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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28화 (10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8화

(128)

검은 정장을 입은 소드 유저급 가드들이 삼류 사기꾼 마법사를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나는 흡족하니 웃다 표정을 굳히며 한 가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가?”

가드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종이 가면 안 쓴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거 같았다.

나는 가게 안에 있던 적당한 천을 찢어 얼굴을 가렸다.

가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지배인께서 VIP를 찾으셨습니다. 저희는 잘 모르는 일이라서…….”

나는 세레라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나. 미안. 나 가봐야 할 거 같아.”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으며 답했다.

“미안하다니. 마법사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 필요 없단다. 가서 해야 할 일을 하렴.”

“다음에 또 나올까? 역장을 사기는 사야 할 거 아니야.”

“그때는 상아탑으로 가자꾸나. 네 건 하늘이 무너져도 계산 안 해 줄 거니까 혹시 물건을 고르는 일 외에 새까만 속셈이 있었다면 포기하렴.”

나는 고개를 연극적으로 푹 숙이며 말했다.

“……루디 줄 생각이었는데.”

“나를 너 같은 망나니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왜 선물을 남의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거니? 그리고 왜 내가 매몰찬 짓이라고 한 것처럼 구는 거니?”

나는 옅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먼저 들어가. 칼 든 미친놈들 조심…… 아. 자네. 혹시 황궁 앞까지만 마차 타고 같이 가줄 수 있겠나?”

“예. 알겠습니다.”

가드 하나를 같이 마차에 태우고 세레라지에를 황궁으로 보냈다.

원래 도시에는 깡패와 건달들이 넘쳐나는지라 어지간한 부촌이 아니면 치안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도 마차를 잡아타고 가드들과 함께 홍등가로 출발했다.

적가면, 희망 카지노의 현 지배인이자 솔레타라온 홍등가의 거물.

회귀 전 삶에서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던 괜찮은 인연.

한때 거대한 암흑가 조직의 하수인이었지만, 하수인에서 주인이 되고 싶어 나와 손을 잡았고, 흑철기사단을 통해 암흑가 조직을 일소하고 그 자리를 손에 넣었다.

바라는 건 돈 벌고 돈 쓸 자유.

빈민가만큼이나 이런저런 문제가 많이 일어났던 홍등가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관리자.

그녀는 희망 카지노 위층 한 호텔 방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에 붉은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왠지 웃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적가면. 무슨 일로 나를 찾았지.”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상이 맞았다.

가면 너머 냉정하던 눈은 어울리지 않게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목소리 역시 평소보다 훨씬 높고 길게 늘어졌다.

마치 약이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거 같았다.

……약은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것 외에도 약간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 같기도 했지만, 일단은 척 봐도 약이었다.

나는 주변의 간부들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목소리에 절로 짜증이 어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한 장신의 간부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답했다.

“적가면 지배인님이 조직의 하수인일 때, 조직과 거래하던 바깥 세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다시 거래하자고 하던가?”

“예. 거래를 재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 품목은 약이고?”

“아닙니다.”

나는 당시 마약은 홍등가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망가진 세레라지에가 한 은퇴한 연금술사를 족쳐서 만들게 했었지.

“그럼 뭐지?”

“다양한 환각 효과가 있는 연초입니다.”

“그게 약이잖아!”

따로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말리기만 해도 어지간한 가공 마약보다 독한 풀들이 많았다.

그게 이 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다시 온 수도의 할 일 없는 깡패놈들이 날뛰기 시작하리라.

간신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 옛 빈민가에도 악영향을 줄 거고.

내 눈빛이 점점 흉흉해지는 걸 느꼈는지, 마법 거리에서 나와 마주쳤던 간부가 부연 설명을 했다.

“적가면 지배인님은 그쪽 손님과의 만남에서도 연초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 마도구를 샀습니다. 그게 불량이라서 이렇게 중독당했지만요. 결코 VIP께 한 약속을 가볍게 여긴 게 아닙니다.”

그래.

장사하려면 만나는 봐야지.

“지금은 대화가 안 될 거 같군. 내일 다시 오겠……!”

그때 나는 그 이상한 기운의 정체를 알아챘다.

작년에 적가면과 함께 침식 연초를 피우던 한 음악쟁이를 잡았던 게 기억났다.

“망할.”

나는 다급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검보라색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기도들이 놀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제 불러라. 이거 중독만 된 게 아니라 침식이야.”

“예?”

“그 바깥 조직이라는 놈들 정체가 몹시 궁금해지는군.”

* * *

교회는 홍등가를 죄악의 소굴이라 부르며 싫어했지만, 홍등가의 금화와 은화는 좋아했다.

사제의 정화를 받은 적가면은 곧바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VIP. 추태를 보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쓰지 말도록. 그보다 그 바깥 세력이란 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저도 이번이 첫 접촉입니다. 제가 조직의 하수인일 때도 몇 번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연초 밀매상들인 거 같기는 한데…… 제가 뭐에 당했는지 알고 나니 그뿐일 거 같지는 않습니다.”

대외적인 신분이 연초 밀매상이라는 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진짜 정체가 침식자 세력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연초는 교회가 독점해서 판매하는 물품인데, 품질 관리는 잘하지만, 이윤을 수십 배로 남겨 먹었다.

물론 교회는 그 돈으로 빈민 구호를 하고, 연초 시장을 민간에만 맡겨 두면 지금보다 훨씬 중독성 높은 연초들을 팔아 댈 게 뻔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가격이 가격이고, 자신의 기호를 약점처럼 잡혀서 달라는 대로 줘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은 고까워서라도 밀수 연초를 찾았으며, 신실한 신자들도 내심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즉, 연초 밀매상을 자칭하면 교회와 영주에게 정체를 숨겨야 하는 핑계를 댈 수 있는 동시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려져도 큰 위험이 없었다.

돈도 많이 버니 조직 운영비도 충당될 거고.

“그들이 그때 그 연초를 판 건가? 그 악사 놈이 피웠던 연초.”

“음…… 정신을 약하게 만들어 몽롱한 꿈의 틈으로 옛것들을 접하게 한다. 네. 그 연초가 딱 맞는 거 같습니다.”

나는 짧게 탄식하며 물었다.

“잡을 수는 없었나? 아니. 다시 오면 잡을 수 있겠나?”

적가면이 가드들을 바라보고, 가드들이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호위를 단단히 두르고 약속 장소에 나갔지만, 솔직히 말해 저부터 얼어붙어서 덜덜 떨고만 있었습니다.”

“얼굴을 기억하나?”

“수도사 같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위쪽이 납작하고 높았습니다.”

나는 알첸베르크 수도원에서 보았던 그 침식자를 떠올렸다.

비슷한 복식, 같은 후드.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었다.

“적가면. 그놈은 침식자다. 그것도 꽤 큰 옛것 교단 소속이야.”

“!”

가면 너머로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꽤, 라고 하시면?”

“후작급 대귀족과 접촉해 협상할 정도다. 너희가 어떻게 해볼 상대는 아니야. 그 자리에서 계약까지 맺었나?”

그녀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내 선에서 적당히 해결해줄 일이 아니다. 기사들과 교회의 도움도 필요해.”

적가면이 잠시 침묵했다.

“그랬다가는 놈들이 다시 이곳을 찾아올 겁니다. 제가 밀고했다는 사실을 모를 놈들이 아니니까요. 저도 살아야 합니다. 저희를 살려주실 방도가 있으십니까?”

나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 협력자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건 충성을 얻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너희도 현장에서 잡힌 가련한 피해자로 만들어주겠다. 대신 ‘희망’은 문을 닫아야 해. 그 정도는 되어야 놈들도 믿을 테니.”

그녀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새 이름을 생각해놓겠습니다.”

역시 말을 잘 알아듣는 파트너였다.

“거래 약속을 잡아놔라.”

* * *

집무실은 오늘도 횅했고, 거대한 샹들리에만 은은하고 쓸쓸한 빛을 뿌렸다.

“폐하.”

나는 해가 진 다음에도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가련한 나의 황제에게 보고를 마쳤다.

“……하여, 제가 보기에는 침식자 놈들이 다시 수도에 뿌리를 내리려 하는 듯하옵니다.”

그녀는 내가 오기 전에 모 백작 간의 영지전을 허락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고, 내가 와서 침식자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 서류를 밀어버렸다.

드르륵, 제이릴리스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숄을 두르고 있었는데, 볼록 튀어나온 앙증맞은 어깨뼈가 도드라진 어깨에서 살기가 망토처럼 드리워졌다.

황궁은 고지대에 있었고, 온 수도가 다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제국 제일의 대도시를 밝히는 가로등 빛을 보며 말했다.

그녀가 직접 개량해 수도에 설치한 마도구 가로등이었다.

“지난번에 지하수로에서 대토벌을 벌인 이후로는 처음인가?”

“예. 사생아들과 란체아 등의 황족들이 침식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조직적인 움직임은 처음이옵니다.”

“밀수 연초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그 목소리는 얼핏 담담한 거 같기도 했다.

“교회의 연초는 품질이 뛰어나지만, 맛과 향이 다양하지 않아 애연가들에게 외면받사옵니다. 반대로 밀매꾼들은 향이 풍성하고 다양한 고급 연초부터, 교회 연초보다 품질은 약간 낮지만, 가격은 3분의 1도 안 되는 일반 연초까지 다루옵니다.”

“길구나.”

하지만 그는 그 낭랑한 목소리 아래 깔려 요동치는 깊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규모가 허가 연초 시장의 절반은 되는 거 같사옵니다.”

밀수라는 걸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양이었다.

“그 시장에 침식 연초가 풀리기 시작하면 수도 전체에 난리가 나겠지.”

“예. 그렇사옵니다.”

“이미 밀수 시장이 만들어졌으니 검문 좀 강화한다고 사라질 일도 아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등을 보인 채로 읊조렸다.

“결국 이번에도 둘 다 해야 하겠구나. 그대는 또 오명을 뒤집어쓰겠지.”

“잘못 들었사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밖은 어둡고 안은 밝으니, 제이릴리스의 표정이 유리창에 비쳤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일그러진 얼굴도 아니었다.

침식자에 대한 분노와 나에 대한 기대감, 군주의 책임감과 다가올 싸움에 대한 고양감이 섞여 있었다.

처연함이 아주 잠시 비쳤다가 사라지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짐은 검문을 강화하고 치안감들과 야경꾼들을 더 고용하겠다. 또한 바르바토스 경에게 이번 일을 맡기고, 교회에도 도움을 요청하겠다.”

“예. 폐하.”

“그대는 재발 방지와 시장 교란, 잠식에 집중하라. 밀매꾼들을 안쪽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방식은 일임하겠노라.”

그녀의 목소리가 은근히 달아올랐다.

유리에 비친 얼굴에도 미소 하나만 남았다.

“맡겨만 주시옵소서. 감히 폐하의 도시에 기어들어 온 걸 엉엉 울며 후회하게 해주겠사옵니다.”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경계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 * *

루디가 붉은 등 걸린 거리를 여기저기 바라보았다.

“제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기가 발렌 님이 드나들던 ‘희망’인가요?”

“그래. 희망 넘치는 곳이지.”

막 한 사내가 가드들에게 질질 끌려 나와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내 돈! 내 돈!”

“카드 숨겼으면 원래 손목 자르는 거 모릅니까? 사지 멀쩡히 나온 걸 다행으로 아시오.”

루디가 녹색 눈을 빛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희망이 넘쳐 보여요.”

“내가 미안하다.”

입구에서 루디에게 가면을 씌워 주고, 나 역시 가면을 썼다.

“여기서는 발렌 님이라고 부르지 마.”

“네. 발…… 앗!”

가면을 쓰고 시녀복을 입은 그녀는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아 더더욱 어울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VIP실로 향하니, 마주치는 모든 가드가 내게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했다.

“적가면은?”

“안에 계십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2m도 넘는 장신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 검은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

“바르바토스 경? 왜 여기에?”

“폐하께서 발, 아니. VIP와 함께 움직여 보는 걸 권하시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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