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1화
(131)
발렌시아누스는 뛰어오르며 주문을 외웠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하얀 뼈 갑옷을 두른 거구의 침식자가 정수리에서 뻗어 나온 촉수로 그의 몸통을 쥐려 했다.
그는 촉수가 제 허리를 휘감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 대가로 담벼락에 기댄 침식자를 노릴 각도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담벼락에 기대고 있던 침식자가 분통 섞인 외침을 토하고, 발렌시아누스는 장창 같은 불꽃을 쏘아냈다.
퍼억!
‘불의 창’이 침식자의 심장을 꿰뚫고 활활 타올랐다.
하얀 갑각 두른 침식자는 정수리 촉수로 발렌시아누스의 허리를 분질러버리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오른손에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검을 들고 있었다.
푸욱!
발렌시아누스는 촉수와 갑각이 만나는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고, 촉수가 부르르 떨며 경련했다.
‘역시 ‘섞인’ 쪽이 약하다니까.’
그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주먹을 꼭 쥐며 신호했다.
펑!
‘불의 창’이 그대로 폭발하며 담벼락과 짐마차와 침식자를 날려 보냈다.
사방에 육편이 튀고, 하얀 갑각을 두른 침식자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으음. 그는 너희가 그렇게 물고 빠는 옛것의 품에 안기지 않았을까?”
아드득, 하얀 갑옷을 두른 놈이 이를 악물었다.
“광명교 신자들은 죽으면 광명신의 품에 안길 거라고 하잖아. 너희는 아니야?”
“…….”
“하기야 지금 네 꼴을 보아하니 너처럼 생긴 옛것 품에 안기기는 나라도 싫을 거 같다.”
“입을 함부로 놀린 걸 후회할 거다. 그분의 분노가 이 도시를 피로 물들일 테니. 너와 네 쌍둥이 여동생은……!”
“닥쳐. 나는 너한테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너는 안 돼. 나는 황제의 가족이고, 너는 개의 가족이거든. 이 개자식아.”
발렌시아누스의 검이 변이한 옛것의 아가리를 노렸다.
침식자는 그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오른팔로 막았지만, 그는 섬세하기로 이름 높은 검객이었다.
그는 아래쪽 전완근과 위쪽 지신근 사이의 틈을 정확하게 노렸고, 단단한 갑각에 스치지도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쑤욱!
팔뚝을 관통한 검이 그대로 침식자의 입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그는 당황하며 턱을 닫았고, 마나 블레이드는 이빨을 자르며 들어갔다.
그 비명이 신호가 되어 남은 ‘셋’이 변이했다.
찌이익!
눈치만 보고 있던 오른쪽 침식자의 로브가 부풀어 오르며 찢어졌다.
그는 키가 4m에 네 개의 팔이 달린 빼빼 마른 거인으로 변했는데, 온몸이 검고 미라처럼 바싹 말라 꼭 불타고 남은 뼈 같았다.
여섯 개의 보라색 안광이 빛나고, 머리 위와 옆으로 삼각뿔과 넓은 갓이 몸과 같은 재질로 자라났다.
꼭 마법사의 고깔모자를 쓴 거 같았다.
그가 2m 높이로 두둥실 떠올라 빼빼 마른 손을 들었다.
보라색 빛줄기가 번쩍이고, 발렌시아누스는 떠밀려 바닥을 굴렀다.
‘파괴술사? 젠장. 삼류 마법사 출신이구만. 역시 교회가 옳아. 죄다 잡아다 불에 태워야 했는데.’
마차에서 내린 마부는 거대한 녹색 말로 변했다.
머리에 네 개의 뿔이 돋은 데다가 입에서는 불을 뿜고, 거대한 지네처럼 10m도 넘게 늘어진 몸뚱이에 수십 쌍의 다리만 달리지 않았으면 더 말 같았을 거였다.
그리고 마지막, ‘불의 창’에 당해 터져버린 육편 사이에서 머리와 한 손이 기어 나왔다.
* * *
손목 단면이 목 아래 붙고, 머리와 손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발렌시아누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눈앞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을 베야…… 그랬으면 바로 변했으려나?”
그와 악수했던 침식자는 마치 거대한 갑오징어와 꽃과 진딧물을 섞어놓은 듯이 변이했다.
다섯 개의 거대한 다리는 게의 다리 같았고, 높이가 20m에 달하는 타원형 머리는 꼭 알과 꽃을 섞어놓은 듯 생겼는데, 희미한 이목구비가 남아있었다.
그것이 끔찍한 목소리로 명령하고 또한 선언했다.
그 언령에 어린 막대한 침식의 기운에 발렌시아누스조차 두통을 느낄 정도였다.
“게세레스, 필리스. 배신자를 죽여라. 만드리옹. 발렌시아누스를 죽여라. 나는 교회 놈들을 죽이겠다. 이 빌어먹을 도시는 오늘로 무너질……!”
화르르륵!
그때 하얀 불길이 치솟아 일대의 어둠을 밝혔다.
치이이익!
존재만으로도 침식자들의 몸에서 연기가 솟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사내답게 선이 짙고 그윽한 얼굴과 칠흑 같은 검은 머리와 눈동자, 화려한 자수가 놓인 치렁치렁한 검은 예복.
인적 없는 거리에 신의 아들이 태양광 같은 후광을 두르고 찾아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았습니까?”
“성자님. 딱 맞춰 오셨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추악한 만큼이나 강대한 놈들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비틀비틀 일어서 예를 표했고, 마테오스는 싱긋 웃으며 그를 축복했다.
“그대의 검에 빛의 시선이 닿기를.”
‘흑루’에 은은한 백색광이 깃들었다.
“이제 물러서십시오. 놈들은 저와 성기사들이 맡겠습니다.”
하얀 신성력을 피워 올리는 성기사들이 골목 곳곳에서 나타났다.
옥상에 선 전투 사제들이 주기도문을 외우며 신성한 장막을 치고 침식의 기운이 세어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는 정신 파동 한 번에 적이 1천 명쯤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제가 성자님을 두고 도망갔다가는 영원히 비웃음을 살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라면 뭐라고 말했을지 생각해서 답했다.
‘마테오스는 놈들을 다 불살라버리겠지. 그럼 세레라지에에게 연구용 시체를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
그의 본심은 꼭꼭 숨긴 채로,
마테오스는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침식자들을 향한 의로운 분노를 가진 건 좋다. 하지만 이번에도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
안 그래도 비인간적이었던 황금색 눈은 이제 세로로 찢어졌고, 왼손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 난장판에서도 찢어지지 않고 윤기까지 어려있는 하얀 제복은 그를 더더욱 주변과 동떨어진 존재로 보이게 했고, 언제나 같은 경쾌한 웃음과 뒤로 넘긴 백금발은 이 인적 없는 시장통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
발렌시아누스의 이글거리는 분노는 제이릴리스의 이름을 침식자가 입에 올려서였고, 제복이 찢어지지 않은 건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덕이었으며, 경쾌한 웃음은 그가 나름대로 잘 생각해서 보낸 호의 표시였다.
그러나 톱니바퀴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 역시 검을 쥐고 생각했다.
‘예정보다 약간 늦게 나타났고, 곧바로 축복을 내려 주었다. 일종의 기강 잡기인가? 마테오스의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 아르고스 그 늙은이겠지. 교회가 황실에 은혜를 베푼 모양새를 만들 생각이군.’
마테오스는 수십 명의 성기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침식자들을 가로막았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신성력을 뿜어내는 그 모습은, 무릎을 꿇어야만 할 거 같은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앞뒤로 포위한 모양새인 동시에, 발렌시아누스를 마주 보는 모양새였다.
‘내 쪽으로 다 밀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이참에 침식자들의 손을 빌려서 훗날 변수가 될지 모를 나를 쳐낼 생각인가? 정신 제대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슬슬 그도 마테오스 개인이 아니라 성자라는 입장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야.’
약간 늦게 나타난 건 주민 대피 때문이었고, 곧바로 축복부터 내려 준 건 미안함 때문이었다.
본래 계획과 달리 원형 포위가 아니라 반원형 포위가 된 건, 진짜 밀가루를 가져온 짐마차들이 골목을 막는 걸 계산하지 못해서였다.
“대공.”
“성자님.”
그러나 둘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고, 싸움이 급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자와 대공이 희고 붉은 불길을 피워올리며 침식자들에게 달려들었다.
* * *
지네 같은 녹색 말로 변한 마부, 필리스는 수십 개의 다리로 지면을 짓이기며 적가면을 쫓았다.
그의 등 위에서 깡마른 네 팔의 마법사, 게세레스가 부유하며 주문을 발사했다.
소드 유저인 행동대장이 적가면을 업지 않았다면, 이미 백 번은 잡혔을 터였다.
“아.”
달음박질하던 행동대장이 멈춰 섰다.
눈앞에 높은 벽이 솟아 있었다.
“이제, 도망칠 길도, 없구나.”
필리스가 녹색 입을 놀려 말했다.
구강 구조가 변한 탓에 발음이 약간 셋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배신자는 화형이다. 애초에 홍등가 따위에서 일하던 너를 믿는 게 아니었어.”
적가면은 행동대장의 등에서 내려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녀는 큰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실성했군.”
깡마른 네 팔의 마법사, 게세레스가 비웃었다.
“그래. 실성했지.”
“응?”
“이런 도박은 할 게 못 돼.”
적가면의 숨차던 목소리에 다시 세련미가 어렸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와 그가 전해준 정보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
목을 걸고 그녀의 보스에게 간언했고, 그 결과로 카지노의 피해를 줄여 신임을 샀다.
그전에 모시던 보스를 가장 치명적인 순간 배신했다.
모든 홍등가 지배인들에게 어르신이라 불리던 보스는, 흑철기사단의 손에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늘 이겼지.”
구름 안에서 노란빛이 번쩍였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막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게세레스가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지정 낙뢰.”
고양감에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세레스는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여섯 개의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벽 위에 한 새침한 인상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긴 남색 생머리는 밤바람에 나부꼈고, 파란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은 신비하고도 아득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남색 고깔모자와 로브를 두르고 있었고, 노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강력함과 신비함을 한 몸에 가진 그녀는, 그가 생전 동경해 마지않던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게세레스는 네 개의 손을 뻗어 세레라지에를 만지려 했고.
번쩍!
고깔모자를 쓴 듯한 머리 위에 노란 벼락이 나뭇가지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2m 상공을 부유하던 게세레스는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레라지에는 대지 마법 주문을 외워 적가면이 벽 너머로 나올 수 있게 해주었고, 동시에 바닥에서 수십 개의 가시를 뽑아 올려 빼빼 마른 게레세스의 몸을 부수려 했다.
“이 비겁한 놈들이!”
녹색 지네 말 필리스가 펄펄 날뛰며 나팔 같은 주둥이에서 불을 뿜었다.
“네놈은 그 단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
텐티아는 적가면과 행동대장이 들어온 그 틈으로 뛰쳐나가 돌진했다.
어둠 속에서도 백금 갑옷은 찬란하게 빛났으며, 붉은 망토와 투구 리본은 위풍당당하게 펄럭였다.
“마지막으로 들을 이름이니 기억해놓거라.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그녀는 늠름하게 외쳤고, 필리스는 코웃음 치며 불길을 준비했다.
“네 대공은 이미 우리의 사제께서 자근자근 씹어먹었을 것이다!”
화르르륵!
나팔 같은 주둥이가 불을 뿜었다.
“그럼 그분은 뱃가죽을 찢고 나오시겠지.”
텐티아는 불길을 가볍게 해치며 달려 나왔다.
“어?!”
그녀의 갑옷에는 대마법사 정도가 아니면 유효타를 먹일 수 없는 내열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그녀의 망토에도 대마법사 정도가 아니면 유효타를 먹일 수 없는 내열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녀 역시 슬슬 한서불침의 경지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기사였다.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가 용언의 불길을 써도 몸이 타기 전에 그를 벨 수 있었다.
텐티아는 그 붉은 눈을 부릅뜨며 집중했다.
제국 검술 4단계, 자리이타.
부하를 감수하고 막대한 힘을 내는 각성기.
그녀의 몸 안에서 마나가 공명하며 부풀어 올랐다.
피 같은 붉은색으로 빛나는 마나 블레이드가 화한(火寒), 불타는 얼음이라 불리는 보검에 어렸다.
발렌시아누스가 내려 준 북부의 검이었다.
‘놈의 목을 들고 가겠습니다.’
필리스가 당황하며 몸을 들어 올리고 두 쌍의 앞발을 내리치려 했다.
“잡았어요.”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그때 힘이 실리는 그 뒤쪽 다리 네 개가 그대로 터지듯 꺾였다.
균형을 잃은 지네 같은 말의 몸이 앞으로 무너지고.
“지옥으로 돌아가라!”
텐티아는 한 발을 축으로 삼아 힘껏 검을 베어 올렸다.
대각선으로 치솟아 오른 검이 필리스의 목과 몸통을 비스듬히 잘라내고.
녹색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