다.

가게 안은 신비해 보이려고 대충 어질러놓은 거 같았고, 주인일 마법사 역시 썩 실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흉내라니. 별 희한한 복장을 다 따라 하고 있네.’라고 중얼거리는 걸 얼핏 들었다.

세레라지에가 한쪽에 걸린 목걸이 같은 마도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끈에 손바닥만 하게 만든 복잡한 톱니바퀴들과 고리가 걸려있는 모양이었다.

“역장 맞니?”

가게 주인이 왜 반말이냐? 라고 따지고 싶은 눈빛으로 우리를 보며 답했다.

“예. 3서클까지도 막아 줍니다.”

“시험해봐도 되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라지에는 역장 목걸이를 내 목에 걸었다.

“누나. 잠깐만……!”

세 걸음 물러선 그녀가 새침하게 웃고, 무영창 전격이 내 몸에 쇄도했다.

번쩍!

아무런 말도 없이 마법을 발동시키는 걸 본 주인이 입을 쩍 벌렸다.

동시에 목걸이가 빛나더니 반투명한 푸른 보호막이 만들어져 내 몸을 감쌌다.

와장창!

보호막은 전격에 맞은 직후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내가 찬 목걸이의 톱니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내 말에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처음에 역장이 만들어질 줄도 몰랐단다.”

“그럼 처음부터 설마 역장 시험해 본다는 핑계로 나를 무영창으로 지질 생각이었어?”

세레라지에가 색이 다른 두 눈을 빛내며 답했다.

“왜 아니겠니?”

세상.

가게 주인은 옥신각신하는 우리를 보며 황급히 놀란 표정을 거두었다.

아직도 무영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같았다.

“아니. 이걸 망가트리시면 어떡합니까? 역장이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금화 80닢도 넘는단 말입니다. 이미 망가트리셨으니 사셔야 합니다.”

제대로 만든 역장은 금화 800닢도 한다.

이건 아니었다.

“누나. 방금 몇 서클로 쐈어?”

“2서클이란다.”

가게 주인이 움찔했다.

나는 손아귀 힘으로 역장 부품을 뜯어내고 안쪽 마법 회로를 확인했다.

은으로 새긴 회로도가 아주 낙서 같았다.

“주인장. 이걸 금화 80닢에 팔겠다고? 80대 맞을래?”

내가 목소리를 내리깔자 주인이 카운터 안쪽에서 달려 나왔다.

“아이고 손님. 그게 제가 원래 전격 방어 역장 전문 마법사가 아니라, 해독 역장 전문 마법사라서…….”

그때 가게 문이 왈칵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인영들이 쳐들어왔다.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해독 역장 전문가가 어쩌고 어째? 목을 비틀거리기 전에 돈 다시 내놔!”

“자네들?”

그들은 적가면의 부하인 가드들이었다.

“우리 누님이 네놈이 만든 싸구려 역장 때문에 중독당하셨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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