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6화
(136)
시녀의 평범한 하루는 일찌감치 시작했다.
루디는 새벽 공기가 가시지 않은 어슴푸레한 시간에 눈을 떴다.
화요일 아침이 왔다.
팔을 위로 쭉 뻗고, 접은 무릎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허리를 풀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20분 정도 명상 수련을 했다.
“오늘은 유난히 상쾌하네요.”
그녀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고급 파자마를 벗었다.
원래는 면으로 만든 원피스를 입었지만, 발렌시아누스가 원래 받던 급료 뒤에 0을 하나 더 붙여 주고, 보너스를 ‘주머니’ 단위로 퍼 주어서 이런 사치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질긴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로 검은 가죽끈으로 만든 하네스를 조였다.
하네스는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끈이 교차 되며 몸을 조이는 형태였는데, 허리 쪽의 끈은 마탄 스물네 발을 끼워둘 수 있는 탄띠 역할을 겸했다.
칼날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마법 단검 생동(生凍) 두 자루를 차고, 6연발식 마총 ‘아가테’ 한 자루를 찼다.
본래 마총 역시 두 자루가 한 쌍을 이루나, 한 자루는 며칠 전 침식자와 싸우던 중에 금이 가 세레라지에의 공방으로 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장담은 못 하겠구나. 워낙 옛날 마법들이고 중첩된 마법진이 많아서, 알아도 고치기 힘들단다.’
‘누나가 그렇게 말할 정도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도 간신히 총알이나 만들 정도란다.’
손에 익은 무기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약간 속이 쓰리는 정도였지만, 발렌시아누스가 준 선물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침울해졌다.
루디는 잠시 피식, 하고 웃었다.
그녀는 수도 몰락 귀족 출신이었고, 어린 나이에 내쫓기듯 황궁에 들어왔으며, 계승서열 수백 번 대의 황족을 모셨다.
평생 조용히 묵묵히 일하다, 적당한 남자와 결혼하고, 적당히 늙어 갈 줄 알았건만.
그녀가 모시던 황족의 쌍둥이 여동생은 악명 높은 친족살해자 황제가 되었고, 그녀가 모시던 황족은 희대의 망나니가 되었다.
조용히 또 묵묵히 살다 갈 줄 알았던 그녀는 시장 거리에서 유명한 결투광이 되었고, 20대에 한 궁의 관리인이 되었으며, 체내에서 마나를 다루는 마나 유저가 되어 오늘도 기사와 대련을 할 예정이었다.
‘결투광, 마나 유저, 궁의 관리인. 어찌 된 게 마지막 게 제일 현실적이고 소박하게 들리네요.’
본래 한 궁의 관리인이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사용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제일 높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제이릴리스가 사는 본궁의 관리인인 시종장은 백작이었고, 누대에 거쳐 황실을 섬겨 온 가문이었다.
하지만 루디는 고작 21살에 막대한 예산을 다루는 한 궁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게 제일 소박하고 현실적으로 들린다는 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비일상의 세상에 깊게 빠져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빳빳한 검은 원피스를 블라우스 위에 입고, 프릴 달린 어깨끈으로 하네스 어깨끈을 가렸다.
진홍색 넥타이를 차고, 갈색 머리를 올려 단정하게 묶었다.
사점 안경까지 쓰면 ‘시녀 루디’의 몸단장은 끝이었다.
혹시 발렌시아누스를 따라 ‘외출’을 갈 때가 있으면 그때는 하네스 아래에 ‘돌피부’ 주문이 걸린 가죽 갑옷을 입지만, 오늘은 다행히 그런 날은 아니었다.
그녀는 발소리 하나 없이 방을 나섰다.
원래도 존재감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기사들과 대련하고 다른 집안의 시종들과 결투하며 그녀의 발걸음은 더더욱 은밀하고 고요해졌다.
“왔습니다. 시녀장님.”
“어서 와요.”
그녀는 뒷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하인들과 하녀들, 요리사가 하나둘 출근했다.
아직도 해는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늘 납품 날입니다. 수량 확인해주시고 서명 부탁드립니다.”
궁에 식자재와 이런저런 물건을 대는 상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발렌시아누스의 사치품과 기호품은 루디가 직접 다루지만, 장작이나 밀가루, 커다란 가구 같은 건 그를 통해 납품받았다.
루디는 꼼꼼하게 숫자를 센 뒤 서명했다.
그녀가 직접 금화를 내주는 게 아니라, 상인이 본궁에 가서 그녀의 서명을 보여주고 미리 각 궁에 배분된 예산 안에서 대금을 받아 가는 형식이었다.
하녀가 따듯한 세숫물을 준비하고, 하인이 습기 제거용으로 피우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요리사가 아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 * *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저희에게 맡기시는 게.”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 게다가 너희 아직도 그분 무서워하잖아.”
루디는 하녀에게서 마실 물과 은제 세숫대야를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녀는 방문만 연 뒤 아래층으로 돌아갔다.
원래 아침 시중은 관리인이 된 그녀가 직접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인과 하녀들이 수도에 악명 높은 망나니와 직접 대면하는 걸 두려워하기도 했고.
발렌시아누스가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기세가 평범한 사람은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고.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해온 일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지라, 여전히 하고 있었다.
루디는 컵과 대야를 침대 옆 탁상에 올려놓고 커튼을 걷은 뒤 창문을 열었다.
목소리로 깨우거나 흔들어 깨우기보다는 발렌시아누스가 스스로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더 좋았다.
아침 햇살과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발렌시아누스가 가볍게 뒤척였다.
루디는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잘 때는 천사 같으시다니까.’
평소에는 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오만하고도 가벼운 모습을 연출했지만, 지금 그 백금발은 이마를 가리고 눈썹 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세간에서 비인간적이라 말하는 금색 눈동자는 눈꺼풀 아래 숨겨져 있었고, 망나니짓을 시작한 이후로 핼쑥해진 뺨도 자고 있을 때는 불그스름한 핏기가 돌았다.
완벽한 조형미를 가진 황제의 쌍둥이답게, 그는 무척이나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이 깊고 코와 눈썹이 뚜렷해서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인상이었다.
1년 사이에 키도 부쩍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서 이제 소년보다는 청년 쪽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이내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는 그 모습은 마치 일출 같았다.
“일어나셨어요?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으신가요?”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제 일어나야지. 오늘로 휴가도 끝이고.”
기지개를 핀 그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려 하자, 루디는 곧바로 따듯한 물을 내밀었다.
“고마워.”
대공의 하루는 언제나 시녀와 함께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대공에게 흐트러진 집구석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듯, 대공 역시 사용인들에게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닦고, 하얀 제복을 입었다.
루디는 그때가 제일 좋았다.
지금의 발렌시아누스는 그녀가 알던 발렌시아누스였고, 그녀만 아는 발렌시아누스였다.
찬란한 백금발이 모양 좋은 이마와 눈썹까지 내려와 살랑거리는 걸 보면, 그가 성자를 납치하고 홍등가 지배인과 뒷거래를 한 그 망나니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거울 앞에서 의식이라도 하듯 숨을 들이켜며 향유로 머리를 넘기는 순간, 그는 그녀가 알던 세 살 연하의 천사에서 수도에 악명이 높은 망나니 대공으로 돌변했다.
애정이 흐르던 황금색 눈동자는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당긴 턱은 거만하고도 위압적이며, 넘긴 머리는 경박하면서도 무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발그레하던 뺨은 어느새 다시 핼쑥하게 들어가 창백한 얼굴빛을 띠고 있고, 부드럽던 눈매는 날카롭고 피폐하게 변한다.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루디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미녀와 야수’나 ‘저주받은 000’ 같은 류의 동화를 떠올렸다.
어느 순간에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만약 그런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잘 때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저주를 받은 대공(prince)이고.
본인은 본인의 원래 모습을 영원히 알 수 없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았는지조차도 모르는.
그런 가련한 주인공인 거다.
“다녀올게. 오늘도 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 줄 거지?”
“황제 폐하께 기도드릴게요. 광명신께서는 성자를 납치한 발렌 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테니까요.”
“음……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겠지만, 그런 놈을 위해 기도하는 네 기도는 분명히 들어 주실 거야.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잖아.”
“무슨 이야기요?”
“교회 기사인 동생은 강도 기사가 된 형에 대한 소문 때문에 계속 고생했지만, 형은 동생이 교회 기사라고 말하고 다녀서 잡힌 다음에도 쉽게 풀려났다고.”
“발렌 님!”
그러나 저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늘어놓으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얼굴, 칼을 차고 별궁을 나서는 그 등, 현관으로 쏟아지는 역광이 너무나 찬란해서.
루디는 그의 뒤를 언제까지도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죽은 뒤에도.
* * *
찰칵.
문이 닫히고, 그때부터는 또 다른 일이 시작된다.
하인과 하녀들을 부려 궁을 청소하고, 그들이 보지 못하게 회계 장부를 쓰고, 이 시간쯤 출근하는 정원사를 맞이했다.
그다음 점심시간이 되어 사용인들이 그들의 식당으로 향하면, 루디는 발렌시아누스 방으로 들어가 비밀 방과 연결된 벽장을 연 뒤 가죽 주머니에 금화와 은화를 나눠 담는다.
발렌시아누스에게 누군가 바친 돈이고, 발렌시아누스가 누군가에게 줄 돈이었다.
‘대체 이게 몇 자루일까요?’
루디는 잠시 헛웃음을 흘리며 그가 모아 온 재산을 바라보았다.
이걸 자신에게 관리하도록 한다는 거 자체가, 그가 자신을 얼마나 믿는지 알려 주었다.
금화와 은화가 몇 자루에, 보석으로 가득 찬 상자와 금괴도 있었다.
지난 1년 사이에 축적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권력이 남용되고, 그것을 황제가 눈감아 주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려 주는 모습이었다.
물론 루디는 그가 갈취하거나, 상납받은 금화 대부분을 황제에게 바쳐 군비에 보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은 게 이만큼이니, 대체 어디서 얼마나 받아 왔다는 말인가?
스윽.
그때 그녀의 귀에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루디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계속 주머니에 돈을 나눠 채웠다.
그리고 천천히 품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사점 안경 너머 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루디는 콧노래를 부르며 은화 하나를 들었다.
새 은화는 거울처럼 잘 닦여 있었고, 그걸로 뒤를 비춰 보면 대충이나마 뒤가 보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씨익!
루디는 입꼬리를 쭉 끌어 올리고 왼쪽 겨드랑이 뒤쪽으로 마총을 내밀어 당겼다.
타아앙!
한 발의 총성이 잃고, 칼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아악!”
루디는 ‘생동’ 한 자루를 왼손에 들고 비밀방 문을 뛰어넘어 발렌시아누스의 방으로 넘어갔다.
벽장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하인 하나가 바닥을 구르며 피를 쏟고 있었다.
단검을 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마탄에 맞아 형태도 알아볼 수 없었다.
루디는 바닥을 구르는 단검 조각을 보고 대충 놈의 정체를 파악했다.
발렌시아누스를 죽여 제이릴리스에게 타격을 주려는 놈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요새는 흔해져서 그냥 안부 인사처럼 느껴졌다.
“제가 2층에는 청소할 때 빼고 올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루디는 맑은 녹색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500m 거리에서 마총을 쏴 거인의 눈을 터트리는 시력은, 그녀가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요소들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그녀는 침대 시트의 이상한 주름을 보고 시트를 조심스럽게 통째로 벗겼다.
그 아래에는 아마도 맹독이 묻어 있을 피라미드형 마름쇠가 잔뜩 깔려 있었다.
‘이걸 설치하고 벽장이 열린 걸 본 거겠죠. 열어둔 보람이 있네요.’
하인 하나가 조금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서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들어맞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본궁 시종장님이 왜 매일같이 늙어가시는지 알겠어요.”
고르고 골라 뽑은 인선도 매수되거나, 첩자와 암살자가 섞여 들어왔다.
이 작은 별궁도 이 모양인데 본궁은 말하는 게 민망할 지경이리라.
“살려주십시오! 다, 다 말씀 드리겠……!”
“쉽게 전향하는 걸 보니 매수 쪽인가 보네요.”
“네, 네. 그렇습니……!”
푹!
“그럼 어차피 못 잡아요. 발렌 님이 그랬어요. 다 위가 누구인지 모르고 돈만 받는 거라고요.”
‘생동’은 서리와 얼음으로 만든 칼날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만 깊게 찔러두면 상처가 얼어붙어 피가 흐르지 않았다.
“발렌 님이 돌아오기 전에 치우려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굳기 전에 닦아야 하는데…….”
바닥에 깔린 융단을 치워버린 이유가 있었다.
루디는 녹색 눈을 반짝이며 다른 하인을 시켜 본궁에 연락을 넣었다.
그곳에는 이런 일이 하도 흔해서 시체 안치소 쪽 인력이 상주했다.
“욕보셨습니다.”
“아니에요. 다 제가 해야 할 일이죠.”
루디는 상냥하고 해맑게 웃으며 그들에게 은화를 건네주었다.
오늘도 참 평범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