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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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이 마지막 붉은빛을 흘리는 와중에, 거리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치안감 에레스터. 위치 잡았다.”
“치안감 체스린. 위치 잡았다.”
온종일 운하에 드나들던 배들도 선착장 쪽으로 모여 몸을 붙이고, 밀가루를 가득 실은 짐마차들은 오늘 가야 할 마지막 시장으로 향했다.
“누님. 움직이고 있습니다. 놈들도 하선하려 합니다.”
“거리 유지해라. 잘못하면 침식돼서 괴물이 된다.”
사람 없는 이 시간대의 시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발렌. 위치 잡았단다. 정말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알차게도 잘 부려먹는구나. 연구용 샘플을 떼어 주지 않고 다 정화해버리게 내버려 두면 이번에야말로 구워 버릴 거란다.”
“발렌 님을 굽지 마세요!”
좌판은 비고 가게는 문을 닫았으며, 왁자지껄하던 골목골목에는 공허한 바람 소리만 울렸다.
본래 북적이던 곳이 텅 비어 있어서 생기는 그 어색함과 기이함은, 이른 아침 사람 없는 아카데미를 홀로 걸을 때 생기는 오묘한 기분과 비슷했다.
적가면은 발렌시아누스와 소드 유저 행동대장 하나를 대동하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셋 모두 수도사들이 즐겨 입는 무채색의 로브를 입고 삼각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더 가야 하나?”
“거의 다 왔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며 용언의 기운을 은근하게 흘렸다.
소드 유저인 행동대장은 몸을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에 면도날을 들이댄 듯한 아찔한 감각.
맹수 앞의 먹잇감, 신 앞의 인간이 되어버린 듯한 이 불안감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누님은 대체?’
적가면은 나름 훌륭하게 그 기세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이미 내심 발렌시아누스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발렌시아누스는 행동대장이 불안해하는 걸 느끼고 기세를 좀 더 누그러트렸다.
침식자들이 느낄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 역시 조금씩 침식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선했다는 보고가 확실한 듯,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지네나 거미 같은 게 섞여서 꿈틀거리는 걸 보는 듯한, 갑자기 내 손가락이 여섯으로 늘어난 듯한, 어색하고도 불쾌한 감각.
그건 분명히 우리가 공존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뜻이었다.
‘왜 자꾸 이 세상에 기어들어 오는 거야? 우리는 너희와 같이 살 수 없는데.’
발렌시아누스는 후드를 더더욱 눌러 쓰고 약간 머리를 숙였다.
주변에 덩치 크고 인상 험악한 사내들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대놓고 단검과 구리 채찍을 내보이는 여인이 담벼락에 기대 연초를 피웠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일련의 무리가 모여들고, 그들처럼 후드를 덮어쓴 이들도 여럿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이 작전이 성공하는 순간 이 거리를 선거구로 삼은 의원을 족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의원이 제대로 된 놈이라면 결코 관할구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는 없었다.
‘와이번 심문법을 사용해야겠군.’
그걸 심문법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다짐을 마쳤다.
“밀가루가 들어왔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노란 두건을 두른 한 사내가 외쳤다.
짐마차들이 골목 안쪽까지 들어와 커다란 나무통들을 내리고 있었다.
다른 무늬의 도장이 다섯 개 정도 보였는데, 그건 연초의 종류와 품질을 의미했다.
모여든 중간 상인들이 각자 암호나 종이 카드 등으로 자기 신분을 증명하고 거래를 시작했다.
노란 두건의 사내들은 조금이라도 암호나 카드에 문제가 있으면 밀가루 통에 접근시키지 않았다.
“돌아가십시오.”
“아니, 분명히!”
“…….”
“아, 알겠네! 그 칼 집어넣게.”
몇몇은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노란 두건들에게 물건을 살 기회를 얻었다.
밀가루 통 안에서 꽉꽉 뭉쳐 놓은 연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예약한 수량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한쪽에서는 언성이 높아져 몸싸움이 오가던 와중 통이 엎어져 위장용 밀가루가 쏟아지기도 했다.
곡물이 귀한 시기다.
북부 대공과 함께 밀가루를 옮겼던 발렌시아누스로서는 혀를 찰 일이었다.
꽃피는 봄날에 귀족들은 마음 편히 야유회를 갔지만, 평민들은 보리 한 줌이 없어 굶주리기를 빵 먹듯 했다.
* * *
“적가면이다. 최상품으로만 스무 통 주문했는데, 맞나?”
적가면은 노란 두건의 사내에게 다가가 직접 물었다.
“아. 오셨습니까? 말씀 들었습니다. 이 물량이 적가면 누님 겁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정중하게 적가면을 대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침식자 교단의 수족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기세를 느꼈을 테니, 아군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적가면이면 그…… 홍등가의……?”
“큰손이 합류하게 되었군.”
“망나니 황자 발렌시아누스가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하던데.”
연초 중간 상인들이 낭패감에 침음성을 흘리거나, 사업을 확장할 생각으로 눈을 빛냈다.
노란 두건의 사내가 나무통 앞에서 손짓했다.
“이 물량입니다. 아직 통행금지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저희가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울 뿐이지. 친구를 한 명 데려왔는데, 이 친구도 함께하고 싶어 한다네. 혹시 그분들을 만나 뵐 수 있을까?”
적가면이 세련된 어조로 발렌시아누스를 소개했다.
노란 두건의 사내가 발렌시아누스의 후드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 ……예. 저기 계십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두건 사내가 정중히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늘어선 짐마차 사이에 커다란 사두마차 한 대가 끼어 있었고, 그 안에 짙은 색의 로브를 입은 사내 몇 명이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용언의 기운을 약간 더 끌어 올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차 문이 열리고 높고 평평한 후드를 쓴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하, 하는 웃음소리를 들은 거 같기도 했다.
‘하나, 둘, 셋, ……넷. 내리지 않은 마부까지 해서 네 명이다.’
후드 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이 반갑게 웃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마부 역시 작은 거울로 그를 힐끔거리며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냐며 기특하게 봐주는 거 같기도 했다.
‘피를 조금씩 뽑아 가며 신경을 번개로 지져야 할 놈들. 달군 강철 골무를 손가락마다 끼워줘야 할 놈들.’
열 걸음.
‘내가 반갑냐?’
일곱 걸음.
‘나도 너희가 반갑다.’
다섯 걸음.
‘다 구제해버릴 수 있어서.’
세 걸음.
‘이 해충 같은 놈들아.’
발렌시아누스는 친절하게 왼손을 내밀었다.
침식자들은 셋 모두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 더 컸고, 후드가 직사각형으로 높게 치솟아 있었다.
가운데 서 있던 사내가 넓은 소매 아래 가려진 손을 내밀었다.
턱.
발렌시아누스는 손을 맞잡은 순간 지독한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차라리 비늘이나 점액 같은 걸로 뒤덮여 있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놈의 손은 약간 주름이 자글자글한 걸 빼면 인간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침식자가 후드 아래 드리워진 어둠을 일렁이며 말했다.
“반갑네.”
영혼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에 발렌시아누스는 정중히 답했다.
“잘 오셨습니다.”
세로로 갈라진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그리고 안녕히 가시지요.”
그가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네 명의 침식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네 줄기의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무슨!”
침식자가 다급하게 손을 빼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왼손 전체에 비늘을 두르며 버텼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꽃!”
그는 가학적으로 웃으며 온몸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르르륵, 후드가 불타오르고, 백금발 머리카락과 세로로 갈라진 황금색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잿가루가 휘날리고 붉은 띠를 두른 하얀 제복이 그 멋들어진 자태를 뽐냈다.
침식자들의 후드 안이 당황과 경악으로 요동쳤다.
“너……!”
황금빛 용언의 기운이 안개처럼 번지고, 꺼지지 않을 불길이 맞잡은 손을 타고 옮겨붙었다.
침식자의 로브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올랐다.
몸을 버둥거리는 그를 보며, 발렌시아누스는 광소와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보검 ‘흑루’가 죄인의 피와 눈물에 목말라 울었다.
콰직!
그는 침식자의 몸에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치안감들이 쓰는 짧은 호각이었다.
라-.
정중한 ‘라’ 음도 울렸다.
성기사들이 쓰는 나팔 소리였다.
우우우웅-!
거기에 더해 기사들의 뿔 나팔 소리까지 울리자, 연초 밀매 중간 상인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침식자들은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음을 알아챘다.
“발렌시아누스!”
침식자가 검에 찔린 채로 불타오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는 강력한 저주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용찬 의식으로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식자의 몸에서 검을 뽑았다.
“쥐며느리보다도 못한 추악한 찌꺼기들이 감히 대공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그들에게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면서.
“네가 이 모든 걸 준비했느냐?”
옆에 선 다른 침식자가 물었다.
“아니. 너희가 이 모든 걸 준비했다.”
“!”
“세상 사람들을 다 한 끼 식사 거리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놈들이랑 손을 잡은 순간, 너희는 활활 타올라 고통 속에 죽어 마땅하다.”
이 세상에 정답은 없어도 오답은 있다.
침식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오답이다.
적어도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다 네놈 탓이다.”
침식자가 엄포를 놓았지만, 그는 솔직한 심정을 담아 중지를 치켜들며 답했다.
“말을 높이거라. 가장 낮은 것들아.”
“이, 이 빌어먹을 도시를 생지옥으로 만들어주마!”
* * *
가장 먼저 시작된 건 밀수꾼들과 치안감들의 싸움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하늘에 대고 불꽃 마법을 쓴 순간, 그들은 뭔지는 몰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고, 바퀴벌레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하지만 흑철기사단장이자 치안총감을 휘하에 둔 기사, 바르바토스는 검술만큼이나 빼어난 지략을 가진 자였다.
“검문이 있겠다!”
“비키시오!”
“검문이 있겠다니까!”
평소와 달리 할버드를 들고나온 치안감들이 야간통행금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질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렸지만, 그만큼 한 명 한 명이 많은 범죄자를 다뤄 온 전문가였고, 눈빛과 걸음걸이만 보고도 상대가 어딘가 질척한 구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덩치 크고 문신 박힌 사내들과 코트 입은 칼잡이들과, 후드 뒤집어쓴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을 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할버드를 휘둘렀다.
퍼억!
“아악!”
퍼억!
“항복!”
퍼억!
“항복이라니까악!”
할버드는 강화 마법진이 새겨기지 전까지는 판금 갑옷도 뚫고 유효타를 먹이던 무기였다.
그걸 좁은 사거리에서 세 명의 소드 유저 치안감이 앞과 양옆에서 내리치니, 아무리 밀수꾼들이 수가 많아도 버틸 수가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치안총감에게 이번에야말로 범죄자 한 무리를 몰살시키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치안총감은 그 의지를 삼가 기꺼이 받들었다.
그게 밀수꾼들이 단체로 몰려나가든, 은밀한 골목을 이용하든, 죄다 머리가 깨져 나가는 중인 이유였다.
어쩌다 한 명이 우연히 돌파해도.
“세상.”
야간통행금지를 앞두고 텅텅 비어버린 거리에서 홀로 주목받을 뿐이었다.
삐익-!
발렌시아누스는 날카롭게 울리는 호각 소리를 들으며 흡족하니 웃었다.
바르바토스로서는 모를 일이겠지만, 그가 중간 업자들을 박살 낼수록 이후에 적가면이 차지할 몫이 늘어났다.
그는 자기 손으로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홍등가 거물의 파이를 키워주고 있었다.
그가 침식자들을 앞두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불타는 침식자의 왼쪽에 서 있던 침식자가 순식간에 변이했다.
고오오오오-.
후드 뒤집어쓴 빼빼 마른 인간은 어디 가고, 하얀 뼈 갑옷을 두른 키 3m의 덩치 큰 괴물이 거기 서 있었다.
갑옷은 두껍고 단단해 보였지만, 여기저기 크게 금이 가고 뚫려 있었으며, 그 틈으로 발렌시아누스의 팔뚝보다 굵은 파란색과 보라색 촉수가 튀어나와 꿈틀거렸다.
특히 정수리에는 한 줄기의 굵은 촉수가 돋아 있었는데, 마치 아주 높은 삼각뿔 모자를 쓴 거 같았다.
“미치겠네.”
발렌시아누스는 마차 나무 조각을 털어내며 남은 셋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여전히 마차에 타고 있었고, 하나는 변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눈치를 보고 있었으며, 불타는 놈은 담벼락에 기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정신 파동을 내지르고 어지간한 소드 유저를 가지고 놀 수는 있겠지만, 침식자의 진가는 결국 변이했을 때 나왔다.
‘변이한 놈도 당장 달려들지 않는다. 동료를 챙겨주려는 걸 보면 확실히 이성이 있어.’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여동생처럼 가학적으로 웃었다.
‘그럼 심리전을 걸 수 있지!’
싸운 이상 이겨야 하고, 더 나쁘고 비겁한 쪽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다친 놈부터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