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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4화 (12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4화

(144)

발렌시아누스는 적절한 순간에 약간의 존엄성과 인간성과 윤리 의식을 버린다면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계속 만나야 할 사이인 상아탑 사람들에게 이렇게 굴다가는 어느 날 밤에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미래에 몰려들 침식자들로부터 제국과 그의 뒤통수와 제이릴리스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마총 대량생산은 필수 불가결했다.

게스타르테가 제자 니아르에게 눈짓했고,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와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와 니아르를 보며 둘이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발렌시아누스는 하얀 정장 차림이었고, 니아르는 검은 정장 바지에 빳빳한 하얀 블라우스와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닮은 구석’은 단순히 정복을 좋아하는 차림새가 아니었다.

오만하고 능글맞지만, 또 묘하게 섬세한 부분이 있고, 절박하기에 위태로운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니아르는 긴 복도 끝 방에서 손잡이 없는 벽장에 손을 뻗었다.

“이거 싫은데.”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루디는 그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는데, 니아르의 손이 벽장 문 안쪽으로 쑥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노란 전격이 그녀의 팔을 타고 몇 초간 흐르더니, 벽장 문에 손잡이가 생겼다.

니아르가 손잡이를 잡고 열자 그제야 벽장이 열렸다.

그녀가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대공 전하는 사람의 마음이 없으신 분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금색 눈을 무심하게 빛내며 답했다.

“그래 보이나?”

“어떻게 세레라지에 선배님을 그렇게 대하실 수가 있는 겁니까? 그분의 재능은 이 세상의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보물을 조금 더 잘 보호하기 위해 마도구를 받으러 온 거다.”

“정서적인 면을 말하는 겁니다! 그분에게 있어 상아탑과 스승님에 대한 기억은 가시 많은 유리 꽃처럼 섬세하고……!”

루디는 녹색 눈을 서늘하게 뜨고 니아르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위계질서를 목숨처럼 여기는 황궁에서 살아왔다.

게스타르테 같은 원로들이 발렌시아누스에게 말을 놓는 상황도 내심 불만스러웠는데, 그 제자 따위가 제 주군에게 말을 저렇게 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말을 높이거라. 그분은 황형 발렌시아누스. 이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으신 분이란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자애로웠으며, 선의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겨눈 마총의 총구는 단호하고 비정했으며, 비싼 수업료를 받는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니아르가 입을 쩍 벌리고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크림색과 붉은색이 섞인 눈동자에 마나의 열기가 어리고, 중성적인 금속음이 흘러나왔다.

“마도에는 발을 들이지도 못한 시녀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그 추악한 무기를 겨누어?”

루디는 상냥하고 또 상냥하게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파이고 녹색 눈이 태양 아래 에메랄드처럼 빛났다.

“꼬마 마법사야. 그 추악한 무기에 심장이 꿰뚫리고 싶은 거야?”

그러나 방아쇠에 올라간 손가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가 그때 끼어들었다.

“루디. 난리 피우는 건 내 몫이야. 총 내려. 좀 곱게 말해줘. 말은 저렇게 해도, 니아르가 너한테 새 총 줄 거야.”

중의적인 의미의 말이었고, 루디와 니아르 모두 그걸 알아들었다.

아무리 니아르가 자존심을 세워도 결국 받아 가는 건 루디 너니까 대충 웃어주라는 말이었고.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 봐야 결국 내어 주는 입장이니까 너무 거들먹거리다 비웃음당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칫.”

“네. 발렌 님.”

니아르는 벽장 안에서 나무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뚜껑에도 벽장과 비슷한 마법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다.

노란 전기가 몸에 흐르며 마총을 탐하는 자의 정체를 확인했고, 그 과정은 감전 그 자체였다.

니아르의 끝단 붉은 크림색 머리카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녀가 울상을 지었으며, 그걸 보다 못한 루디가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말할 때쯤, 마총의 봉인구가 열렸다.

“이건 지난번에 받아 갔던 거보다 더 커. 위력은 강하고, 반동도 강하지. 사정거리는 비슷해. ……그렇게 들었어.”

니아르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마총을 들어보았다.

길이는 그의 팔과 비슷했고, 총구는 두 개의 긴 총열을 위아래로 붙여 놓았다.

방아쇠 바로 앞이 절반으로 꺾이며 총이 절반으로 접히는 중절식이었는데, 그렇게 열린 총열 안에 바로 마총탄 두 발을 넣을 수 있었다.

“루디. 어때?”

루디는 긴 마총을 들고 가볍게 돌려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벽장 안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금속 총열과 나무 개머리판이 모두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우웅.

루디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총이 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텐티아가 ‘화한’을 집었을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

한 주인이 도구를, 도구가 주인을 만날 때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발렌 님. 너무 좋아요. 이렇게 말하기는 죄송하지만, 빨리 써보고 싶을 정도예요.”

니아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걸 꺼내려고……!”

“알아. 고마워. 많이 아팠지? 잘 쓸게. 이걸로 세레라지에 전하도 지켜 줄 거니까 발렌 님을 너무 미워하지 마.”

루디가 마총을 쥐고 생각해 보니, 니아르는 아직 사춘기 즈음인 어린 나이였다.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해 줘도 괜찮을 거 같았다.

니아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게스타르테는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망사 베일 드리운 입가를 끌어올렸다.

“네 동생은 신이 난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놈을 상아탑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요.”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침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게스타르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크리오스가 돌아오기 전에 말해두겠다.”

“네?”

“상아탑 안에서도 마총을 다시 꺼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멍청한 것들이지. 이미 한 번 우리를 주술 회로 새기는 노예로 만든 무기를 다시 들려 하다니.”

세레라지에가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감정이 걷히고 서늘한 이성이 돌아왔다.

“제가 대공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이미 하고 있단다.”

“네?”

그녀의 스승은 이번에도 그녀를 놀라게 했다.

“미리 사과할 게 있구나. 네가 마총을 가져가서 다양한 상황에서 시험해 보고 보고서를 쓰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시간을 끌어야 했어.”

“잘하셨습니다. 괜찮아요.”

게스타르테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지학파 놈들은 다 미쳤다. 캐스팅은 제일 느린 주제에 그 빠른 무기를 세상에 풀려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마총이 결국 세상에 다시 나올 운명이라면, 함부로 퍼트리지 않을 자들의 손에 가야 한다.”

함부로 퍼트리지 않을 자들의 손.

세레라지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후 황제 제이릴리스를 떠올렸다.

위험을 통제하고자 제 혈족들까지 모두 죽여버린 제 이복동생을.

황제가 어린아이도 평복 기사와 싸울 수 있게 하는 그 무기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아주 제한적으로, 최고로 충직한 자들에게만 들려주겠지.

“그럼 우리 상아탑은 황실의 견제 때문에 그 마총을 다시 꺼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황실 안에서 마총을 통제할 수 있겠지.”

“!”

세레라지에는 금은 요동을 부릅떴다.

색이 다른 두 눈에 전율이 어렸다.

역시 세상이 돌아가는 건 복잡하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이미 하고 있는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몇 달 전 그녀에게 말했다.

언젠가 마총을 누나가 주도해서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고.

지금 루디의 마총을 손보는 일도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내다보고 있던 거니?’

“너는 네가 상아탑과 황립 마도 공방의 다리가 되겠다고 했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 알겠니?”

게스타르테가 물었다.

세레라지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감도는 생각들을 없앴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너무 무책임한 선택이었던 거 같습니다. 잘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짓을 해버리다니요. 이미 캐스팅해버린 마법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못된 동생 놈을 부려 먹을 생각입니다.”

게스타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섬광이 된 모양이더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레라지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스승은 하늘처럼 웃었다.

“너도 니아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대충 알지 않니?”

“아.”

“그것까지 함께 축하하는 의미다. 부담 없이 가져가렴. 원래는 가르쳐줄 생각이었는데, 네가 떠나게 되어 이제야 주는구나.”

세레라지에는 게스타르테가 건넨 두툼한 마도서를 바라보았다.

전격학파와 파괴학파의 속성을 함께 사용하는 방어 역장 마법이었다.

“감사합니다.”

저자명은 게스타르테, 세레라지에의 ‘침투’, ‘확산’처럼 직접 만든 마법이었다.

대마법사의 마도서는 돈만으로는 못 구할 물건이었다.

“갑옷 같은 건 안 주마. 발렌 대공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싸움꾼이 아니라 고상한 마법사란다. 워록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타협해서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지. 이게 네가 바라는 선물이었기를 바란다.”

세레라지에는 색이 다른 두 눈을 빛냈다.

그녀는 스승을 따라 섬광이 되었으나, 스승은 섬광이 나아갈 하늘이 되어 있었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분이십니다.’

천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만큼 고무적인 일도 많지 않았다.

세레라지에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잠시 후 크리오스는 심장같이 생긴 붉은 고깃덩이를 얼음에 묻어서 돌아왔다.

그건 심장에 고이는 마나 양을 몇 배로 늘려 주는 혈단이었다.

강력한 마수를 여럿 잡아야 만들 수 있기에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성보다도 훨씬 비싼 물건이었다.

‘적당한’ 보상으로 그걸 내온다는 점에서. 생조 학파가 이번 키메라 사태로 상아탑 안에서 얼마나 입지가 불안해질 뻔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세레라지에는 그 혈단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너무나 과분하다고 생각해 거절했지만.

“부디 이 옛 교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받았다.

그날 가장 세레라지에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던 건, 가서 받아 온 것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는 점이었다.

“거봐. 나랑 같이 가기 잘했지?”

“입 다물렴!”

그래서 황궁으로 가는 내내 괜히 발렌시아누스에게 전기 공격을 퍼부었다.

* * *

나는 황궁 감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감옥은 범죄자들을 거리에서 분리하는 곳이 아니라, 군주 입장에서 개 같은 놈을 죽이기 전에, 어디 한번 개 같은 곳에 들어가 있어 보라며 괴롭히기 위한 곳이었다.

회귀 전에 여기에서 한 달 정도 썩어본 적이 있던지라 다리가 조금 떨렸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각종 피와 오물의 냄새가 덜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전부 내 덕이었다.

죄인들을 감옥에 넣어 놓고 괴롭히다 광장에서 죽이는 게 아니라, 바로바로 와이번핏으로 보내버리니 감옥이 텅텅 비게 되었다.

“오셨습니까!”

“아이고 발렌시아누스 전하.”

그래서 간수들과 감시병들을 나를 은인으로 알았다.

일은 없는데 돈은 나오는 직장이라니, 너무 황홀하지 않은가?

“그 상인 놈을 만나러 왔네. 잠시 시간 괜찮겠는가?”

“예. 얼마든지 시간 보내셔도 좋습니다.”

간수는 아예 내게 열쇠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나는 감옥 아래로 내려가 한 죄수의 창살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과거 상아탑 특구에서 활동하던 상인이었는데, 비교적 양질의 키메라들을 발 빠르게 확보해서 널리 팔아먹은 놈이었다.

“살고 싶지 않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대답이 돌아왔다.

“상인이 재산을 다 잃었는데, 저는 이미 죽은 겁니다.”

제 몸값을 올리려는 말이었다.

“땅에 묻어둔 돈 있을 것 아닌가? 그 돈이면 다른 영지에서 다시 시작할 만하겠지.”

“…….”

“최근 델루시아토 백작의 영지에 운하 공사를 하고 있네. 워낙 상업이 발달한 곳이 더더욱 번창하며 북부 최대의 교역 도시가 될 거야. 그 과도기에 새 신분 구하는 건 일도 아닐 거고.”

“제게, 뭘 바라십니까?”

“그대에게 경비용 키메라들을 사 간 사람. 어디의 누구인가? 대답하게. 가족들까지 죽일 수는 없잖은가.”

오래지 않아 그의 입이 열렸다.

“……저도 이름은 모릅니다.”

내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마무리하려 했다.

몰래 키메라를 사간 놈이 그걸로 뭘 할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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