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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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하리만큼 화려한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그때 네 목을 효수하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탈세, 살인 청부, 마약 밀매. 다 잡아들였는데 어떻게 너만 빠져나갔지?”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부하들 노후는 어찌 책임져 주시려는 겁니까? 드릴 때 챙겨 놓으십시오!”
“착각하지 마라. 충분히 잘 챙겨주고 있다. 네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경계할 뿐이다.”
붉은 여우 가면을 쓰고 검은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인과, 검은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거인 같은 사내였다.
홍등가의 지배자 적가면은 가면을 쓰고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재주를 부렸고.
‘흑철’ 기사단장이자 치안총감을 휘하로 쥔 기사, 바르바토스 경은 적가면을 당장 와이번핏으로 보내지 못해 한탄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바르바토스 경이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 올리는 인사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습니다. 황형께서 이 더러운 악의 구렁텅이를 쉽게 드나드시니, 제국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옵니다.”
그는 회귀 전 ‘폭군의 철퇴’라 불릴 정도로 황실에 충직한 기사 중의 기사였고, 지금도 그때만큼 충직했다.
적가면이 나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VIP!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바르바토스 경께서 분명히 전부 다 무혐의로 결론 난 일을 다시 들먹이고 있습니다.”
“네가 무혐의라니 정의의 여신께서 비웃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바르바토스 경은 ‘흑철’ 기사단장으로서 치안총감을 휘하에 두고 있었고, 홍등가 토벌 작전을 총지휘했다.
그가 보면, 적가면은 분명 다 그놈이 그놈일 홍등가 지배인 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안 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그녀만 결백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토벌 작전을 어찌 알고 마약과 살인 청부, 수상한 유물 등 모든 증거를 파쇄한 대악질로만 보이는 거다.
그녀를 도와야 하는 이 상황이 무척 황당하고 허탈하겠지.
그러나 그에게는 무척 유감스럽게도, 그 작전을 알려준 게 나였다.
나는 적가면에게 힘과 정보를 주는 대신, 결국 언제든지 다시 고이고 썩을 홍등가를 자정할 의무를 주었다.
따라서, 오늘 나는 여기서 적가면 편이었다.
“바르바토스 경. 정의로운 기사이자 치안총감의 상급자가 되어, 법관들과 치안감들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바르바토스 경이 일순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당장 나를 잡아 제이릴리스 앞에 끌고 가고 싶다는 듯 몸을 떨었다.
적가면이 그를 놀리는 듯한 발걸음으로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르바토스 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의 주머니를 금화와 은화로 꽉꽉 채워 놓은 게 그녀입니까?”
진득한 살기가 방 안에 흘렀다.
제이릴리스의 살기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면, 바르바토스의 살기는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적가면은 마나를 다루지 못했고, 일순 그녀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역시 침음성을 흘리며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지배인!”
가드들이 몰려왔지만, 방 안의 상황을 보고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바르바토스는 소드 마스터의 벽에 부딪힌 기사였다.
갑자기 이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면, 그는 한 손으로 천장을 바치고 반대 손으로 나를 부축해서 나갈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살기를 줄줄 흘려대고 있으니, 아무리 용병 출신이라 해도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거짓말처럼 살기가 걷혔다.
* * *
바르바토스 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가 거둔 게 아니라 누군가 밀어낸 거였다.
“바르바토스 경. 아무리 홍등가의 지배인이라 해도, 기사로서 여인을 겁박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들어본 목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검은 수도사 후드와 인식 저하 주문이 새겨진 치렁치렁한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하오나.”
바르바토스 경이 드물게 주눅 든 모습을 보였다.
그는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신실한 신자이기도 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후드를 벗었다.
훤칠한 키에 검은 곱슬머리와 검은 눈동자,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듯 차가운 인상과 이마에 각인된 성흔.
화형선고자, 의분을 품은 신의 철퇴.
기적을 일으킨 검은 성자 마테오스였다.
“게다가 그녀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덕을 쌓았으니, 더더욱 겁박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죄가 있다면…….”
그가 한 손을 뻗어 적가면을 일으켜 세웠다.
적가면은 그 깊은 눈, 진한 눈썹과 콧날을 보고 안 그래도 붉은 가면을 더더욱 붉혔다.
“고통 없이 빠르게 화형 시켜야겠지요.”
“예?!”
“성자님?!”
적가면과 나는 동시에 당황했다.
화형이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처형법이라는 건 둘째치고, 왜 갑자기 저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마테오스는 알첸베르크 수도원 비 내리던 밤에 분명히 자비에 입각한 기적을 일으켰다.
당연히 회귀 전보다 유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게 유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화내면서 태웠고, 지금은 웃으면서 태우니까.
“연초는 세상이 다 아는 교회의 독점 거래 상품이고, 홍등가가 밀무역에 끼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홍등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카지노 지배인인 그대가 모른다면 무능 아니면 거짓이겠지요.”
아.
“침식자 문제고 황제 폐하의 공문이라 오기는 왔습니다만, 지배인 그대를 반겨 주기는 어렵습니다.”
성자로서는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군.
“쓰러진 당신을 일으켜 준 건 마테오스란 한 인간이 가지는 측은함이지만, 저는 교회 조직의 정점에 앉은 성자입니다. 그리고 홍등가는 교회가 지정한 8대 죄악이 흘러넘치는 곳이지요. 마음 같아서 모두 불로 정화해버리고 싶습니다.”
그랬다가는 여기 오던 놈들이 각자 거리에서 그 8대 죄악을 저지를 겁니다!
이 말이 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일단 좀 진정시키는 게 낫겠다.
나는 다급하게 마테오스와 적가면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성자님. 그때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아. 발렌 대공.”
그가 다시금 태도를 바꾸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약간 겁을 먹은 거 같기도 했다.
“예. 아르고스 홍의주교가 대공께 안부 전해 달랍니다. 즉위식에도 꼭 참석해 달라는군요.”
“아. 즉위식. 예. 반드시 가야지요. 초대해주신 게 감사할 뿐입니다.”
제이릴리스는 교황 임명을 충성맹세 때와 겹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방 영주들이 올라와야 할 이유를 최대한 늘리겠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교회는 약간의 기부금만으로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성자님, 적가면은 홍등가의 다른 지배인들과 달리 아주 신실하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테오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 말을 한 게 나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줄 수는 없다는 거 같았다.
“광명신교는 도박을 금하고 있습니다.”
적가면은 카지노 지배인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얼마 전 가벼운 침식을 당했다가 사제의 치료를 받은 뒤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카지노 지배인이 마음을 고쳐 먹…….”
“십일조를 제대로 낼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돈을 내밀면서 하면 신뢰가 생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대공이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나라에 문제가 생겼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 역지사지가 안 되고 대처가 안 되기 때문이다.
“네!?”
“예?!”
성자와 적가면 모두의 눈에 경련이 일었다.
카지노가 제대로 된 십일조를 낸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일 게 뻔했다.
신학생이고 봉사 활동을 했던 마테오스라면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구호 활동을 벌일 수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그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자선회 나가서 귀족들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는 듯한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자매님께서 후유증이 남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어느새 그녀에 대한 호칭은 자매님이 되어 있었다.
이중인격 같아 보일 정도였다.
“성자님을 뵈어 옥음을 들으니 씻은 듯 나았사옵니다.”
적가면 역시 정중히 답했다.
그녀가 내 귀에 대고 나도 제대로 못 들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VIP님. 멋대로 그렇게 선언해 버리시면……!”
나 역시 비슷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희망’은 곧 닫을 거잖나?”
“!”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한두 번 제대로 내게. 무려 성자님에게 비벼 볼 기회가 언제 오겠나?”
“……성자님.”
바르바토스 경은 태도를 바꾼 성자를 보며 경악했다.
그의 눈에서 신앙이 흔들리는 순간을 본 거 같았다.
좋아, 이제는 이야기가 진행되겠다.
슬프게도 사람은 일단 정신을 흔들어 놔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바르바토스 경에게 못 할 짓을 한 거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그가 미워할 건 나고, 어쨌든 적가면은 십일조를 낼 거다.
교회는 그걸로 고아원 애들에게 빵을 먹이고 글을 가르치겠지.
원래 부자는 미워해도 돈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게 맞나?
나는 손뼉을 치며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자. 들어보도록 하지요. 어떤 놈들이 어디로 들어올 생각인지 알아야 잡을 거 아닙니까?”
바르바토스가 나를 미워할지언정 황실을 미워하지는 않을 테고, 성자와 적가면은 타협점을 찾았다.
다 잘 됐다.
이제 일을 시작할 수 있겠네.
* * *
성자와 대공과 기사단장이 긴 소파에 차례로 앉았고, 그 앞에 카지노 지배인이 이동식 칠판과 지도를 걸어 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다음 주 수요일 날 운하를 이용해 밀반입해올 예정입니다. 밀가루 채워진 통 안에 종이에 싼 연초를 가득 넣는 식이지요.”
“연초 냄새가 안 나게 하면서도 연초에 냄새가 안 스며들게 하려니 머리를 잘 썼군.”
바르바토스가 눈을 빛냈다.
“이 연초가 밀가루 도매상 쪽으로 옮겨진 다음에, 시장 뒤쪽 거리에서 거래가 일어납니다. 각 중간 업자들이 와서 밀수꾼들에게 연초를 산 뒤, 자기네가 관리하는 업자들에게 또 넘기지요.”
“침식자들도 같은 경로로 들어오는 겁니까?”
이번에는 성자가 물었다.
“예. 그러나 그들은 배에서 내리지 않을 겁니다. 연초가 시장에 풀리는 걸 확인만 하면 되니까요.”
“끌어낼 방법이 필요하겠습니다.”
마테오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발렌시아누스는 어렵지 않은 듯 웃었다.
“물건이 구분 안 된다는 핑계라도 대면 되겠군. 아니면 이미 침식을 당한 척하고 다른 내부 협력자가 보고 싶어 한다 전하게.”
“예?”
“1차 만남에서 이미 적가면 그대에게 그 연초 향을 맡게 한 건, 침식시키려는 의도가 확실하네. 교회의 정화가 없었다면 그대는 지금쯤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내가 그대가 수도 안에서 만난 다른 침식자인 척하겠네.”
발렌시아누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기운부터 다를…… 어?”
적가면과 바르바토스는 이색적인 기운에 몸을 움찔했다.
발렌시아누스가 황금색 눈동자를 용처럼 세로로 바꿔 뜨고 있었다.
침식자와는 약간 달랐지만, 분명 비인간적인 기운이었다.
“이 정도면 다른 옛것을 섬기는 침식자의 기운 정도로는 믿겠지.”
바르바토스는 지도를 유심히 살피다 일어나 몇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발렌 전하. 수문 폐쇄와 현장 포위망은 맡겨 두십시오.”
그가 짚은 곳들은 한 사람이 다섯 사람을 막을 수 있고, 세 사람이 열 사람을 포위할 수 있는 도시의 혈맥들이었다.
험악한 외모에서 연상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는 지략 역시 검술만큼이나 빼어난 기사였다.
“이참에 그 중간 업자 놈들을 모두 와이번 밥으로 줄 겁니다.”
“침식자들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거기 있을 것이고,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이 함께할 겁니다. 아무리 짙은 그림자도 빛 앞에서는 녹아내릴 뿐이라는 걸 알려주겠습니다.”
공동의 적은 언제나 내부를 잘 단결시켰다.
검은 성자와 망나니 대공과 흑철 기사단장과 카지노 지배인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풀어나갔다.
* * *
월요일 저녁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홍등가 VIP룸에서 적가면을 만났다.
적가면은 세련된 목소리로 거침없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쪽에서 VIP를 꼭 만나 보고 싶다고 합니다. 하선하겠다는군요.”
“좋네.”
발렌시아누스의 대답은 이례적으로 짧았다.
그러나 적가면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고, 때를 놓치지 않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곧 그녀의 때였으니, 그가 그녀의 앞에 있다는 사실이 곧 기회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적가면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옅게 웃었다.
“이번에 중간 업자들 다 쓸어내면, 누군가는 또 그 자리를 채우겠지.”
적가면은 세련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이 바닥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양심보다 돈이 중한 자들은 끝없이 보충되니까요.”
“결국 다 그런 놈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황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맡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맡겨만 주신다면 이상한 연초가 안 돌게 잘 관리하겠습니다. VIP가 도와주신다면 물량 일부도 교회 쪽으로 넘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고 운을 떼며 적가면은 제일 중요한 내용을 말했다.
“제가 직접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아이를 보내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흡족하니 웃었다.
적가면은 그의 경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커지지 말라는 경고를.
“그래. 잘 생각했다.”
오늘 밤도 그는 밀약 하나를 맺었다.
밀수 연초를 찾는 사람이 있는 한, 파는 사람도 생긴다.
그들을 죄다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는 적당한 선에서 관리해야 했다.
“다음 달부터는 저희의 성의 표시 액수가 너무 커져서, 아예 밤에 마차로 보내드릴까 합니다.”
“그래. 쪽문 경비들에게 말해 놓겠다.”
폭군이 하기에는 치졸했고, 보통 황족이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온갖 악명과 기이하고 망측한 소문을 달도 다니는, 폭군의 망나니 황형 정도라면 딱 맞았다.
“이틀 남았군.”
“예.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