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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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연극이 되었든 싸움이 되었든 노래가 되었든, 실전에서는 연습했을 때의 70% 정도만 보여줄 수 있어도 잘했다고 한다.
그러니 100%를 선보이려면 130%, 150%로 연습해야 했다.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는 연습 후 찾아오는 건, 폭발적인 성장이 아니라 폭발적인 근육통이다.
그 텐티아도 발렌시아누스와 루디를 굴릴 때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지 않았다.
따라서 그 남은 50%는 연습과 노력을 제외하고 메꿔야 했다.
재능이나 도구 같은 걸로.
“루디. 준비됐어?”
선착장 외곽의 큰 창고 앞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소리 낮춰 물었다.
루디는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고, 맑은 녹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건물 뒤로 엄폐하자, 액체 금속 갑옷 ‘아콰테그’를 먹인 빳빳한 검은 원피스형 시녀복에 일순 금속질 윤기가 돌았다.
원피스 아래 긴 블라우스 위로 입은 하네스에는 두 종류의 마탄과 두 자루의 마법 단검 ‘생동’, 그리고 6연발식 리볼버 마총 ‘아가테’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오늘 루디가 손에 쥔 건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였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붙이고, 커다란 창고 안쪽을 노리는 눈매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눈에는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루디가 준비되었음을 확인하고 제 옆에 선 세레라지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루디가 잦은 결투와 텐티아와의 단련을 통해 실전적인 몸놀림을 익혔음을 확인했지만, 세레라지에가 방어가 약하다는 마법사 특유의 단점을 극복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뭘 보니?”
그녀가 새침하게 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걱정 되서 그렇지.”
“네가 감히? 네 몸이나 간수 잘하려무나. 너도 달랑 제복 하나 걸친 채로 ‘아콰테그’만 믿고 있잖니?”
“나는 용찬 의식을 한 초인이라서 괜찮아.”
“나도 역장은 준비되었단다.”
세레라지에는 게스타르테에게 받아온 마도서를 나흘 만에 통달했고, 그 마법을 무영창으로 쓸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어떻게 어깨너머로 배워 보려다 세 문장 이상을 읽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발렌시아누스로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혈단’까지 먹은 그녀는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는 ‘역장’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후방 지원을 맡은 루디 옆이 아니라 돌격을 준비하는 발렌시아누스 옆에 섰다.
그녀는 오늘도 그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블라우스 위로 입은 조끼에 ‘아콰테그’를 먹여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위에 선 텐티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텐티아는 충직한 기사답게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준비 끝났습니다.”
“아. 그래. 그럼 확인해보자고. 대체 뭘 지키려고 키메라들을 몽땅 사 갔는지 말이야.”
발렌시아누스가 둘을 볼 때,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를 보았다.
오늘도 그는 그 백금발을 경쾌하고도 오만하게 뒤로 넘기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황금색 눈으로 웃고 있었다.
금실과 붉은 띠로 장식한 하얀 정장은 대공의 품격이 넘쳤고, 오만하고도 피폐한 눈매와 입가에는 위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텐티아는 누군가 그가 선인이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젓겠지만, 그가 악인이냐고 묻는다면 과감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경은 너무 나서지 말게. 정말 위험할 때만 움직여 주게나.”
텐티아 역시 내심 세레라지에가 전투마법사 ‘워록’의 전투 교리를 익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투구 면갑을 내리며 발렌시아누스의 속삭임을 한 번 거절했다.
“기사가 되어 태만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네. 지켜봐 주게나.”
발렌시아누스가 물러서지 않고 뻔뻔하게 웃으며 텐티아에게 그의 뜻을 강요했다.
텐티아는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시라면.”
확실한 명령은 기사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창끝처럼 단단하게 제련해 주었다.
전 난민촌에서 대화를 나눈 뒤로, 발렌시아누스는 약간 달라졌다.
텐티아 역시 수많은 기사 소설을 읽었고, 그곳에 나오는 왕자들을 보았다.
망국의 어린 왕자가 사지를 넘나들며 옛 봉신들과 기사들을 모으고 왕관을 돌려받는 이야기.
망국의 어린 왕자를 따르는 기사들은 고결했지만, 어린 왕자는 때때로 고결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걸 왕자가 극복해야 하는 부족한 부분으로 보는 소설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통치자의 자질이라 보는 소설도 있었다.
텐티아는 생각했다.
‘발렌 전하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고결해질 수 있을까요? 당신께서는 고결해져야 할까요?’
어쩌면 체념한 것일지도 몰랐다.
성자를 납치하고 홍등가 지배인 따위를 위해 거래를 한 주군에게 질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이제야 발렌시아누스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던 거라면.
앞으로는 그가 조금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는 키메라를 판 상인들을 심문해서, 키메라로 지키는 게 무엇인지 확인한다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 * *
타앗, 나는 텐티아 경과 함께 건물 뒤에서 뛰쳐 나와 창고 입구를 향해 달렸다.
지기 시작한 벚꽃잎이 운하 변두리를 따라 휘날리고, 저 서쪽에서는 붉은 태양이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창고에 머무르는 가드나 상단 관계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수도 안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큰 창고에 아무도 세워놓지 않는다는 건 상정 외의 일이었다.
사실, 나름 예상가는 바가 있었다.
간혹 어떠한 물건들은 사람이 아니라 키메라들로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게 맞아떨어지면, 나는 한 번 더 막대한 금화를 만질 수 있으리라.
아니면 문짝 값 물어주고 끝나는 거고.
쾅!
텐티아 경이 어깨로 나무 문을 들이받았다.
소리를 듣자 하니 안쪽에 철판을 덧댄 강한 문인 거 같았지만, 기사의 돌진을 받아내지는 못하고 얇은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항복한 자 죽이지 않겠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르르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만 번뜩일 뿐.
사람 말을 하는 키메라를 만드는 건 아주 힘든 일이고, 그런 키메라를 만드느니 제자를 들이거나 호위병을 들이는 게 나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적당한 충성심과 적당한 지능이 필요한 일들이 있었다.
“전하, 이게 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는 않았고, 창고 문도 묘하게 서향이라서 빛이 들어왔다.
창고 2층까지 커다란 나무 상자가 들어차 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좁은 길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상자로 꽉 차 있었다.
답답해 보일 정도였다.
상자에서는 약간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향기와 참나무 숯 향기가 났다.
“밀수 연초입니까?”
텐티아 경이 혀를 찼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답일세. 텐티아 경. 얼마 전 우리가 밀수꾼들과 중간 상인들을 죄다 잡아 족쳤을 때, 큰손 하나가 잔뜩 겁먹은 모양이야.”
깡패들을 고용해서 지키려 해도 그들의 배신이 두려웠을 거다.
그들은 밀수 연초가 쌓여 있다는 걸 알자마자 제품을 빼돌려 밀매하다가 결국 꼬리가 잡힐 놈들이니까.
그렇다고 이 정도의 양을 무방비하게 두려니 잠도 오지 않았겠지.
“그래서 키메라였던 거군요. 상태가 좋지 않아도 일단 샀던 거고요.”
어둠 속에서 쇠사슬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머리 셋 달린 개가 달려 나왔다.
늑대만큼 큰 덩치에 전갈의 꼬리가 달린 괴물이었다.
나는 검을 뽑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루디.”
곧바로 발포음이 들려왔다.
퍼어엉!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의 발사음은 리볼버 마총 ‘아가테’보다 조금 더 낮고 웅장했다.
따로 술식을 새겨 보강한 마탄이 아님에도, 워낙 마탄 자체가 크고 마총에 새겨진 술식이 강해서인지, 그 위력은 막강했다.
퍽!
머리 셋 달린 거대한 짐승의 몸뚱이가 증발하듯 터져 나갔다.
“시이이익!”
“시이익!”
창고 안에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거미나 전갈 계열의 키메라들이 독침 달린 꼬리를 치켜들었다.
사마귀와 합쳐진 사람만 한 말벌이 붕붕 날아올랐다.
그리고 세레라지에가 내 옆으로 다가와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자기 역장.”
일반적인 역장은 유리창 같은 게 구형으로 몸을 둘러싸는 느낌이지만, 그녀의 스승이 개발한 마법은 달랐다.
푸른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우리의 주변을 감쌌다.
피슉! 피슉! 피슉!
돌벽에 막힐 정도로 빠른 독침이 푸른 안개 속에서 속도가 줄어들고 결국 바닥에 떨어졌다.
물이나 진흙 속을 통과하려다가 점차 느려지고 결국 멈추는 그 장면을 빠르게 본 거 같았다.
위이이이이잉!
사람만 한 말벌 네 마리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낫 같은 앞발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텐티아 경이 불안한 눈빛으로 검을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레라지에는 여전히 새침하고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말벌 두 마리가 급강하했다.
놈들이 푸른 안개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 불꽃이 튀었다.
번쩍!
구름 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 순간적이었다.
쿵!
사람만 한 말벌 둘이 그대로 여섯 다리를 오그라트리며 바닥에 떨어져 길게 미끄러지고, 고약한 탄내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은 두 마리는 그걸 보고 기겁하며 방향을 돌려 다른 상대를 찾았다.
이제 막 건물에서 나와 우리 쪽으로 오는 루디를 발견한 거다.
텐티아 경이 몸을 돌렸고, 나는 만약을 대비해 불꽃 마법을 캐스팅하며 고개를 저었다.
위이이잉!
“발렌 님에게 달려들지 않아 다행이네요.”
루디가 가벼운 발놀림으로 달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의 다리는 끝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긴 총열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퍼어엉!
마탄이 긴 오렌지색 궤적을 그리고, 거대한 키메라 하나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텐티아 경이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저 마총은 두 발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렇네.”
“그럼 이제 전하의 시녀는 무방비……!”
마지막 말벌이 상하좌우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루디에게 돌진했다.
그 사이에 루디의 공격이 곡선을 그리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루디는 씩 웃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재빠르게 탄을 재장전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총열이 중간에서 반으로 접혔다.
빙그르르 돌리는 동시에 두 발의 마탄을 하네스에서 꺼내 총구 뒤쪽으로 끼워 넣고, 찰칵!
총열이 다시 펴지고, 어깨에 개머리판을 가져다 대는 순간까지 녹색 눈의 초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표적을 놓치는 방법을 모른다는 듯.
기이한 궤적으로 날아든 말벌이 두 뼘짜리 침을 뽑았다.
덩치도 큰 놈이 재빠르기까지 하니 도저히 맞출 수가 없을 거 같았다.
루디는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파아앙!
수백 조각으로 깨지며 부채꼴로 쏘아진 마탄이 키메라의 온몸을 두드리고 갈기갈기 찢었다.
세레라지와는 다른 ‘확산’이었다.
루디가 내 곁으로 달려오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맞출까 고민하다가, 그냥 쏘면 맞을 마탄을 썼어요. 실전에서는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것보다 적을 해치우는 게 먼저니까요.”
나는 그 해맑은 웃음을 보며 답했다.
“잘했어. 루디. 앞으로도 그렇게 안전하게 싸워 줘. 만약에 누가 네 실력에 관해서 물어보면, 수백 발을 단번에 퍼부어서 모두 명중시킨 실력자라고 할게.”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으음. 그건 사기 아니니?”
텐티아 경은 나와 루디를 번갈아 바라보다 단호히 말했다.
“시녀는 그렇게 말해도 되지만, 전하가 그걸 긍정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 * *
늦은 밤, 텐티아는 창고로 달려온 교회 정화단 병사들에게 인사했다.
“이쪽입니다.”
“텐티아 경이 맞으십니까?”
병사들을 인솔하고 온 성기사가 텐티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예. 제가 텐티아입니다.”
성기사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죄악의 부산물을 거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 그런데 혹시 텐티아 경이시라면, 혹시 그…… 대공 전하의……?”
성기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들이 아는 발렌시아누스는 홍의주교를 추방하고, 성자를 납치하며, 압수품 연초를 빼돌린 대악당이었다.
그를 따르는 붉은 머리의 기사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성기사들 사이에 유명했다.
“예. 저는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기사는 그 얼굴만큼이나 늠름한 목소리로 답했고, 성기사는 기사가 주인을 잘못 만났다는 사실에 한탄하며 연초들을 확인했다.
양은 어마어마했지만, 질은 평범했다.
그래도 이 정도 양을 확보해둔 이상, 연초 밭 몇 개를 휴경지나 농경지로 돌릴 수도 있을 터였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텐티아 경. 경께서는 진정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교회의 수호자이십니다.”
“성기사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광명의 뜻이 그대에게 깃들기를 바랍니다.”
텐티아는 성기사와 마주 고개를 숙이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감추었다.
고급 연초들을 들고 간 건 검은 정장 입은 ‘여명’ 카지노의 가드들이었다.
그들이 누구를 따라왔는지는 너무나 명백했고, 그걸 판 돈의 일부가 누구 주머니로 들어갈지도 너무나 명백했다.
그래 놓고 남은 일반 연초를 신고해서 교회 포상금까지 받으라니, 그녀의 주군,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분명 행동하는 비양심이었다.
그러나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를 진심으로 원망하지 못하는 건, 그가 직접 교회에 연초를 넘겼으면 그 수많은 악명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모든 영광을 넘겨주고, 홍등가 지배인과 붙어먹는 타락한 영혼의 모습만을 보였다.
텐티아는 실없이 웃으며 창고를 떠났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가 저지른 수많은 패악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 그녀에게 적과 명예를 주었다.
기사에게는 물과 빵, 빛과 소금만큼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