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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3화 (122/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3화

(143)

지름 100m도 넘는 굵은 나무의 깊은 뿌리에 지어진 공방.

환한 빛을 내는 꽃이 언제나 핀 공방.

낮이나 밤이나 아카데미 생도들과 제자들이 실험하고, 마도서를 해석하고, 주술 회로 시안을 짜는 공방.

마법사 세레라지에는 그 공방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쳤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 불꽃이 튀고, 긴 남색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쳤다.

공방주급 마법사의 분노에 생도들이 벌벌 떨고 제자들이 몰려와 진정하시라 읍소했다.

촛불이 흔들리고 환한 빛을 내는 꽃이 숨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태연하게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얀 제복 단추를 풀며 옷깃을 가다듬는 손길은 태연했고, 황금빛 눈동자는 비인간적인 자신감으로 빛났다.

“아니. 누나. 들어 봐. 이번에 누나 너무 고생했잖아. 당연히 상아탑에서 누나한테 고맙다고 뭐라도 줘야 하는 게 맞아.”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란다.”

세레라지에가 날카롭게 답하고,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누나가 이번에 대가를 안 받으면 계속 소각장 관리를 개판으로 할지도 몰라.”

“아무리 잘 관리해도 그 상인 놈들이 쳐들어오는 걸 어쩌라는 말이니?”

“그렇게 따지지 말고. 무슨 말 하려는지 알잖아. 상아탑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지.”

세레라지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발렌시아누스는 여유만만한 연극조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역심 품은 영주들이나 침식자들이 황실과 상아탑 이간질하려고 비슷한 일을 꾸몄는데, 그때 누나가 못 막으면?”

“……내가 못 막을 거 같다는 말이니?”

“아니. 그게 아니잖아. 트집 잡지 마. 이런 약점이 있다고 알려 줘야지. 그래야 상아탑도 문제가 안 생기게 잘 관리할 거 아니야. 댐에 구멍이 났으면 메워야지. 계속 팔로만 막고 있으면 안 되잖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내가 상아탑 벗겨 먹자는 그 소리 안 들으려고 골침에 몇 번이나 찔려 가면서 분투했는데, 내 손으로 벗겨 먹으라는 거니?”

“같은 이야기 하지 마. 그냥 가서 말만 해.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럼 상아탑에서 뭐라도 하겠지. 중요한 건 알려 주는 거야. 거기서 자기들이 부담 안 되는 선에서 뭐라도 주겠지. 오랜만에 스승님이랑 귀여운 후배도 보고.”

공방에서 틀어막혀 살아온 천재 마법사는 41년간 단련된 궤변가 망나니의 혓바닥을 이길 수 없었다.

“혹시…… 가서 뭐 달라고 징징거리면 번개로 지져 버릴 거란다. 그리고 귀여운 후배라고 하지 말렴. 네 입에서 나오니까 불안하구나.”

“당연하지. 나는 그냥 누나 호위로 가는 거라고. 겸사겸사 지난번에 왔던 참관인으로서 인사도 하고. ……설마 누나도 내가 누구를 범하고 이런 소문 믿는 거 아니지?”

잠시 침묵이 어렸다.

발렌시아누스가 세레라지에를 빤히 바라보고, 세레라지에가 색이 다른 눈을 피했다.

“가자.”

“그래. 가자꾸나.”

둘은 지상으로 올라갔고, 홀에는 인영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라지에 전하.”

그림자처럼 나무 기둥 사이에 숨어 있던 루디가 불쑥 튀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세레라지에는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바로 어제 죽은 줄 알았던 키메라에게 죽을 뻔했던 탓이었다.

“세상에. 놀랐잖니. 이제 기척이 느껴지지도 않는구나.”

루디는 초승달처럼 휜 눈웃음을 지었다.

맑은 녹색 눈과 말랑한 볼이 도드라진 온화하고 상냥한 인상의 시녀였지만, 세레라지에는 그녀가 저 깔끔한 시녀복에 액체 금속 갑옷을 먹여 놓았고, 늘 마총과 단검을 차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디가 발렌시아누스 뒤로 따라붙고는 헤헤 웃으며 답했다.

“색적, 은폐 또는 기동, 사격. 시녀의 기본이지요.”

세레라지에와 발렌시아누스는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대체 그게 왜 시녀의 기본인 거니? 워록 교리를 왜 네가 외우는 거니?”

“루디. 내가 미안하다.”

루디는 자연스럽게 둘을 따라왔고, 잠시 후 세레라지에는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예민한 통찰력이 빛을 발하며 위험을 알렸다.

“동생아.”

“듣고 있어.”

“지난번에 루디가 니아르에게 문전박대당한 뒤로 상아탑 쪽에는 별로 안 데려가고 싶어하는 거 같더니, 이번에는 왜 데리고 가는 거니?”

“마도구 사주려고.”

“이미 ‘아콰테그’까지 줬으면서 뭐가 더 필요하니?”

“그게…….”

발렌시아누스가 뭐라 하려 하자, 세레라지에는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렴. 너는 너무 변명을 잘한단다.”

“그럼 누나 생각부터 들어보자. 뭐야?”

“네가 사악한 술수로 내 고향 마법사들을 윽박질러서 마총을 한 자루 더 얻어내려는 거 같구나.”

“…….”

“…….”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어렸다.

이번에는 발렌시아누스가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이 못돼처먹은 망나니 동생아!”

파지지직!

* * *

대마법사 게스타르테의 방은 오늘도 호화로웠다.

자주색 커튼과 화려한 그림을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벽과 창을 장식하고, 주먹보다 큰 보석으로 장식한 샹들리에가 환한 빛을 밝혔다.

게스타르테는 오늘도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챙이 넓은 검은 고깔모자는 시들지 않는 생화와 공작새의 꼬리 깃털로 장식했고, 망사를 드리워 얼굴을 가렸으며, 자주색 드레스와 푸른 보석,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피를 어깨에 둘렀다.

그녀의 오른쪽 옆자리에는 제자 니아르가 앉아 있었는데, 끝이 붉은 크림색 머리와 붉은색과 크림색이 섞인 눈을 가진 자존심 강한 인상의 마법사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옛것과 싸울 때 불, 번개, 대지의 삼중속성을 다루는 모습으로 세레라지에에게 ‘후배’로 인정받았다.

나 역시 그녀 덕에 목숨을 한 번 건졌으니,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주었다.

게스타르테와 니아르 모두가 구면이었지만, 게스타르테의 왼쪽 옆에 앉은 사람은 나도 처음 보았다.

대충 짐작은 가고, 눈치를 보아 하니 세레라지에와는 이미 아는 사이인 거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세레라지에 전하. 상아탑 생조학파에서 키메라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크리오스입니다. 부족하지만 원로의 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정갈한 인상의 사내였다.

눈과 입술은 붉고 피부가 맑았으며, 붉은 넥타이를 차고,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도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크리오스 교수님.”

“세레라지에 전하.”

“그렇게 부르지 않으셔도 좋네요. 오늘은 그냥 옛 추억에 젖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까. 제 동생 놈이 뭘 요구하든지 무시해 주세요. 저는 그냥…… 고향이 불타는 걸 못 볼 뿐이니까.”

세레라지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인들이 소각장에서 실험으로 만든 키메라를 빼돌려 팔았고, 그 과정에서 흘러나간 키메라들이 문제를 일으켰으며, 황제 제이릴리스가 그걸 문제 삼아 상아탑에서 뭔가를 뜯어내려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크리오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하.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희의 부족함에 전하께서 휘말려 그런 고초를 겪으셨다니요. 당장 그 상인 놈들을 도륙해버리겠습니다.”

“교수님. 전하가 아닙니다.”

“……세레라지에.”

아무래도 둘은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다.

또, 반응을 보아 하니 저 크리오스라는 저 마법사와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할 거 같아았다.

니아르는 그래서 이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게스타르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하나도 관심이 없는 인종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실감했다.

그러나 세레라지에가 다쳤다는 부분에서는 니아르도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게스타르테 역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전격 마법은 순간에 끝내야 한다고 했잖니.”

“네. 스승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 번에 끝냈어야 했던 거 같습니다.”

나는 지금이 내가 파고들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세레라지에는 대륙에서 금화 보유량으로는 손꼽는 부자지만, 마도구를 미친 듯 사들이지 않았다.

그녀가 전투마법사인 ‘워록’이 아니라 탐구가인 ‘메이지’로 살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로브나 모자가 모두 스승 게스타르테가 준 마도구라서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좁은 곳에서 난전을 벌일 때 아무런 방호기능 없는 로브를 펄럭이고 챙이 넓은 모자만 쓰고 있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앞으로 싸움은 점점 더 험해질 테고, 이참에 세레라지에도 장비와 마음가짐을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게스타르테 님.”

내가 입을 열자마자 다섯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루디, 세레라지에, 게스타르테, 크리오스까지 모두 내가 무슨 소리를 할지 얼굴을 굳히며 긴장했다.

세레라지에가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동생아. 내가…….”

나는 뻔뻔하게 그녀를 외면하고 게스타르테에게 말했다.

“제자가 밖에서 험한 일을 겪고 있으니 스승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으실 거 같습니다.”

“입 다물라고 했지!”

“생조학파의 실수를 전격학파의 제자가 수습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세레라지에가 두 손가락에 전격을 보아 내 목을 지졌다.

나는 용언의 기운을 끌어올려 마나블레이드도 막아내는 비늘을 둘러 방어했다.

옛 스승들에게 보상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많이 창피한지, 세레라지에는 새침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약간의 성의를 표해 주신다면…….”

하지만 나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진작 거세되었고, 저 둘은 그녀의 스승이지 내 스승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나는 어제 있던 일에 상당히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텐티아 경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세레라지에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싸움꾼이고, 텐티아 경은 전문적인 싸움꾼이었으며, 세레라지에는 마법사였다.

공격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나나 텐티아 경이 앞에서 방패 역할을 해 주는 동안 그녀가 후방에서 강력한 마법 한 방을 터뜨리는, 편한 싸움만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네 약속을 믿었던 내가 머저리로구나!”

그러니 나는 욕을 먹더라도 세레라지에를 마도구로 둘둘 둘러야 했다.

세레라지에는 죽어도 자기 입으로 스승님들에게 마도구 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였다.

그녀는 여전히 상아탑에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대신 누군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탐욕스럽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면, 내가 적격이었다.

“누나가 이곳을 나올 때 아무것도 없이 나왔지요. 그 탓에 1년간 너무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별 선물을 나누며 사제의 정을 다지면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을 마치자, 크리오스와 게스타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라지에가 거절 못 할 명분이었다.

“세레라지에.”

게스타르테가 세레라지에를 불렀다.

세레라지에가 손사래 쳤다.

“사양하겠습니다. 스승님. 저도 이제 제 앞가림은 제가…….”

“아무것도 못 챙겨 주고 급하게 보내서 미안했단다.”

그녀의 새침한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크리오스 역시 같은 논리를 펼쳤다.

“그래. 세레라지에. 험한 바깥세상에서 몸이라도 잘 지켜야 할 텐데. 교수가 되서 아무것도 못 주고 보낸 게 아쉽구나.”

세레라지에가 내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동생아.”

“왜. 누나.”

“어찌 된 게 너는 나를 점점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구나.”

“기분 탓이야.”

“내가 이 부담감을 못 이기고, 그것들 말고 마총 한 자루만 줄 수 없냐고 하기를 바랐니?”

“!”

나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무신경하던 세레라지에가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어떻게 마총‘까지’ 얻어갈지 고민됐는데, 마총‘만’ 얻어가도 괜찮았다.

좋은 마도구는 돈만 있으면 구할 수는 있었으니까.

크리오스와 니아르가 나를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소문이 덜했던 모양입니다.”

“선배를 그렇게 체스 말처럼 취급하시는 건가요?”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였다.

물론 이 기회를 잡으면 상아탑에서 내 평판은 더더욱 추락할 거다.

이게 언젠가 크게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지.

과거 본넬 경과의 대련이 떠올렸다.

결국 다시 앞만 보고 사는 꼴이었다.

하지만 마총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마도구였다.

세레라지에, 크리오스, 니아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갑고도 서늘했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거 참, 부끄럽게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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