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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39화 (11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9화

(139)

어떻게 저것들이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때까지 몰랐을까?

나는 낭패감에 침음성을 흘리며 ‘흑루’를 뽑아 들었다.

회귀한 이후로는 마수가 아니라 침식자 놈들하고만 싸웠더니, 옛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면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이익!”

쓰레기 산 위에 선 그것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키는 2m 정도 되는 거 같았고, 누더기를 입고 있었는데, 금속 질감의 갈색 갑각이 누더기 사이에서 언 듯 보였다.

그것이 머리 위쪽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일순 신체 구조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여덟 개의 눈이 박힌 얼굴과 누더기 사이로 빠져나온 집게발을 보자 대충 감이 잡혔다.

전갈이 이족보행을 하면 대충 저런 모습이 될 거 같다.

“누나!”

나는 세레라지에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그 전갈 인간 같은 키메라가 꼬리 끝을 흔들었다.

피슛! 피슛! 피슛!

낮게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독침을 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피부는 어지간한 검으로는 베이지 않을 만큼 질겼고, 제복에는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가 스며들어 있었다.

한 뼘 길이의 골침이 내 가슴을 치고 튕겨 나갔다.

“날카롭게 꿰뚫는 불꽃!”

나는 그와 동시에 주문을 외웠고, 화살 정도의 길이로 만든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그 키메라를 꿰뚫었다.

놈이 쓰레기 더미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걸 확인하고, 세레라지에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큰일 난 거 같구나.”

“그래. 다행…… 뭐?”

세레라지에가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왼손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뼘 길이의 골침이 손등을 꿰뚫고 손바닥으로 나와 있었다.

“전하!”

텐티아 경이 기겁하며 우리 옆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막 우리의 등을 노리던 카멜레온 악어 두 마리를 더 해치운 참이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놈들이 더 모여들 줄 모르고…….”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지라 나도 저게 침을 쏠 수 있는지 잠시 잊어버렸지 뭐니. 부끄럽구나.”

어쩐지 세레라지에의 목소리가 조금 어눌해진 거 같았다.

나는 우선 조심스럽게 침을 뽑아냈다.

끝에 깔쭉깔쭉한 가시가 있어서 잘 빠지지도 않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살살 뽑지 못하겠니?”

세레라지에가 내게 면박을 주었다.

“누나.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 정도로 내가 알아듣겠어?”

“자랑이로구…… 아. 그렇구나.”

그녀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거 독 있을 거란다.”

“뭐?”

“걱정하지는 말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니. 마비 계열이고, 일단 마나로 억누를 수 있단다. 이깟 독이 독해 봐야 바스타틴이 만들었던 독보다는 훨씬 약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그렇게 곧 죽을 사람 보듯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혓바닥 잘 돌아가는 거 보니까 생생해 보이네. 알았어. 일단 옆에 있을 거니까 해독부터 해.”

세레라지에가 주문을 외웠다.

그때 나는 내 옆에서 아까 그 소년이 얼쩡거리고 있는 걸 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나리. 그게…….”

아무래도 내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라고 불러라.”

발렌시아누스, 그 이름을 들은 소년이 내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낭패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내 앞에 엎드렸다.

이곳에도 내 악명이 닿은 모양이었다.

“일어나거라. 바닥이 더럽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뭘 살려 달라는 거냐? 혹시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었느냐?”

반쯤은 농담이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젊은 남녀를 잡아서 목을 벤 뒤 생명의 기운을 흡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이쪽은 잔혹한 소문 위주로 퍼진 모양이었다.

조금 더 가벼워 보일 정도면 좋겠지만, 이런 류의 소문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하려던 말이나 해보아라. 네 목도 베어버리기 전에.”

소년이 겁먹은 눈빛으로 답했다.

“바, 방금 그놈들은 무리를 짓습니다. 늘 대여섯 마리가 같이 움직입니다. 방금 기사님이 쓰레기 산 뒤로 돌아가셨는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텐티아 경은 이깟 독침 따위야 눈 감고도 피할 기사야.”

“그, 그리고 이놈들은 불에 타죽지 않습니다! 어른들이랑 같이 불로 공격해 봤는데, 잠깐 기절하더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뭐라?”

방금은 용언의 기운을 쓰지 않았다.

쓰레기 산 위에서 벌러덩 자빠졌던 놈이 다시 일어났다.

나는 다시 세레라지에의 앞을 몸으로 가렸다.

“누나, 숙여.”

피슛! 피슛! 피슛!

그리고 전갈 인간의 독침이 소년의 몸을 꿰뚫었다.

* * *

텐티아 경이 박살 낸 놈들의 꼬리 여섯 개를 들고 돌아왔다.

마지막 놈을 상대하는 모습은 직접 봤는데, 눈앞에서 쏘는 독침을 다 피해 버리며 다가간 뒤, 집개발을 뽑고 머리를 터트려버렸다.

“전하. 일단 침식자라는 소문이 돈 이유는 알 거 같사옵니다.”

키메라들은 누더기지만 옷을 입고 있고, 사람처럼 두 발로 걸었다.

이곳의 침식이 생각보다는 덜하지만, 침식되어가는 사람들이 아예 없지도 않으니 충분히 동족으로 보일 수 있었다.

“나도 세레라지에 누나의 말이 아니었다면 침식자인 줄 알았겠지.”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레라지에 전하.”

텐티아 경이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에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나는 제발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니?”

“이 괴물들은 상아탑에서 만든 키메라입니까?”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갈 리가 없지.

“텐티아 경.”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말리려 했다.

상아탑은 세레라지에의 민감한 기억이었고, 세레라지에는 지금 어째서인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사생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고, 그럼 세레라지에는 이 일이 그때만큼이나 자신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전하. 상아탑이 실험체를 통제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난 겁니까?”

불안한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회피하거나, 들이받거나.

“텐티아 경. 입 다물려무나. 내 고향을 모욕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란다.”

세레라지에는 명백히 후자였다.

“전하!”

“경.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니? 침식자 문제가 아닌지 확인하려고 온 거잖니. 그리고 이제 침식자 문제가 아니라는 건 확인했으니, 뭐가 문제니.”

“사람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고요. 저는 기사며,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레라지에는 독침 한 발을 심장에서 먼 곳에 맞았고,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줄은 몰랐지만, 일단 많은 마나를 가진 마법사였다.

하지만 소년은 독침 세 발을 몸통에 맞았고, 영양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신분의 차이를 떠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소년은 나나 세레라지에가 손을 써 보기도 전에 몸을 굳히며 죽었다.

나는 소년이 행여 스켈레톤으로라도 일어날까 뼈도 안 남기고 태워버렸다.

“주군에게 충성하는 게 먼저잖니. 제국의 대공으로서 말하겠단다. 그만하려무나.”

“전하! 제가 지금 상아탑에 쳐들어가겠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키메라들이 여기까지 흘러나왔다면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위험합니다. 상황을 알려 주기라도 해야 마땅합니다.”

텐티아 경은 ‘상아탑’ 세 글자가 세레라지에의 역린임을 몰랐고, 세레라지에는 텐티아 경이 나 때문에 ‘적당히 눈감는’ 일에 염증이 났음을 몰랐다.

“설마 상아탑에서 난 사고를 은폐하시려는 겁니까?”

“네가 이깟 유민들 때문에 내 고향을 쑥밭으로 만드는 걸 보느니, 내 손으로 이 땅을 갈아엎어 버려야겠구나.”

“발렌 전하. 뭐라고 해보십시오. 이번 일은 기사답게 해결하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동생아. 네 호위 기사의 입을 다물게 하려무나. 임무는 끝났는데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결국 둘은 나를 향해서 화살 끝을 돌렸다.

“……음.”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텐티아 경의 편이었다.

내가 무슨 ‘천한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 이런 미친 의원이나 궁정 귀족도 아니고, 유민들이 키메라 밥이 되고 있는데 실태 조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래서 세레라지에와 그녀의 역린인 상아탑을 건들 수 있냐면 이야기가 달랐다.

세레라지에는 황립 마도 공방의 신성이자, 내가 목숨 걸고 끌어들인 미래의 대마법사였고, 내 비룡화를 억제해주는 파란 약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상아탑은 오랫동안 황실의 동반자이자 동맹이었고, 얼마 전에는 막대한 양의 고대 엘프어 마도서를 황실에 넘겨 주기도 했다.

형식적으로나마 협력이라는 틀을 사용했기에, 그건 우리가 은혜를 입은 거였다.

한 권 한 권 때문에 전쟁도 불사할 그 귀한 마도서들을 수십 권 정도 넘겨받았다면, 옛것 문제를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손을 떼고 있는 게 예의였다.

게다가 그 파란 약도 그 책에서 나온 연구의 성과물이 아니던가?

“불의한 죽음에 눈 돌리면 아니 됩니다.”

“동생아. 누구 덕에 네가 아직 사람 말 할 수 있는 건지 잊은 건 아니지?”

나는 세레라지에가 필요했고, 상아탑이 필요했다.

내 감정 따위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지하수로에서 란체아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시시각각 바뀌는 감정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그러나 텐티아 경에게 한 약속을 1시간도 안 되어 어길 수는 없었다.

며칠 전 그녀를 너무 크게 실망시킨 탓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부르주아라고도 못 쳐줄 홍등가 카지노 지배인 따위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그 지배인 따위를 위해 신성불가침한 광명교회의 성기사를 때려눕히다니.

앞으로도 텐티아 경의 힘을 빌릴 생각이라면, 텐티아 경이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해 줘야 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유민들을 모두 북방으로 보내버리도록 하지.”

둘 모두의 의견을 들어주거나, 아니면 둘 모두가 놀랄 만한 의견을 내놓거나.

“예? 실례지만 그게 무슨…….”

“방금 뭐라고 했니?”

* * *

그날 저녁, 나는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가서 보고를 올렸다.

아침에 산처럼 쌓여있던 서류는 하나도 남김없이 결제 또는 반려되어 있었다.

“폐하.”

행정관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황제가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말했잖느냐? 이제부터 전쟁과 관련된 사안이 아니라면, 4시 이후에는 새로운 서류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대도 퇴근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대가 여기 있으면 그대 휘하의 관료들도 모두 여기 있을 게 아니더냐?”

“전쟁과 관련된 사안이옵니다.”

“……두고 가거라.”

사람들은 황제가 명령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위와 아래가 번갈아 명령을 내리는 거 같다.

위는 결국 아래가 정리해온 자료를 읽고 그에 맞춰 반응하기 때문이다.

위는 한 명이고 아래는 여러 명이라 위가 명령하는 듯 보이지만…….

“발렌 대공. 침식자는 있었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제이릴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개뼈를 모으며 기지개를 피는 모습이 피곤하면서도 신이 난 거 같았다.

“없었사옵니다. 실은…….”

나는 천천히 보고를 올리고, 마무리하는 척 대책까지 꺼냈다.

“유민들의 북송이라…….”

“지금 북으로 올려보내면 딱 여름 농사가 바빠질 때쯤 도착할 것이옵니다. 운하 공사에는 1년 내내 손이 필요할 테고요.”

“좋구나. 세베릭 대공에게 전서구를 보내겠다. 그대도 편지 한 통 써 오거라. 답장이 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유민들도 대기시켜 놓고.”

“감사합니다.”

제이릴리스가 그런데, 하며 말을 이었다.

촛불이 비친 노란 눈동자가 가학적으로 휘었다.

“세레라지에 대공은 어떤 생각인 듯하더냐? 짐은 이참에 상아탑을 조금 더 쥐어짜고 싶다만?”

다행히 나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뢰옵기 황공하고나, 세레라지에 대공은 폐하가 그리하지 않으시도록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그대는?”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고, 제이릴리스는 웃었다.

“그럼.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겠노라. 모두를 만족시킬 방안을 마음껏 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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