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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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은 높이가 500m에 달하고, 수많은 마법사가 상주하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이 집단은 매우 오만하고 제멋대로지만, 온 대륙이 그것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과 자긍심이라고 여기기에 충분한 힘과 지식을 인류 역사에 보여준 바 있었다.
애초에 엘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서클 마법 체계를 어깨너머로 배워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마법을 익힌 인간이 초대 상아탑주였다.
마법은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고, 기사와 달리 원거리 공격이 가능했으며, 인간은 엘프보다 훨씬 머릿수가 많았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마법을 사용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엘프의 거대수림도, 드워프의 암반 요새도, 인어의 수중궁전도 상아탑 마법사들의 포화 앞에 무너졌다.
그들은 이종족들을 몰아낸 대륙에서 마법이라는 힘을 독점했다.
상아탑 밖에서도 자체적으로 마법에 눈을 뜨고 마도를 걷기 시작한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평생 성취가 상아탑 생도들이 한 학기 학습량과 비슷했다.
수많은 왕공귀족이 상아탑 아카데미의 낙제생 출신이라도 궁정에 들이기 위해 막대한 황금을 상납했다.
“그만.”
“예?”
“이제 돈은 되었다. 시약이 필요해. 땅과 광산을 내놓아라.”
“!”
“싫은가? 그럼 이 마도구는 옆 영주에게 팔도록 하지.”
“아…… 닙니다.”
그들은 이대로라면 영원히 끌려다닐 수밖에 없음을 자각했고, 뒤늦게라도 마법사 전력의 자체적인 확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반쪽이라도 성공을 거둔 곳은 제국 황실 솔레타라스 뿐이었다.
상아탑은 그토록 강대했다.
그들의 자치령은 제국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땅뿐이 아니었다.
상아탑은 막대한 황금으로 전 대륙에 거쳐 영지와 대농장과 광산과 섬을 사들였다.
혹자는 그것이 상아탑이 대륙을 정복할 야심을 내보이고 있다고 평했지만, 상아탑의 대외 재산 관리를 총괄하는 외탑관장(外塔館長)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이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했다면, 이미 했을 것이다.
그들은 땅과 사람 따위가 아니라 진리를 원했고, 그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충분한 시약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국이 건국되고 1천 년이 흘렀다.
상아탑 외탑관장은 마침내 누대에 걸친 소원을 이루었다.
* * *
방은 넓고 밝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미간은 좁고 어두웠다.
몸에 걸친 옷가지와 장신구는 하나같이 금과 보석으로 빛났지만, 그들은 흉작으로 굶어 죽을 위기의 농노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다 망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죽이든 살리든 해야지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재산을 날렸으니 목숨이라도 건져야겠습니다.”
“다들 침착하십시오!”
딕슨, 43세.
그는 무슨 사악한 비밀조직의 대표가 아니라, 상아탑 자치 특구에 입점한 상인들의 상인회장일 뿐이었다.
“상황 정리부터 한 번 더 하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전부터 나라 잃은 패잔병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날이 갈수록 빠지는 머리와 험악해지는 인상은 그를 악의 전쟁장사꾼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게 했다.
“지난 늦겨울,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이 거리에서 한바탕 날뛰었지요. 그때부터 다들 마음고생 많이 한 줄 압니다.”
“회장! 빨리 정리하시오!”
“지금 누구 놀리는 겁니까?”
“일단 들읍시다. 처음 오는 사람도 있잖소!”
“다음 날 마법사들은 상아탑으로부터 300m, 즉 지름 600m 안에 있는 모든 상가 건물을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이곳은 수도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거리였다.
그런 곳에 지름 600m짜리 풀밭을 만들겠다고?
이런 소리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게 상아탑의 힘이었다.
“이건 우리 상인들을 다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약 납품과 관광업으로 먹고살았다.
그런데 상아탑 근처에 발도 못 들이게 된 이 상황에 누가 관광을 오겠는가?
물론 시약 납품 쪽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직은.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다들 시약 납품 계약 연장 중지 통보를 받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 4월이니 한 8개월쯤 남아 있었다.
……상아탑은 언제나 진리를 원했고, 그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충분한 시약을 원했다.
그들은 지식을 팔고 얻은 돈으로 땅을 사들였고, 시약 농장과 광산을 손에 넣었다.
무수한 마법사들이 펑펑 쓸 수 있을 정도의 시약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제국이 건국되고 1천 년이 흘렀다.
상아탑 외탑관장은 마침내 선배의 선배의 선배들로부터 내려온 소원을 이루었다.
이제 그들은 탑 옆에서 이상한 공연을 열며 시끄럽게 떠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마법사들의 과제물 값을 후려치고, 틈만 나면 가격을 담합 하는 상인 놈들에게 시약을 살 필요가 없었다.
상아탑의 모든 마법사가, 원로부터 생도까지 마음껏 시약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농장과 광산들을 확보해낸 것이다.
토끼를 잡은 다음에는 사냥개를 삶는 게 순리였다.
상아탑 원로들은 수백 년 만에 한목소리로 납품 계약 해지 통보를 외쳤고, 동시에 몇몇 상단을 지정 상단으로 계약해 운송 거래만을 맡겼다.
“우리가 거래한 게 몇 년인데, 입에 풀칠은 하게 해줘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아탑은 세속을 싫어했지만, 동시에 작은 사회 안에서 수많은 파벌 싸움으로 단련된 통치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말을 알고 있었고, 몇 개의 자리를 보장하여 상인들이 그 자리를 두고 다투도록 유도했다.
칠흑 학파 원로이자 발렌시아누스가 성문을 닫으라 지시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흑마법사, 유각(有角)의 블라혼이 지시한 그 계획은 꽤 잘 먹혀들었고, 지금까지도 상인들이 제대로 뭉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고, 모인 다음에도 그 ‘자리’를 차지한 상단과 손을 잡거나, 뒤통수를 치고 자리를 빼앗을 생각을 했다.
“지난번에 손 상단이 생도들의 과제물 마도구를 50% 후려쳐서 구매했고…….”
“비스 상단이 주도한 담합이 여섯 번입니다. 여섯 번.”
“키슬레 상단이 얼마나 많은 소각물을 빼돌려 이윤을 취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엔딜 상단이 생조학파 키메라 연구실의 파쇄물을 통째로…….”
“하스파 상단이 탑을 나간 생도 5명을 취업 사기로 남쪽 왕국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동안 그 상단이 해온 수많은 사기와 담합과 범죄 행위를 상아탑에 일러바치는 식이었다.
그럼 상아탑 외탑관장은 해당 상단의 상단주를 불러 계약 파기를 통보했고, 거액의 계약금을 꿀꺽했다.
동시에 그걸 일러바친 상단주에게 다시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고, 그럼 또 다른 상단주가 그의 사기와 담합을 상아탑에 일러바쳤다.
이런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상인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각자도생을 꾀하기 시작했다.
“다 챙겨. X발!”
“그 어음 갚지 마. 어차피 망했는데 뭐.”
“아직 소식 모를 거야. 돈 빌릴 수 있는 데에서 다 빌려 온다.”
“하렌 백작이랑 상아탑 마도구 대규모 납품 계약 맺은 거 있지? 계약금 다 챙겨놔. 마도구가 어디 있냐고? 있겠냐?”
“애들한테 어려우니까 월급 다음 달에 준다고 해.”
쫓겨나기 전에 동전 한 닢이라도 더 벌어 가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소각장에서 팔 수 있을 만한 건 다 주워 와. 키메라는 위험하지 않냐고? 이건 너무 못생겼지 않냐고? 상아탑 마법사 손 탄 건 부자들이 애완동물로라도 다 사가. 위험도고 나발이고 있는 대로 주워 와!”
“뭐? 경호용? 그렇게 좋은 게 남아 있어? 내가 간다!”
물론 상아탑에서 괜히 위험도를 붙여 놓은 게 아니었고, 괜히 소각장으로 보낸 게 아니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야말로 뭉쳐서…….”
딕슨이 긴 설명을 마쳐가던 중이었다.
“이번에 치안감들을 움직여 유민들을 북송하는 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라고 합니다.”
직원이 회의실로 다급하게 달려와 말했다.
한 상단주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혹시 탈출한 키메라들을…… 봤을까?”
직원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눈알도 없는 X신인 줄 아냐고 답하려다가, 퇴직금이라도 받아 챙기려면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걸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가…… 아아아악!”
파지지직!
회의실 안으로 뛰어든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 * *
세레라지에는 천재 마법사였다.
그녀는 화염, 대지, 전격, 바람, 생조, 칠흑, 파괴…… 지금까지 인류가 익혀 온 거의 모든 마도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거기에 금은 요동이라는 눈에 띄는 외모와 황족의 혈통까지 더해지니, 다들 천재 소리 들어온 상아탑 아카데미 안에서도 손꼽는 유명인사였다.
“우리 학파로 오려무나.”
“직속 제자 대우를……!”
“3년 안에 논문 다섯 편을 내게 해주마.”
“마도서 원본을 공유할 생각인데, 관심 있니?”
왕공귀족들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상아탑 원로들이 앞다투어 직속 제자 제안을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녀는 그 모든 지식을 흡수했고, 그렇기에 그 북쪽 난민촌을 떠돌던 키메라들의 위험성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결국 인간 피 섞는 게 최종 단계일 거 같은데.’
발렌시아누스가 말했듯, 키메라에게 인간 피를 섞어 이성과 지능을 가지게 하는 건 거의 최종 단계였다.
그 단계까지 간 키메라가 상품화되지 않고 소각장으로 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분명 상당한 결함이 발견되었으리라.
‘그런 걸 빼돌려서 팔고 있었다니.’
그녀는 어릴 적부터 상아탑 안에서 살았고, 상아탑 상인들의 추잡스러움은 꿰뚫고 있었다.
소각장에서 타 죽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았다.
그 재까지 이상한 약이나 부적이랍시고 관광객들에게 파는 작자들이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상인들 따위는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빼돌린 키메라들이었다.
‘바깥까지 흘러나올 정도면 상당한 양이 팔렸다는 말이잖니. 상아탑 자치구 안에서만 돌았을 거 같지는 않구나.’
결함이 있는 키메라가 밖으로 팔려나갔다.
안 그래도 합성 생물이라 정신력이 약해서 침식에도 취약한 놈들이다.
그게 사고를 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레라지에는 곧 망할 상인들이나, 그게 어떤 경로로 나왔을지 알면서도 구매한 자들을 동정하지는 않았다.
꿈꾸는 천재 마법사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황제 제이릴리스뿐이었다.
그녀 역시 천재였기에 제이릴리스를 볼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힘은 자연재해에 가까웠고, 절대 정면에서 막아낼 수 없었다.
‘상아탑에 소각장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을 거야. 그리고 또 뭔가를 뜯어내겠지. 분명하잖니.’
그녀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지만, 명석하고 머리가 좋았다.
제 이복동생 발렌시아누스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갔다.
문제에 정해진 진리를 찾는 게 아니라, 문제를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한 뒤, 그중 제일 이득이 될 만한 게 진리라고 칼과 법전을 들고 우기는 거였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 나니, 상아탑 시절의 기억은 더더욱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색이 다른 두 눈에서 눈물이 길게 흘렀다.
선의의 경쟁자들과 함께 매일매일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었다.
‘내 고향이 박살 나는 걸 볼 수는 없는 거잖니.’
중요한 건 상아탑이 소각로 관리에 소홀했는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제이릴리스가 이참에 상아탑에 무언가를 얻어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강력한 폭군 황제는 비인간적으로 웃으며,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제 쌍둥이를 보낸 거였다.
세레라지에는 상아탑에서 수십 년간 붙들고 있던 마도서 수십 권을, 그녀의 공방으로 손수 옮겨 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상아탑이 뭘 요구받을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고향의 피를 덜 볼 방법은 단 하나.
굶주린 황제 제이릴리스가 상아탑을 대신해서 뜯어 먹을 만한 고깃덩이를 가져오는 거였다.
오랫동안 상아탑 자치령에서 활동하며, 황실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수도의 치안을 누리고, 수도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라면, 황제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으리라.
그래서 세레라지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연쇄 전격!”
번쩍!
파지지직!
푸른 번개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타고 덩굴처럼 번졌다.
회의실 안에 들어온 남색 마법사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재앙과도 같았다.
절박한 금은 요동은 요요하게 빛나고, 새침한 입술은 앙다물어진 채 침음성을 흘렸으며, 로브 앞자락을 여민 손은 수인을 그리며 두 번째 마법을 준비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왜, 왜 이러십니까?”
“멍청아! 튀어!”
몇몇 눈치 빠른 상단주들은 문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세레라지에가 한발 빨랐다.
쩌저저적!
그녀의 두 번째 특기, 대지였다.
문 앞뒤로 바위기둥이 치솟아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젠장!”
“애들 투입 시켜!”
“호위병!”
그들 중 몇몇이 사람 귀에는 안 들리는 호각을 꺼내 물었다.
세레라지에는 그들의 얼굴을 선명히 눈에 담았다.
‘기억했단다.’
쾅!
바위기둥이 부서지고, 문 하나가 벌컥 열렸다.
“시이익!”
“크르르르!”
키메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체 왜 내가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거니?”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으며 마법을 준비했다.
신체 능력 좋은 키메라들과의 근접전.
상성은 좋지 않았지만, 고향을 지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