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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0화 (11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0화

(140)

[나의 친구 발렌시아누스에게.

이 화창한 봄에 인간미 넘치는 제안을 받아 너무나도 기쁩니다.

오늘 아침 르세나 경이 기르는 화초에 꽃이 피었습니다.

발렌시아누스 그대가 보내 준 제안이 광명신의 시선인 햇살과 같은 모양입니다.

유민들의 처우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정적으로 북부에 녹아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대도 잘 알겠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언제나 성벽에 서 있고, 기름진 땅도 일굴 사람이 없어 놀고 있으니까요.

그대의(후략)…….]

세베릭에게 찬사와 감사로 가득 찬 답장이 돌아왔다.

“어떤가 텐티아 경. 이만하면 모두 잘된 게 아닌가?”

텐티아 경은 그 편지를 몇 번이고 읽고는, 나와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했다.

“……발렌 전하. 세베릭 전하도 발렌 전하께서 일을 이렇게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시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나면 먹기 싫어지지. 굳이 내 친구에게 실망감을 줄 필요가 있겠나?”

지금 문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1번, 키메라들이 있다.

2번, 유민들이 있다.

3번, 키메라들이 유민들을 잡아먹고 있다.

나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을 고안했다.

성벽 밖을 떠돌며 천막촌을 만들고 있는 수만의 유민을 죄다 북부로 보내버리는 거였다.

그럼 일단 2번과 3번은 바로 해결된다.

북부는 유민들을 반겼고, 그들이 정착하기에 충분한 땅이 있었으며, 이곳을 떠나면 당연히 키메라에게 잡아먹힐 일도 없었다.

이후 먹을 게 사라진 키메라들은 알아서 굶어 죽을 테니 자연스럽게 1번도 해결된다.

즉, 이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비장의 한 수였다.

“세베릭 전하도 저들이 저렇게 쫓겨 왔다는 걸 알게 되면 발렌 전하의 인간성을 의심할 겁니다.”

“나는 그와의 첫 만남에 내가 북부를 경제적으로 복속시키려 했다고 지른 사람이네. 우리는 서로의 고매한 인간성에 반해 친구가 된 게 아니야.”

다만 유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빠졌을 뿐이다.

여전히 중부인들은 북부를 유배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각종 신비와 기이와 거인과 마수와 이물들이 즐비한 북부를 두려워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이들에게 북쪽으로 가라고 했을 때 좋은 반응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고개 숙여! 고개 숙여!”

“천막촌 구역 소각 시작합니다.”

“똑바로 짊어져라. 짐수레 따위는 안 붙여 줄 거다. 너랑 네 가족이 이걸로 다음 영지까지 버텨야 해. 알아들었냐?”

바르바토스 경을 찾아가 치안감들을 빌려온 거다.

그들은 빈민가에서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끝내 자기들의 힘으로 그곳의 질서를 잡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도 밖에 거대한 빈민가가 생길 수도 있고, 그곳의 관리도 치안감들에게 맡겨질 거라 말하니, 그들은 눈이 돌아가 작전명 ‘북송’을 시행했다.

“거기까지 관리하다가는 저희가 다 죽을 겁니다.”

“이제야 조금 살 거 같은데 다시 그 지옥도를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마약, 항쟁, 전염병, 침식, 구걸, 좀도둑…… 안 돼!”

“죄다 북부 대공에게 떠맡겨 버리죠!”

“거기 가면 땅도 줄 거 아닙니까? 저들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가서 농사꾼으로 살라고 하지요!”

1단계, 일단 배급을 준다며 유민들을 꼬드겨 모두 한곳에 모이게 하고, 그 사이에 천막촌에 불을 싸질러 돌아갈 곳을 없앤다.

2단계, 일순 멍해진 상태인 그들에게 그들이 북부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배급을 나눠 준 뒤 길잡이 몇 명을 붙여 북부로 올려보낸다.

이 과정에서 반항하는 자가 있으면 따끔한 몽둥이맛을 보여 준다.

죽어도 천막에서 나오지 않겠다던 유민 몇 명, 죽어도 북부로는 가지 않겠다던 유민 몇 명이 죽었다.

치안감들은 혹시 중부가 북부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나돌지 않도록 각종 전염병 검사과 침식 검사를 철저히 했고, 그 과정에서 종군 사제는 수백 명의 초기 침식자들과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성벽 밖에서 학살을 일삼고 다닌다네!”

“옛 빈민가에서 코넬을 죽이려 하다 큰코 다친 뒤로는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만.”

“그 추운 북부로 유민들을 모두 추방한다더군.”

“겨울을 넘기자마자 추방이라니. 참으로 가혹한 자로다!”

“천막 안에 있던 일가족이 불타 죽었고,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유민들은 때려죽였다네.”

“침식과 관련된 실험을 했다는 말도 있더군.”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생긴 모든 잡음과 악명을 한 몸에 짊어졌다.

열심히 일한 치안감들이 욕까지 먹게 할 수는 없었다.

* * *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사람들이 북으로 또 북으로 향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아주아주 깔끔한 해결법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제 저들은 북부에 가서 자기 땅 가진 농부가 되겠지. 얼마나 기쁜 일인가?”

텐티아 경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발렌시아누스 전하가 상아탑 자치령에 찾아가 마법사들에게 호통을 내지르고, 키메라들을 책임지고 회수하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경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가?”

그녀가 늠름한 얼굴에 혼란의 빛을 띠고 물었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한 번에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유민들의 빈민화, 북부의 인력 부족, 키메라 고사까지 모두 해결했네.”

“그건……!”

“경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아네.”

“아십니까?”

나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문제를 일으켰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니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상대가 힘이 있다고, 건드리고 뒷일을 감당하는 게 피곤하다고 원칙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결국 전하께서는 이번에도 타협하셨잖은가.”

말을 듣던 텐티아 경의 눈이 커졌다.

“발렌 전하. 그걸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전하가 이렇게 상아탑에 미온적으로 구신다면, 상아탑은 장기적으로 더더욱 배짱을 부릴 겁니다.”

역시 기사다운 말이었다.

기수, 위계, 서열, 체면, 권위.

그것들을 지키려면 단호한 원칙이 필요했고, 위도 아래도 그것을 따라야 했다.

그럼 그 원칙을 만드는 건 누구인가?

“텐티아 경. 기사도의 가장 중요한 세 원칙이 무엇인가?”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주군에 충성, 교회에 신실, 약자 보호입니다.”

“왜 그것이 원칙이 되었을 거 같은가?”

한참 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배신이 많았기에 충성이 미덕이 되었고, 교회의 가르침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기에 신실이 미덕이 되었지.”

텐티아 경이 당황하며 말했다.

“전하. 하오나…… 기사도는 그렇기에 더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옵니다. 따라야 할 미덕과 규범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심어 주지요. 한때 강력한 약탈자 무리였던 기사들은 이제 제국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맞아. 내가 언제 기사도가 잘못되었다고 했던가?”

“방금……!”

“그 미덕과 규범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제국의 안정을 위한 미덕과 규범 아니던가?”

“!”

“기사들에게 원칙을 따르게 해서 제국은 안정을 찾았네. 내가 곧바로 상아탑에 찾아가 따졌다면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까? 경이라면 그렇게 해도 되네. 기사는 그리해야지.”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텐티아 경의 얼굴에 어린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비슷한 대화를 지난번에도 몇 번 더 해본 적이 있었다.

기사는 검으로 정복하고, 행정관은 펜으로 다스리며, 황족은 때로는 검을 때로는 펜을 들어야 했다.

그건 숙명이었다.

기사가 신념과 타협해서는 안 되듯, 황족은 타협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처럼 권리와 책임이 많은 사람이 신념대로만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신념은 하루아침에도 변하지만, 세상은 10년은 있어야 변한다.

신념대로 밀고 가다 반란이나 침공으로 영지가 불탄 다음에야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는 군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덫을 피할 여우의 꾀와, 늑대를 쫓아낼 사자의 용맹이 둘 다 필요했다.

* * *

나는 숨을 들이쉬고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내가 실수했네. 기사도 이야기나 원칙과 타협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어. 그대와 내가 같은 곳을 봐야 하는데, 자꾸 다른 곳을 보도록 하는군.”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본다.

텐티아 경의 세상은 주군의 명에 따라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게 정의인 세상이다.

그녀는 내 명령에 따라 생사람의 살을 감자 싹처럼 파내고, 빈민 깡패 1천 명을 도륙해버린 사람이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신뢰를 주어야 했다.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녀의 고뇌를 대신 짊어져주어야 했다.

그게 기사에게 주군이 주어야 할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번 여름에 폐하께서 대영주들에게 충성맹세를 요구하실 거네.”

“!”

“나는 그때까지 수도를 깔끔하게 안정시켜 놓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아.”

“텐티아 경. 나는, 내 양심대로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네. 나는 내 주머니가 아니라 폐하의 국고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야.”

“전하의 주머니도 만만찮게 채우셨잖습니까!”

그녀는 장난 섞인 대답과 달리 얼굴을 굳혔고,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기사 가문 태생이고, 기사가 최고로 고결해지는 순간은 주군을 위해 결사 항전할 때, 영민들을 위해 머리 숙일 때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게 내가 고결해지는 법이라네.”

“세베릭 전하가 전하에게 머리를 숙였듯 말입니까?”

차마 내가 세베릭처럼 고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약간 웃기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귀 전 역사를 포함해 41년간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섬겼다.

본래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던 몸으로서.

나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자들도 여럿이었다.

나는 제이릴리스를 도우려 했고, 그녀에게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되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겼다.

제이릴리스를 도우려면 유능해야 하는데, 내가 유능하면 나를 황제로 만들려는 자들이 많아진다.

나는 제이릴리스를 돕고 싶은 거지, 그녀의 대항마가 되어 지존의 자리를 꿈꾸다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폐인 생활을 청산한 다음에도 의도적으로 막 나갔다.

무례한 외국 사절에게 술을 뿌리기도 하고, 제이릴리스에게 붙을까 반란군에게 붙을까 갸웃거리는 영주를 잡아다가 조리돌림을 하기도 하고.

원칙이 있고, 원칙에 따라 사는 게 고결함이라면, 내 원칙은 제이릴리스다.

그리고 나는 바로 얼마 전에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들었다.

즉, 나는 내 1원칙대로 잘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직도 죽지 않은 내 양심의 울부짖음은 언제나처럼 괴롭지만, 언제나처럼 괴롭다는 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내가 술을 좋아한다.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어렸다.

무심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나나 텐티아 경이나 둘 다 머리가 짧아서, 멋들어지게 휘날리지는 않았다.

텐티아 경이 나를 잠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더니, 건틀릿 낀 손으로 흉갑을 두 번 두드리며 안색을 바꾸었다.

다시 그녀는 늠름하고 충성스러우며 강인한 천재 기사로 돌아왔다.

그래.

주군은 기사에게 끝없이 바라고 희생을 요구해야 한다.

그녀가 내게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 바라야 했다.

주군의 뜻을 받드는 게 기사도의 제1원칙, 충성이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내버려 둬서 미안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사다운 걸 해 보도록 하지.”

“예?”

“황제 폐하께서는 이참에 상아탑 자치령 쪽에서 뭔가를 얻어오기를 바라시더군.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우며 반항하는 마법사들을 때려눕히고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도록 하지.”

텐티아 경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실소했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한결 맑아진 표정으로 늠름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거 보십시오. 아주 기사다워지실 수 있으시잖습니까?”

* * *

“……내가 죽어도 그 꼬라지를 볼 수는 없잖니.”

세레라지에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상아탑 자치 특구의 한 뒷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은 상아탑 소각장에서 흘러나온 각종 부산물들을 파는 상인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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