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8화
(138)
제국에서 ‘마굴’이라고 하면 다양한 의미가 있었다.
좁게는 옛것들이 넘어오려고 하는 ‘마경’과 그 마경에서 나온 이물들이 모인 ‘이물 소굴’, 마수 군락지 등의 의미가 있었고, 넓게는 빈민가, 홍등가, 의회 등 많은 사람이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충돌하는 곳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수 나왔다! 도망쳐!”
“오늘 저놈들 죽인다. 잡아!”
그리고 서문 밖, 정확히는 상아탑 자치령 북쪽의 땅은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했다.
막 작은 하천에서 사람만 한 뿔개구리가 튀어나와 아이 하나를 물고 갔고, 작은 공터에서는 깨진 병이나 각목을 든 사람들이 옛 빈민가에서처럼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수도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한 번도 안 와봤니…… 라고 하기에는 나도 생소하구나.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는데.”
“저도 이곳은 처음입니다.”
세레라지에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고, 텐티아 경은 떨리는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빈민가가 더럽고 위험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사람이 죽어가는 곳이었다.
평지에 쓰레기와 쓰레기로 만든 천막이 쌓여 있었고, 악취가 피어올랐으며, 변소와 우물이 지척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더더욱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이나 여자들, 노인들이 밖에서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빈민가에서 위의 셋은 소일거리를 하거나, 소매치기 같은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붉은 등을 켜고, 남자들은 막노동하거나, 싸운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이는 건 쓰레기와 쓰레기를 뒤지는 남자들 뿐이었다.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안타까워하기를 멈추고, 도대체 왜 이런 곳이 생겨났을지 고민했다.
이곳은 빈민가와 달리 사방이 흙이었다.
농사라도 지으면 결국 먹고는 살 수 있을 텐데…….
깨달았다.
“이런.”
이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솔레타라온 성벽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그 성벽의 서쪽에 있기에 온종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볕이 안 드니 버려진 쓰레기들이 삭지 않았고, 천천히 독기를 품고 썩어만 갔다.
애초에 사람이 못 사는 땅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이곳이 문제가 될 정도로 커진 이유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텐티아 경.”
그녀가 패싸움하던 사람들을 죄다 도망치게 하는 식으로 말리고 오며 답했다.
막 코넬 또래로나 보이는 소년 하나가 팔이 빠진 걸 끼워 줬는데, 소년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절했다.
“예. 전하.”
“작년에 그린스킨 무리의 준동 때문에 유민들이 빈민가로 몰려왔을 때 기억하나?”
“예. 기억합니다.”
“그때 빈민들이 너무 많아져서 결국 빈민가가 넘칠 뻔했지. 수백 단위의 패싸움도 일어났고. 경과 나와 코넬이 그 수를 줄이려 노력했네.”
“그때 다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군요…….”
텐티아 경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녀는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 * *
“동생아. 이곳도 어떻게든 해결을 하기는 해야겠구나.”
세레라지에가 이례적으로 먼저 마법 외의 주제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그녀가 보기에도 심각해 보인다는 거였다.
“내가 받은 임무는 마수나 이물을 찾으라는 거였지만…… 그래야겠어. 코넬하고도 이야기해 봐야겠네.”
“이런 곳에서 침식이 한 명이라도 시작되면 순식간에 번질 거란다. 대충 보아하니 이미 시작된 사람들도 있는 거 같구나.”
사람들 사이에는 먹는 것도 없을 텐데 유난히 덩치가 크거나, 몸에 이상한 핏줄이 솟은 이들이 있었다.
텐티아 경이 ‘화한’ 손잡이에 손을 얹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내버려 두게.”
“전하?”
“처음 이곳을 보고 했던 예상보다는 훨씬 양호하네. 아직은 회복할 수 있는 상태야.”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일부러 저들의 침식이 심해지고 폭주하기를 기다리신 다음에, 그걸 빌미 삼아 이곳을 초토화할 생각이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텐티아 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너무 선을 많이 넘으시고 있습니다. 제발 황족답게, 무인답게 행동하십시오. 얼마 전에는 범죄자와 밀약을…….”
음…… 내가 그렇게까지 악독한 해결책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전하께서는 체스 말이 아니라 대국자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꾸 본인을 판 한가운데로 내던지십니다. 이제 전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신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텐티아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늠름한 얼굴에 처연하고 씁쓸한 빛이 어렸다.
진정 나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 같았다.
심장을 꽉 잡힌 기분이 들었다.
망나니짓은 계속해야 했지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최근에 내가 한 일들이…… 일단 성자 납치의 파장이 너무 컸다.
두 의원과 세레라지에가 끼어 있던 그 밀약도 알고 있을 거고, 이번에는 적가면과 손을 잡고 성기사와 싸웠다.
신실한 텐티아 경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할 패악질이겠지.
이번에는 확신과 안정을 줘야겠다.
“알고 있네. 그럴 생각 없어.”
나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진중하게 말했다.
텐티아 경이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 대민 상대로는 매우 비효율적인 작전이야.”
사고를 낼 걸 알면서도 놔둔 뒤, 사고를 내면 그걸 핑계 삼아 목을 쳐버린다.
회귀 전에 반란군에 붙을 기미를 보이는 중립 영주들을 상대로 여러 번 썼던 작전이었다.
이건 한두 명을 제거할 때는 잘 먹히지만, 이런 ‘사람들’ 전체를 어떻게 해야 할 때는 잘 통하지 않았다.
표적이 사고를 냈다는 명분을 통해, 표적의 제거를 사람들에게 정당화하는 게 핵심인데, 무슨 명분으로도 다 같이 죽으라는 걸 납득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도 아무리 내가 망나니라고 해도, 당장 침식자가 줄줄이 튀어나와 성벽을 기어오르지도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와이번 폭격을 지시할 만큼 쓰레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와이번 폭격은 더럽게 비쌌고, 그 돈으로 재정착을 도와주는 게 더 싸게 먹혔다.
“약속하네. 이번 일을 해결할 때는 결코 패악질을 부리지 않겠어. 경이 원하는 대로, 기사답게 정정당당하게 해결해 보겠네.”
할 수 있을 거다.
아마도.
“정말이십니까?”
텐티아 경이 반색했다.
붉은 쇼트커트 머리칼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늠름한 얼굴에 감격의 미소가 떠올랐다.
개과천선한 탕아를 마주한 아버지 같았다.
“그래. 내가 설마 경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겠나?”
“몇 번 하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다 잊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눈가에 눈물도 한 방울 맺힌 거 같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잎이 흩날리고, 이내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주변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사람들과 텐티아 경을 졸래졸래 따라오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엎드렸다.
솔직히 이 일에 있어서는 망나니짓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제이릴리스가 시킨 일은 마수나 이물을 사냥하라는 것도 아니고, 뭐가 있는지 보고나 오라는 거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유민 문제는 일단 더 생각해 봐야겠군. 일단 받은 임무부터 해결하도록 하지. 마수나 이물의 흔적부터 찾아보자고.”
* * *
수색은 아주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텐티아 경이 전신 갑주를 입고 콧노래를 부르며 걷기만 해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악동들이 인파 속에 숨어 돌을 던지거나, 맹랑한 소매치기가 한둘쯤 나올 만도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아이들도 없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시체를 태우는 연기였다.
교회 묘지에 묻히지 않으면 대기에 녹아든 사기에 반응해 언데드가 되었고, 이곳에 교회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까 본 뿔개구리 같은 건 여기서는 마수 취급도 못 받는 모양이었다.
남자들 몇몇이 하천가로 모이더니, 나무창으로 찔러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불에 구워 각자의 천막으로 가져갔다.
텐티아 경은 그걸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고, 세레라지에는 색이 다른 두 눈을 얇게 뜨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렌. 저 개구리 보이니.”
“당연하지.”
“저거, 원래는 뿔이 안 나는 종이란다.”
“!”
텐티아 경이 물었다.
“그럼 침식된 거 아닙니까?”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남부 거대 개구리는 성장 속도가 빠르고 크기가 커서 실험체로 즐겨 쓴단다. 그리고 개구리에게 뿔이 나게 하거나, 발톱을 기르거나, 꼬리를 남겨 두거나 하는 건, 비 포유류 계열 키메라를 만드는 첫 번째 수업이야.”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키메라라면 안 그래도 불안정한 생명체인데, 침식의 기운에 노출되면 바로 변이하겠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여기 침식의 기운이나 이물 따위는 없다는 거네.”
“네가 잘도 요점을 집었구나. 그래. 동생아. 침식자든 이물이든 옛것 쪽은 아닐 거란다. 결국 기껏 해 봐야 마수겠지.”
마수.
오크나 고블린 등 지성체도 있었고, 다이어울프나 다이어타이거처럼 맹수가 마나에 노출되어 거대화한 짐승들도 있었고, 어인처럼 오래전에 이 세상으로 건너온 이물이 자체적으로 번식하며 세상에 녹아들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제 어지간해서는 별 위험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럼…… 폐하도 모험가 길드에 적당히 의뢰 주고 끝내시겠네.”
인간은, 적어도 기사를 비롯한 귀족 계급은 온갖 종족들의 좋은 혈통만 받아내서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고, 이제 마수는 구제와 토벌의 대상이지 전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침식자와 이물이 위험한 이유도 정신 파동을 통해서 숫자를 불릴 수 있어서지, 각 개체의 전투력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더 찾아볼 거 있니? 더 있기 싫으니 어서 돌아가자꾸나.”
세레라지에가 냉큼 말했다.
“하고 싶은 연구와 해야 하는 연구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지금 나를 이 쓰레기장에 붙잡아 두고 뭐 하자는 거니?”
이상하게도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같기도 했다.
그 금은요동이 저렇게 떨리는 걸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생아 침식자들 문제로 마법 거리랑 배움의 거리에 갔을 때였다.
사생아들이 침식되었다는 걸 제이릴리스가 알게 되면, 우리도 침식될지 모른다고 숙청당할까 두렵다며, 다 죽이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었다.
세레라지에는 이제 막 공방을 받고 마법을 배울 권리를 받은 상태였고, 나는 잃을 것 많은 자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때처럼 굴고 있었다.
뭔가 잃을 게 많은 듯, 들키면 안 되는 듯.
텐티아 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천 쪽으로 내려갔다.
소년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는 그걸 흘깃 확인하고는 고지대에 선 세레라지에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그녀는 금은요동을 빛내며 새침하게 웃고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은 이제 슬슬 ‘마법사’ 앞에 ‘대(大)’라는 수식어가 붙기에 부족하지 않은 거 같았고, 하늘 같은 스승에게 받은 고급스러운 로브와 고깔모자와 긴 지팡이에는 윤기와 권위가 넘쳤다.
“왜 그러니?”
“혹시 그 키메라 있잖아.”
“…….”
“개구리 말고 다른 걸로도 많이 만들어?”
최악!
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하천 속에서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꾼 악어가 텐티아 경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퍽!
일격에 두개골이 갈라진 채 바닥을 굴렀다.
소년이 입을 쩍 벌리고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저런 것도 있겠지만.”
“있겠지만?”
세레라지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결국 인간 피를 섞는 게 최종 단계일 거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만약에 상아탑에서 흘러나왔다면.”
내가 키메라 몇 마리가 유민 몇 명을 해쳤다는 이유로, 그녀의 고향인 상아탑을 공격하는 걸로 느낀다면, 세레라지에는 번개 폭풍을 불러와 이 근처의 모든 거나, 나를 날려 버릴지도 몰랐다.
“어쩌다 흘러나왔을까?”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동생아.”
내 마음을 안다는 거 같았다.
봄바람이 그녀의 남색 생머리를 날렸다.
그녀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마 상인들이 소각로에서 빼돌렸거나, 마음 약한 생도들이 불쌍하다며 풀어 줬을 거란다.”
그때 텐티아 경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조심하십시오!”
“응?”
“그놈은 전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쓰레기 더미 뒤쪽에서 뭔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갈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