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7화
(137)
이름은 발렌시아누스, 작위는 대공, 직책은 황제 직속 고문(顧問).
신체 나이는 18세, 용찬 의식으로 인한 비룡화를 억누르는 중.
회귀했다는 말 못 할 비밀 있음.
휴가 중에 침식자, 홍등가, 광명교회, 흑철기사단, 황실이 복잡하게 엮인 실타래를 하나 풀어냄.
현재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언제나처럼 긴장 중.
* * *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부름을 받아 올라왔사옵니다. 폐하.”
그녀가 고개를 들며 답했다.
“그래. 발렌 대공. 휴가 중에도 고생 많았다. 혹시 며칠 더 쉬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도 좋다.”
“지금 놀다가는 평생 놀 거 같사옵니다.”
“그걸 바라는 게 아니었나?”
“엘프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일단 발등에 붙은 불을 꺼야 마음껏 놀지 않겠사옵니까?”
그게 정답이라는 듯, 제이릴리스가 흡족하니 웃었다.
노란 눈이 보기 좋게 휘고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어리며 뾰족한 이가 드러났다.
“그래. 그대 말이 옳다. 집이 썩어들어가고 있는데 집주인이라는 자가 놀면 되겠느냐. 마땅히 보수를 마친 다음에 놀아야 할 것이다.”
어느새 완연히 봄이 찾아와 벚꽃잎이 휘날리고, 연인들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건만, 나의 황제께서는 오늘도 검은 옷을 입고 누군가를 죽이니 살리니 하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계셨다.
“그런 점에는 이번에 그대가 세운 공은 아주 특별하도다.”
제이릴리스가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내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나는 그 내용을 보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토벌 완료 보고.]
“침식 교회 하나를 파괴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흑철기사단장 바르바토스가 생포한 자들을 심문해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놈들은 옛것의 힘이 없는 최하급 말단인지라 자세한 건 몰랐지만, 교회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수도 밖 한 야산의 버려진 수도원에 놈들의 중간 거점이 있다는 증언을 얻었다.”
서류를 보아 하니 그곳은 ‘배양소’였다.
알첸베르사 수도원 아래 동굴에서처럼 침식자들이 사람이나 시체를 모아 놓고 끔찍한 존재들을 키워내는 곳이었다는 말이다.
“청은기사단을 보냈고, 세레라지에 대공이 개발한 마도구들의 실전성을 검증했다.”
나는 내가 다 긴장되는 기분으로 물었다.
“효과는 어땠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서류를 한 장 더 건넸다.
“직접 읽어 보아라.”
작전에 참여한 기사들이 직접 쓴 후기였다.
[총평부터 말하자면, 위력은 강하고 사용은 편리하며 무척 안정적이었습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가 개발한 ‘침투’와 ‘확산’ 덕에 생물의 형태를 띤 침식자와 이물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효과를 내었습니다.]
[짧은 투창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하기 편리했습니다. 와이번을 타고 날다 하늘에서 던지면 지면에 꽂히는 순간 전격이 구형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청은 기사단이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다가 마도구 투창을 던진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지면에 꽂히는 순간 ‘침투’의 속성을 띈 전격이 ‘확산’의 진을 따라 퍼져나간다.
바글바글 몰려 있던 침식자들과 이물들은 연기와 함께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지고, 기사들은 와이번에서 내려 토벌이 아니라 구제를 시작한다.
“정말…… 대단합니다.”
나는 가슴속에서부터 깊은 충만감을 느꼈다.
목숨 걸고 세레라지에를 천거하기 잘했다.
제이릴리스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위력이 너무 강해서 다른 대영주들에게는 판매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실로 그렇사옵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반란군이 이걸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노랗게 물드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세레라지에 대공의 수입이 확 줄어버리겠지. 마법사가 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빼앗긴다는 기분은 좋지 않은 법이다.”
“그 역시 그렇사옵니다.”
황제가 따라서, 하며 말을 이었다.
막 서명한 서류 하나를 더 건네주면서.
“짐에게 충성맹세를 한 대귀족만이 그녀의 공방에서 마도구를 살 수 있노라.”
“현명하시옵니다.”
* * *
제국에는 전략물자라는 개념이 있었다.
전쟁에서 중요한 마도구나 무기, 그 외 소모품은 시장에 맡겨 두지 않고 황실이나 지방 영주들이 직접 관리했다.
텐티아 경이 입는 갑옷은 오로지 황제의 기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비매품이었고, 기사는 영민이 쇠뇌를 쓰는 걸 금지했다.
세레라지에의 공방에서 나오는 모든 무기나 마도구 역시 그렇게 될 것이었다.
제이릴리스가 약간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대가 전해 주어라. 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제한이니 금지니 하는 소식을 전하기 싫구나.”
“현명하십니다. 예로부터 은혜로운 일을 직접 천천히 베푸시고, 원한을 살 일은 아랫것을 시켜 단숨에 처리하라 했사옵니다.”
“기꺼이 맡아 주겠다니 고마울 뿐이구나.”
제이릴리스가 세레라지에의 마음을 신경 쓰는 걸 보니, 세레라지에가 확실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제 그녀는 황제가 경계할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 사람에게 나쁜 소리를 해야 할 때는 남을 시키는 게 맞았다.
그 ‘남’이 오늘은 나였지만, 나로서는 제이릴리스가 세레라지에를 신경 써주는 게 기쁠 뿐이었다.
물론 세레라지에는 내게 ‘왜 올 때마다 이상한 소식만 가지고 오니?’라고 하겠지만, 그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늘 듣던 소리 한 번쯤 더 듣는 게 뭐가 대수라는 말인가.
그러나 나의 황제께서는, 내게 자신을 대신해 싫은 소리를 하라는 게 썩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었다.
“……고마울 뿐이구나.”
제이릴리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 모든 게 그대의 공이다.”
“예? 소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말아라. 짐이 아무리 머리를 안 써도 눈치는 있노라. 바르바토스 경과 성자 사이를 조율한 게 그대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대가 짐에게 목숨 걸고 세레라지에 대공을 천거한 일도 기억하고 있다.”
“아.”
그녀의 눈이 달아올라 반짝였다.
“배양소를 부수고 치명타를 입혔으니, 이제 적어도 몇 달은 조용할 거 같구나. 충성맹세를 받으려 대귀족들을 불렀을 때 사고가 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대 덕에 짐은 짐의 치세를 안정적으로 열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는 황망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충성 맹세만 제대로 받으면 대륙 제일의 강국이 하나가 된다.
지방과 중앙과 교회가 동시에 침식자들을 뒤지기 시작하면 놈들의 세력도 크게 약해질 것이다.
그 기대감에 더해, 제이릴리스에게 ‘덕분’이라는 말을 듣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
성자를 납치하고, 사람을 죽이고, 홍등가 지배인과 협상하고, 온갖 곳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게 헛일이 아니었다.
회귀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황홀경에 젖은 표정으로 겸손하게 말했다.
“세레라지에 대공, 바르바토스 경, 성자님 등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분투해 준 덕이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들의 옆에서 깝죽거린 게 전부…….”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읊조렸다.
“그들을 엮은 게 그대이지 않은가? 뭐. 되었다. 이번에도 그대는 그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비밀을 원하는구나. 들어 주겠노라.”
황제는 꽃핀 수도의 거리를 유리창 뒤로 배경처럼 두르고 웃었다.
역광을 받아 달아오른 백금발이 광배처럼 찬란히 빛나고, 노란 눈동자는 음영 드리워진 얼굴에서 선명히 반짝였다.
“그저. 그 모든 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연이든, 운명이든. 그걸 가져온 그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녀에게 내리쬐고 남은 빛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등 뒤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너를 버린 내가 감히 네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갚을 길 없는 은혜는 커져만 하고, 나는 다시금 충성을 맹세할 뿐이다.
“폐하께서 제국의 모든 영주에게 충성맹세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래. 그래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녀가 나무 상자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대가 짐을 돕는 걸 짐이 돕겠노라.”
* * *
첫 번째 상자의 안에는 마치 석류 알갱이 하나를 주먹만 한 크기로 키워 놓은 듯한 보석이 들어 있었고, 두 번째 상자의 안에는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가 들어 있었다.
“이건 무엇이옵니까?”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물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이 반투명한 붉은 보석은 ‘화정(火精)’이었다.
빙하 속에서 발견되는 빙정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 정도 크기는 나도 본 적이 없었다.
“그대가 주로 사용하는 마법은 불의 마법이지. 언제나 마나를 무리하게 쓰느라 숨이 달린다 들었다.”
“부끄럽지만 그렇사옵니다.”
“마나는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으나, 마법의 효율은 하루아침에 올릴 수 있지. 먹는 법은 알아서 찾아보도록 해라.”
이걸 먹으면 체질이 약간 변해서, 몸 자체가 불꽃 마법의 시약으로 작용한다.
그 대가로 마법을 쓸 때도 체력이 소모되지만, 생 마나만 쓸 때 소모되는 체력보다, 이걸 먹고 마나 사용량을 줄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콰테그’는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양산이 시작되었사옵니까?”
“그대가 그대의 시녀를 싸고도는 걸 알고 있다.”
제이릴리스가 말을 돌렸다.
“예?”
그녀의 입가가 묘하게 가학적으로 휘었다.
나는 혹시 루디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긴장했다.
“짐이 그대를 믿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대가 지키려 하는 사람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속은 것도 죄가 되는 시대가 아니더냐?”
“그렇사옵니다.”
속은 것도 죄가 되는 시대.
그녀는 1년 전 반톤이라는 시종에게 속아 ‘울그림의 펜촉’을 황궁 밖으로 부쳤다.
제이릴리스는 만에 하나라도 내가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루디를 살려 줬다.
나와 텐티아 경은 펜촉을 되찾으려고 빈민가로 향했고, 그때 코넬을 만났다.
“그대의 시녀는 그대와 어릴 적부터 함께했지. 몸을 잘 지켜서,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망극하옵니다.”
나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아콰테그’를 받아들었다.
그녀에 대해 굳이 지금 언급하는 이유가 있을 거였다.
“짐이 듣기로 그녀가 눈이 좋다더군.”
그녀가 마총 사용자라는 걸 대놓고 밝힌 건 아니었지만, 막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지만, 그러다 들켰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로 그렇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금빛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만약 황립 마도 공방에서 마총을 만들게 된다면.”
“!”
“그때는 그녀를 교관으로 몇 달만 빌려 갈 수 있겠는가?”
“저는 괜찮으나, 그녀의 뜻을 물어보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약간 놀란 듯 웃었다.
“상냥하구나.”
“당연한 일이옵니다.”
배정받은 황족이 나였다는 이유로 별일에 다 휘말리게 된 루디다.
그녀가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이릴리스가 약간 자세를 바꾸며 그럼, 하고 운을 띄었다.
“수도 성벽 안은 그대의 분투 덕에 안정이 찾아왔다. 홍등가 마차가 황궁 안까지 드나드는 걸 보니 실로 그대의 장악력을 알 수 있었도다.”
나는 눈알이 빠질 듯 눈을 부릅떴다.
그 마차에는 홍등가의 상납금이 들어 있었다.
“어찌……?”
“짐은 새벽에 잠이 안 오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옆문을 쓰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제이릴리스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대놓고 밝히기 뭣해서 옆문으로 오라고 했는데, 이제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정문으로 들어오라고 해야겠다.
그래야 욕이라도 한 번 더 먹겠지.
“걱정하지 마라. 문제 삼으려 한 말이 아니다. 의원 놈들도 행정관료 놈들도 다 똑같으니라. 그대도 대공이면 그 정도는 해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차라리 그녀가 화를 냈으면 조금은 덜 부끄러울 거 같았다.
“실로 황은에…….”
“수도는 평정되었으나, 서쪽 성벽 바깥에 이상한 게 돌아다닌다는 말이 들려오는구나. 세레라지에 대공과 함께 한번 나가 보아라.”
“뿌리까지 뽑아버리고 오겠사옵니다.”
나는 곧바로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 인사를 해준 제이릴리스에게 상납금 받아먹던 걸 들키다니.
이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 * *
“충성 맹세한 대귀족들에게만 팔아라……. 그럼 그때까지는 황궁에만 납품해야겠구나. 동생아. 너는 왜 올 때마다 이상한 소식만 가지고 오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동생아. 네가 어떻게 내가 할 말을 알았다는 거니? 네 얄팍한 두뇌로는 불가능하단다.”
“누나 말 진짜 듣기 좋게 한다.”
“구매가 책정해두신 걸 보면 그래도 신경 써 주신 것 같구나. 그래서 어디를 가라고 하시디?”
“상아탑 특구 위쪽인 거 같은데?”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고민했다.
내 말을 들은 세레라지에가 낭패감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마굴에 들어가게 되다니. 피곤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