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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6화 (162/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6화

(146)

4월 말,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는 문득 일어나자마자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이미 겪어본 일을 또 겪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1년이 지났네.”

고작 1년이 지난 건지, 1년이나 지난 건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게 바뀌었다.

루디가 살았고, 미래의 소드 마스터 텐티아 경은 내 기사가 되어 황실에 남았고, 미래의 대마법사 세레라지에 역시 황실에 들어왔다.

홍등가, 빈민가, 상아탑 자치구, 배움의 거리, 마법 거리 모두가 내 손 안에 들어왔거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 전쟁을 일으켰던 플라니티에스 후작에게는 충성 맹세를 받을 수 있을 거 같았고, 프로이하이트 후작은 아예 바뀌었다.

북부 대공에게는 막대한 식량을 원조해 주었고, 성자 마테오스가 10년 먼저 탄생해 광명 교회를 친 황실파로 만들며 제이릴리스의 권력을 다져주었다.

즉위한 지 1년 만에 전쟁터로 떠났던 황제는 지금 황궁에 남아 제국의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이만하면 꽤 알찬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되리라.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루디가 주는 따듯한 물로 입을 헹구고, 물 적신 수건으로 몸에 묻어나온 노폐물을 닦아냈다.

어제 밤 별궁으로 돌아와서 제이릴리스가 내려 준 ‘화정’을 독한 술에 녹여서 먹었더니, 밤새도록 몸이 펄펄 끓고 걸쭉한 땀이 미친 듯 흘렀다.

속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는 거 같았다.

용찬 의식을 했을 때와 달리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새벽에 탈진하고 일어나 보니 이렇게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발렌 님. 이제 괜찮으세요?”

“응. 상쾌해. 날아갈 거 같다.”

루디의 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려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반나절쯤 혼절한 게 아닌 거 같았다.

“루디. 나…… 며칠이나 잤어?”

“오늘로 사흘째세요.”

“아.”

맙소사.

제대로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사흘간 굶었으면 몸 상태가 이 모양일 만도 했다.

루디가 오만 가지 감정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미안해.”

“허리를 까뒤집으시면서 발광을 하시는데…….”

회귀 전에 ‘화정’을 먹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용찬 의식이 몸을 많이 바꿔놓은 거 같았다.

그 체질이 또 한 번 더 바뀌려니 심하게 앓았던 거겠지.

이렇게까지 걱정시켰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사과하고,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빵 먹고 출근해야지.

* * *

오늘 제이릴리스는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높이 25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둥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바닥에는 대리석과 색색의 수정이 깔린 그곳.

한 기사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완고한 인상에 질끈 묶은 갈색 머리와 긍지 높은 푸른 눈동자.

화려한 수도의 모습에 내심 압도된 듯하나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듯 한껏 편 가슴.

대대로 물려받으며 수백 개의 자잘한 흠집이 난 전신 판금 갑옷과 수십 개의 훈장과 문양으로 장식된 혁대.

수도 장인이 아니라 영민들이 한땀 한땀 만든 듯 다소 투박한 깃발까지.

자기 마을을 다스리는 봉신 기사의 모습이었다.

“……황제 폐하께 도움을 청하겠사옵니다. 저희가 되려 손을 벌려 죄송하나, 권위와 구심점이 절실하옵니다.”

미사언구 없이 투박한 말에 궁정 귀족 행정관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기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말을 알아듣기 쉽게 하는 건 기사의 미덕이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발렌 대공.”

낭랑한 목소리가 알현실 전체에 마법처럼 울렸다.

“중부의 봉신들이 황실의 오랜 무관심으로 여러 방면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한다.”

나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대영주들이 끌어들여야 할 자들이라면, 그들은 지켜 줘야 할 이들이다.”

정확한 비유였다.

수도 솔레타라온이 먹어 치우는 막대한 곡식을 납세하고 있는 게 중부의 남작과 기사들이었다.

“고등재판소의 법관을 붙여 줄 테니, 중서부의 남작령들과 기사령들을 순회하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도록 해라.”

“명령 받들겠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장기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루디에게 짐을 부탁하고, 텐티아 경을 불러 장기 근무를 예견하고, 세레라지에 누나에게 한동안 수도를 떠날 거라고 이야기했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집무실로 올라가니, 제이릴리스는 이례적으로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은 모습에 공기까지 굳어버린 듯했다.

“발렌. 이 중대한 일을 그대에게 맡긴다는 게 실로 두렵구나. 그대의 특기인 임기응변이 아니라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이번에도 폐하가 바라는 걸 가져오겠사옵니다.”

무엇을 바라는지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제이릴리스가 이제는 돌려 말할 줄도 아는구나, 하고 중얼거린 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짐은 대귀족들이 충성 맹세를 하려고 올라왔을 때 반드시 난리가 나리라고 생각한다.”

“!”

“그들이 수도로 오는데 미쳤다고 와이번을 타고 오겠느냐? 기사와 봉신들을 있는 대로 소집해 수천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올라올 것이다.”

그런 영주 수십 명이 모이는데 난리가 안 날 수는 없었다.

“짐은 대륙 최대의 기사단을 거느렸지만, 그들로도 수가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이제야 와서 황동기사단을 시켜 징집해 봐야 헛일이지. 징집병 수준으로는 피가 물처럼 흐를 게 뻔하다.”

기사는 군대로는 상대할 수 있었지만, 병사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도 봉신들을 소집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그래. 그들이 마음 편히 영지를 두고 수도로 올라올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음성에는 미약한 떨림마저 어려 있었다.

제이릴리스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지금껏 피가 덜 흐르고, 덜 시끄러울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즉, 제이릴리스는 언제나 마지막 수단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다른 수단 없이, 정직히 성공시켜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게 어울리는 일은 아닌 모양새였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란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 주는 게 내 일이었다.

“예. 폐하.”

제이릴리스가 혀를 찼다.

“……조금 더 고민하고 답하지 그러느냐? 너무 칼같이 답하니 불안하구나.”

나는 더더욱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폐하의 충신들에게 제가 패악질을 부릴 이유가 없사옵니다. 영지에 안정을 주고 오겠사옵니다.”

그녀는 그 단어를 듣고서야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그래. 안정을 줘야 한다.”

“저는 빈민가에도 안정을 만들었사옵니다. 마음 편히 기다리십시오.”

내가 몸을 돌리려 했고, 제이릴리스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었다.

“……화정을 먹다 죽을 뻔했다고 들었다. 설마 그걸 한 번에 먹었는가?”

화정은 원래 한 번에 먹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예. 폐하.”

“그 정도 크기의 화정을 한 번에 먹으면 타 죽을 수도 있도다. 용찬 의식이 아니었다면 죽었겠구나.”

제이릴리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예?!”

“그곳에서는 그리 무식하게 굴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폐하.”

나는 다시금 고개를 깊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대공 전하. 마르넨의 아들 마르손이라 합니다.”

기사 마르손은 발렌시아누스를 정중하게 대했다.

말머리도 나란히 못 하고, 얼굴도 못 들고, 발렌시아누스가 탄 말의 그림자도 못 밟을 정도였다.

텐티아는 그가 그렇게 저자세로 구는 이유를 이해했다.

황실은 직할령을 둘러싼 광활한 영토를 남작들에게 잘라 나누어주었다.

그곳에서는 기사만 되어도 밑에 대관, 촌장, 마름을 두고 넓은 땅을 다스렸고, 남작들이 왕 노릇을 했다.

그녀도 처음 수도 아카데미에 유학을 왔을 때, 백작, 후작의 자제들이 발에 치이는 게 너무나도 놀랍고 황망했다.

백작의 첫째는 남작 작위를 받는다.

당시의 텐티아는 하늘 같은 아버지가 모시던 남작님과 지금 자기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깨지고 바닥을 구르는 동기가, 같은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땅도 영민도 없는 궁정 귀족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마르손 역시 오랜 시간이 있어야 그걸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중서부.’

텐티아는 그리우면서도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열다섯 살에 칼 한 자루 차고 수도로 올라간 뒤로 처음 고향 가는 길을 밟는다.

시골 기사의 둘째 딸로 태어나 제국 제일의 기사단에 들었고, 지금은 수도 제일의 유명 인사를 섬기고 있다.

아버지의 영지를 통째로 팔아도 못 살 갑옷을 입고 보검을 찼으니, 출세해서 돌아간다고 말 할 수 있었다.

마냥 기쁘지 않은 건, 발렌시아누스의 뒤를 따르는 저 깐깐한 인상의 법관 때문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님. 고등재판소의 법관이자 순회판사로서 남작들과 기사들의 분쟁에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제 대표 경력은 20년을 이어온 하엘룬 백작령의 상속 분쟁을 끝낸 것이며…….”

제국에는 법이 크게 세 개 있었다.

교회가 만든 교회법, 황제가 만든 제국법, 지역마다 달라지는 관습법이었다.

그 시골 기사들과 남작들은 당연히 관습법을 따랐고, 그나마도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분쟁이 생기면 남작을 찾아간 뒤, 그 앞에서 대판 싸우고 저녁에 술 한잔하며 내가 미안하네, 내가 미안하네, 사과하고 웃으며 돌아가고, 한 달 뒤 같은 이유로 다시 싸우는 곳이었다.

저 깐깐한 인상의 법관이 말보다 칼이, 논리보다 타협이 앞서는 그곳의 법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타협.

발렌시아누스가 제일 잘하는 것.

수백 년씩 이웃해 온 영지들이다.

한 번 분쟁이 발생하면 상대를 완전히 끝장내거나, 아니면 그냥 계속 다투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느 선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런 걸 무척 잘할 거 같다.

텐티아는 그제야 자신의 마음속 불편함을 완전히 자각했다.

그녀는 공명정대함이나 원칙이 아니라, ‘원칙을 따르는 기사’라는 자신의 모습에 낭만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 따를 원칙은 무엇이든 좋을지도 몰랐다.

‘무슨 잡생각을!’

그걸 인정하는 순간 발렌시아누스를 갱생시킬 수 없을 거 같아서, 텐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그를 죄악과 위선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야 했다.

그는 충분히 더 빛날 수 있는 자였다.

* * *

남작의 성 앞 공터에 천막이 쳐지고, 의자 몇 개가 놓였다.

임시 재판소가 열리고, 기다리던 기사와 남작들이 몰려들었다.

“……따라서 상속법상 이 농장은 루비두스 경의 영토입니다.”

법관은 침착하게 고소장을 읽고 상황을 분석한 뒤 법령과 판례에 따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의로운 판결을 내렸다.

“입 닥쳐라! 어린 것아.”

그러나 이곳은 이성과 합리, 정의가 아니라 우정과 권위, 그리고 명예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가 수호하시는 법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법관은 기사의 폭언에 기겁하며 반발했지만.

“우리 가문은 7백 년째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다.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충성을 논하느냐!”

세월의 명예와 권위를 등에 업은 기사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법관은 소드 엑스퍼트의 살기를 정면에서 얻어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으음.”

나는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고등재판소가 권위를 가진 이유는, 오랜 싸움에 지친 대귀족들이 알아서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나서 거들먹거리는 법관이, 수천의 영민을 거느린 기사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나는 법관의 얼굴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문질러 깨워 주고, 내 옆에 앉힌 뒤 양피지와 펜을 쥐여 주었다.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게. 그리고 마지막에 판결문 써서 각자 나눠 주고.”

“예?”

“시키는 대로 하게. 살고 싶으면.”

나는 우선 법관의 입을 묶어 놓고, 물 흐르는 듯 판결을 내렸다.

회귀 전에도 이 명예에 죽고 사는 자들을 여럿 상대해보았다.

“양털은 루비두스 경이 가지고 양고기는 리도브 경이 가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서로 바꾸어도 된다.”

“봄에 수확한 보리는 센실 경이, 가을에 수확한 밀은 엘지드 경이 가진다. 또한 이웃끼리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툰 죄를 물어 서로의 병사들에게 만찬을 대접하라.”

“물레방앗간은 한 남작의 것이다. 그러나 하천이 렌시드 경의 것임으로 매년 사용료를 지급하라. 단, 사용료는 물레방앗간 이용권으로 대신할 수 있다.”

“제국은 장자상속제이다. 그러나 기사령과 남작령은 기사 작위를 가진 자가 우선 상속권을 가진다. 아들이 서른까지 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영지는 딸의 것이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물러섰다.

“대공 전하의 판결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리 합의하겠습니다.”

“정당하십니다.”

텐티아 경이 적잖이 당황한 듯 목소리에 삑사리까지 내며 작게 물었다.

“전하. 제국법에 대해 잘 아십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다네.”

“예?!”

기사를 상대할 때 중요한 건 우정과 권위, 그리고 명예와 낭만이었다.

“어차피 법대로 판결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저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게 중요하지.”

“그게 무슨!?”

텐티아 경이 기겁한 순간, 남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전하! 재고해 주십시오!”

나는 눈을 부라리며 그를 향해 외쳤다.

“감히 제국의 대공이자 황형인 내 판결에 불만을 품느냐!”

유감스럽게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제 영지의 기사들이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에게 돌아가서 이대로만 전하거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남작의 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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