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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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스는 자신의 손목을 단단히 붙드는 손길을 느꼈다.
힘으로는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신성력으로 강해진 그의 육체는 이제 소드 마스터와 맞먹었고, 아무리 발렌시아누스가 용찬 의식을 했다 한들 아직 그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비늘 돋친 손아귀와 세로로 갈라진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가 전해져 왔다.
“성자님. 지금 잡지 않으면 저놈이 도망갈 겁니다. 그럼 이 짓을 한 번 더 하겠지요. 그때는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테오스는 골목 사이사이 들려오는 비명을 귀에 담았다.
“엄마, 엄마! 엄마아아!”
“누가 내 다리 좀 잘라 봐!”
“야, 야! 나 기억 못 하냐? 우리……! 으아아악!”
조각 같은 그의 육신에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결대로 갈라지고, 그 몸이 움직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지금 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제가 가면, 살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모릅니다. 발렌시아누스. 이렇게 말할 시간이면 한 명이라도 더……!”
발렌시아누스 역시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손을 떨지 않으려 애쓰며, 성자를 붙들었다.
“백 명 다 정화하기 전까지는 못 돌아올 거 알고 있습니다. 성자님께서는 손 내미는 사람을 못 뿌리칠 분 아닙니까.”
마테오스는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뿌리칩니까? 내가 구할 수 있는데. 그러라고 광명의 주께서 내려 주신 기적입니다. 할 수 있으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성자가 천둥처럼 고함쳤다.
태양광 같은 신성력이 일렁이고, 일대의 빛과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사내답게 선이 짙은 그윽한 얼굴에 의분이 떠올랐다.
그의 기세와 의지는 단호하고도 정의로웠으며, 자비 어린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령 그가 성자가 아니었다고 한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감복할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맞습니다. 성자님. 할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우리만 저 진딧물 같은 괴물 새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
“바르바토스 경은 저 침식자를 상대하고 있고, 뇌운을 부린 제 누님은 지쳤고, 제 기사와 성자님의 성기사들은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없고, 사제님들은 이동하는 데만 시간이 걸립니다.”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게 늘어났다.
뭘 할지 선택해야만 한다.
“오로지, 지금, 저와 성자님만이, 저 끔찍한 괴물 새끼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다!”
발렌시아누스가 세로로 갈라진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이례적인 절박함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성자님!”
“제발 저희 애라도 구해 주세요.”
신성력으로 변이한 육신은 작은 외침 하나까지도 새겨들을 수 있으니, 이는 광명의 주께서 내리는 의무이자 권리이니라.
마테오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운 말이었다.
“그럼 발렌 대공은, 저들을 포기하라는 겁니까?”
그는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명한 기운 어린 검은 눈동자와 비인간적인 노란 눈동자가 마주쳤다.
발렌시아누스는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
“성자님이 아니면, 누가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발렌시아누스!”
“제가 아니면 누가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해야 하면 그냥 하는 겁니다! 누구는 지금 좋아서 이러는 줄 압니까? 지금 성자님이 안 포기하면, 다음에는 1만 명쯤 변이할 겁니다. 침식자가 1만이면 X발, 수도 인구가 반으로 줄 겁니다.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발렌시아누스가 격렬하게 고함쳤다.
“누군가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냥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1백 명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걸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
“저는 황족이고 성자님은 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저와 성자님이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저들을 두고 저 괴물 새끼를 죽이러 가야 할 피와 권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성자가 신성력이라는 힘이 있듯, 그는 회귀 전 40년을 살며 쌓아올린 경험이라는 힘이 있었다.
구할 수 있는 자를 구하지 않는 건, 태만이고 방치요, 외면의 죄악이라 느껴진다.
뻔히 앞날이 보이는데 막지 않는 일도 태만이고 방치요, 외면의 죄악이라 느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함정을 향해 가는 어린 짐승을 보는 듯한, 불에 손을 대보려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기분으로 마테오스의 손목을 붙들었다.
데어 봐야 뜨거운 줄 아는 게 사람이라고 하고, 결국 그러면서 큰다고 하지만.
‘루디.’
발렌시아누스는 경험이라는 교사가 너무나도 비싼 수업료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겪어 봐야 안다는 말은, 선의로 움직이는 사람을 말리는 나쁜 놈이 되기 싫은 사람의 무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수도를 잃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는 이미 희대의 망나니가 되기로 결심한 자였다.
* * *
유쾌하고도 거만하게 넘긴 백금발,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 주변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하얀 정장, 황족답지 않은 직설적인 화법.
수도의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
마테오스를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사사로운 이익과 권리만을 갈구한다고 하기에는 묘하게 자기희생적이고 동정적인 면이 있었고, 공리를 추구한다고 하기에는 귀족적이고 오만했다.
악인이라고 하기에는 은근히 헌신적이었지만, 차마 하늘이 무너져도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1백 명을 죽게 내버려 두고 말입니까?”
“예.”
냉혹한 답변이 돌아왔다.
마테오스는 팔에 힘을 뺐다.
붉게 달아올랐던 몸이 식었다.
이 참담하고 지독하고 끈적한 감각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건 무력감이었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 정도로, 신의 아들인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각이었다.
“발렌 전하!”
“발렌 님!”
그때 저 멀리서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와 웬 시녀가 달려왔다.
그들을 본 발렌시아누스가 웃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자기가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었다.
쉬이이이이-!
그 거대 진딧물 꽃 침식자가 본격적으로 증기와 체액을 뿜어내며 몸을 줄이고 있었다.
다시 사람 머리 크기 정도로 돌아간다면 잡을 방법도 찾을 방법도 없었다.
“그래. 그러면 되잖아?”
실없는 웃음이 입가에 어렸다.
그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지만, 새 길이 나타났을 때 되돌아가는 걸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자가 아니었으니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고, 그 흉내라도 내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성자님. 어쩌면 죽게 놔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놀리는 겁니까?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를 향해 외쳤다.
이것 역시 못할 짓이었다.
대하기 힘든 성자 대신, 그래도 친근한 텐티아에게 부담을 넘기는 짓일지도 몰랐다.
“텐티아 경! 명령이네! 지금 침식되기 시작한 사람을 찾아서 그 부위를 다 도려내 버리게. 눈이든 팔이든 다리든 배든 일단 잘라내 버려!”
“네? 발렌 님. 지금 뭐라고 하신 건가요?”
루디는 녹색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그녀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발렌시아누스의 망나니짓을 보아 왔지만, 이건 완전히 상정 외의 말이었다.
그녀는 말려 주실 거죠? 하는 눈빛으로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텐티아가 하늘이 떠나가라 외쳤다.
투구를 거쳐 나온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그 명령, 이 텐티아가 받들겠습니다!”
“네?!”
루디가 기절할 거 같은 표정으로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텐티아는 기사다운 기사였다.
그녀는 기사가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영지가 망한다는 오랜 격언을 신봉했다.
애초에 머리를 써서 해결되지 않을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 비싼 돈 들여가며 기사를 육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사가 나서야 한다는 건 이미 빼어난 지략보다, 빼어난 무력이 필요한 일선 실무의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죽으면?
손에 무고한 피를 묻힐 각오?
그게 안 되어 있었으면 기사를 하면 안 되었다.
아니, 그런 걸 하라고 기사가 있는 거였다.
그녀는 나라 잃은 패잔병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마테오스와 그의 손목을 붙든 발렌시아누스, 1백여 명의 예비 침식자와 사제들의 포위망에서 도망치기 직전인 거대 침식자를 보며 본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보검 ‘화한’을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루디는 텐티아에게 다급히 말했다.
“당장 그렇게 침식을 막아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죽을 거예요.”
텐티아는 옥상 위를 가리키며 답했다.
“루디. 사방이 사제님들이다. 이 공간 자체가 신성력으로 가득해. 피는 금방 멎을 거다.”
루디 역시 위에 선 자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총에 마탄을 재장전하고, 발렌시아누스가 내려 준 단검 ‘생동(生冬)’에 마나를 불어 넣어 서리와 얼음을 칼날에 덧댔다.
“……죽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텐티아 경. 이미 완전히 침식된 자들에게는 제가 엄호해 드릴게요. 자기 발로 걸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제게 넘기세요. 제가 경보다는 더 친근한 인상이고, 칼도 더 작으니까 덜 아플 거예요.”
녹색 눈을 광기 어린 충성심으로 빛내며 피 묻은 블라우스를 입고 마총과 마법 단검을 쥔 사람이 한 말이었다.
누가 봐도 망나니 황족의 최측근, 미친 시녀 같았다.
“믿음이 안 가는구나.”
* * *
마테오스는 거대한 침식자를 향해 달려가며 생각했다.
발렌시아누스라는 사람은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다고.
일단 침식된 부위를 깎아내서 침식 속도를 늦춰 놓고, 저 거대 침식자를 쓰러트린 뒤 제대로 치료한다.
불가능한 발상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같은 작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었다.
성기사 앙겔로스가 마경을 닫을 때 비슷한 일을 했다고 했다.
사실 이렇게 놀랄 만큼 생소한 개념도 아니었다.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전투가 끝난 뒤 제대로 치료하는 것뿐이다.
마테오스는 생각했다.
그럼 왜 자신은 성기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지 못했을까?
물론 사람 살을 감자 싹처럼 파내는 게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죽기, 침식되기, 살 파내기 중 하나를 고르라면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를 고를 거였다.
왜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그의 수하들이 오자마자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고, 그는 여전히 100명을 살리니 버리니 하는 도덕적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을까?
‘광명이시여.’
성자는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마테오스는 정답을 찾으려 했고, 발렌시아누스는 해답을 찾으려 했다.
‘경전 안에 답이 있던 신학생 출신 성자라서 그랬나 봅니다.’
정작 경전에는 ‘진리는 나뿐’이라 적혀 있었다.
‘그분을 의심하지 않는 것 외에는 세상 무엇도 정답이 아니라 해답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발렌시아누스가 약간 달라 보이기도 했다.
마테오스는 그가 자신을 냅다 납치해 와이번핏으로 갔을 때,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그건 성직자는 와이번을 자기 의지로 타서는 안 되고, 하루빨리 수도원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타협책이었을 뿐이었다.
침식자는 이제 20m에서 8m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몸이 작아질수록 발걸음은 빨라졌고,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놈의 힘을 억누르고 발목을 잡는 속도보다, 놈이 포위망 외각으로 나가는 속도가 빨랐다.
꽃봉우리 같은 위쪽이 들썩거리는 게 뭔가 튀어 나가려고 하는 거 같기도 했다.
“다리도 세 개밖에 없는 놈이 뭐 저렇게 빠른 거냐! 온몸을 난도질하고 식초와 마늘로 비벼 버릴 놈, 끓는 기름에 담가 튀겨버릴 놈, 산 채로 까마귀에게 뜯어 먹힐 놈 같으니라고!”
발렌시아누스가 걸쭉한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그 역시 마테오스가 옆에 있어서 꽤 순화한 것이었다.
마테오스는 저 욕설은 들숨날숨 같은 말이라 확신했다.
“발렌 대공. 준비되었습니까?”
“예. 성자님.”
마테오스가 양손에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우우우우우웅-!
주변의 빛과 그림자가 일그러지며 모여드는가 싶더니, 하얀빛의 파도가 좁은 부채꼴로 뿜어져 나갔다.
“끼이이익!”
신성력에 휩싸인 침식자가 비명을 토하고, 놈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불타올랐던 ‘입’ 쪽이 다시 한번 녹아내리며 벌어졌다.
그 안에는 씨앗 같기도 하고 알 같기도 한 덩어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혐오감에 몸서리쳤다.
역시 저것들은 박멸되어야 했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꽃!”
‘불의 창’에 한 줄기의 마법이 더 엮였다.
발렌시아누스의 몸에 은은한 황금빛이 후광처럼 깃들고, 그가 불의 창을 쏘아냈다.
혜성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불꽃은 정확히 놈의 ‘입’ 안으로 들어갔고.
화르르르르륵!!
“끼이이이익!?”
8m에 달하는 꽃봉오리가 안에서부터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