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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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그 역시 수도 시민이었고, 발렌시아누스의 막장 행보에 관해서는 익히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와이번을 타고 교회 담 안에 날아 들어오며 성자를 던져놓고 날아가는 걸 봤을 때는 정말 기절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법관이었다.
제국의 온갖 더러운 인간군상들과 송사들을 제일 가까이서 보는 자였다.
돈과 힘이 있는 귀족들은 젊은 시절에 한 번쯤 막 나갔다.
빈민가 인간 사냥 정도는 그 ‘막 나가는 일’에 끼지도 않았으니, 그 막장성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도 같은 귀족이나 성직자는 건들지 않았다.
그들이 평민들이나 빈민들을 상대로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저지르는 건, 그래도 무사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대귀족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목을 자르고 그 딸을 범한 뒤 후작위에 앉혔으며, 성자를 납치하고 교회가 경원시하는 와이번을 타고 교회 담 안에 발을 들였다.
이건…… 진짜로 미친 거였다.
뇌 손상을 의심해 봐야 할 정도였다.
여기서는 조금 얌전하게 굴 거 같았다.
사방이 엘프와 오거의 피를 물려받은 소드 엑스퍼트들로 가득하니까.
그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충 뒷사정과 감정이 얽혀있는 걸 알면서도 철저하게 법대로 판결을 내린 이유는, 저 인간 흉기들이 따지고 들 명분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시골 영주들이 기분을 명분 삼는다는 걸 몰랐던 게 유일한 실수였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뺨을 친 이상 결투 신청을 받을 게 뻔했다.
결투는 방금 같은 상황을 안 만들기 위해 있는 제도였다.
권력 있고 돈 있다고 사람 함부로 깔보다가는 칼 맞을 수 있다는 거다.
뺨을 맞은 남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전하. 그들에게 똑똑히 전하겠습니다.”
“!?”
법관은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괜찮은…… 아니. 이만하면 훌륭한 판단이셨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뒤에 서서 생각했다.
중부의 남작 가문들과 기사 가문들은 제국 건국기부터 황제를 따라 말을 달리던 자들이었다.
그녀의 가문에도 가문의 시조가 제국 초대 황제와 연회장에서 건배했던 잔이 가보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역사가 깊고 자존심이 강한 만큼 사소한 문제에도 실리가 아니라 자존심으로 반응했다.
판결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여도 자존심이 안 상할지, 였다.
발렌시아누스는 황형이었고, 황족 특유의 백금발과 짙은 금안을 모두 물려받았으며, 권위적인 정장을 입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고, 제이릴리스 황제의 총신 중 하나로 꼽혔다.
수백 년간 황실을 섬겨 온 남작들과 기사들이 머리 숙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농장이 중요한 게 아니고, 물레방아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저놈에게 굴하냐 마냐가 중요한 거다.
문제는, 그렇게 자존심으로 시작한 싸움은 쉽게 멈출 수도 없다.
‘누가 이제 좀 말려줬으면.’
‘억지로라도 떼어 줬으면.’
텐티아 역시 아카데미 시절, 동기들에게 그런 부탁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내일 그놈에게 결투 신청할 건데, 진짜 싸울 생각은 없어. 분위기 너무 험악해지면 네가 좀 말려 주라.’
물론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이 자식들이 감히 신성한 결투로 장난질을 치려고 해?’
하여튼 발렌시아누스와 저 남작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내용은 제 영지의 기사들이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아까 말도 자세히 떠올려 보면, 자기가 납득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밑의 기사들이 납득하지 못 하리라는 말이었다.
즉, 그 남작이 필요한 건 밑의 기사들을 설득할 핑계였다.
‘대공 전하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내 뺨을 치시더군.’
그가 돌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거였다.
텐티아 역시 머리 쓰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특기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시련과 전투, 명예만을 원했다.
‘발렌 전하를 앞으로 그분이 친 모든 사고의 후폭풍에서 구해낸다면, 충분히 역사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기에 텐티아는 명예와 체면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약간의 혜안이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본인이 창대를 짊어지셨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다음 순서로 두 남작을 불러 앉히며 자신이 뺨을 친 남작을 바라보았다.
‘많이 아팠으려나?’
용찬을 한 뒤로 가끔 힘 조절이 안 될 때가 있었다.
‘화정’까지 먹어서 더 그랬다.
말 타고 오는 길에도 몇 번 떨어질 뻔했다.
‘그래도 표정 보니 마음에 드는 결말이었던 거 같네.’
그는 내부를 결속시키는 게 외부의 적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의 봉신인 기사들은 남작이 황실에 곡식 매입가격을 올려 달라고 간언하지 않던 일에 불만이 있던 거였다.
여기서 남작이 대공에게 맞고 돌아오면 기사들은 다시 남작 편으로 돌아서서 그를 욕할 거였다.
‘외부의 적 중 제일 좋은 건, 높으신 분이지.’
황제를 위하여, 저 빼어난 남작과 기사들이 올여름에 마음 편히 수도로 올라올 수 있기를 위하여.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이래서야 불로불사를 손에 넣을 수 있겠군.’
* *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발렌시아누스는 이 남작령에서 저 남작령으로 이동하며 기사와 기사 간, 남작과 기사 간, 남작과 남작 간 소송을 처리했다.
필요한 건 정의가 아니라 권위였고, 발렌시아누스는 권위적으로 구는 거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짝!
“감히 대공인 내 판결에 남작 따위가 토를 달아!”
그 말을 서른 번쯤 더 했을까?
길게 늘어서 있던 기사와 남작들의 줄도 끝났다.
“발렌 전하. 이제 끝입니까?”
“한 가지 일이 남았네. 송사로서는 끝났지만, 토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토벌 말씀이십니까?”
텐티아는 의아하다는 듯 붉은 눈썹을 위로 세웠고, 발렌시아누스는 언덕 위 세워진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르손 경이 말하더군. 이곳에 그린스킨들이 흘러들어왔다고.”
“아.”
그녀는 늠름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린스킨.
고블린과 오크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고블린 몇 마리는 마을 청년들 수준에서도 처리할 수 있지만, 대형 오크 호드(Horde)가 나타나면 대영주들도 목덜미를 잡았다.
번식력이 강해서 금방 늘어나기에 시골 기사들의 주된 적이었고, 텐티아 역시 그린스킨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피해가 크지는 않았겠지요?”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 제때 막았다는군. 문제는 박멸한 게 아니라 서로 쫓아내기만 해서 놈들이 계속 일대의 영지를 오가며 피해를 준 모양이야. 이제는 아예 숲 하나를 거점 삼아 활동하고 있다는군.”
텐티아는 의분이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걸 느끼며 말했다.
“토벌하실 생각이십니까? 부디…….”
이번에는 발렌시아누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걸 하려고 온 느낌이네. 남작이 셋이나 끼어 있다 보니 작전을 다 세워놓고 누가 주도할지를 두고 싸웠다는군. 그들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아닙니다. 누가 토벌 작전을 이끄는지는 기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니 평소와 반대가 된 기분이군.”
발렌시아누스가 나른하고 능글맞게 웃었다.
텐티아는 방금의 발언이 평소 발렌시아누스가 하던 말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그 늠름한 얼굴을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전하. 기사를 놀리지 마십시오.”
“하하. 알겠네.”
발렌시아누스가 양손을 들었다.
텐티아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럼 이번 작전은 전하가 주도하시는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불을 피우고 연기로 몰아내는 걸 내가 맡을 예정이네. 지휘관을 맡을 사람은 따로 있어.”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토벌이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생각해놓은 인사가 있었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고, 노력도 했으며, 운도 따랐고, 무엇보다 지휘를 무척 즐겼다.
무척 목말랐을 테니, 한 번쯤 물을 실컷 들이켜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제이릴리스는 홀로 움직일 때 진가를 발휘한다. 대군을 맡길 사람이 필요해.’
“키이이이익-!”
저 하늘 위에서 아득한 와이번 울음소리가 울렸다.
천막으로 모이던 남작들과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탐스러운 금발과 붉은 눈을 가진 황족.
8인의 생존자.
회귀 전 발렌시아누스에게 검과 전술을 가르쳤던 장교이자 기사.
황동기사단의 헬레나였다.
* * *
‘토벌 작전을 이끌어보고 싶나?’
‘뭐?’
‘남작 3명, 기사 15명에서 많게는 25명. 종자들이랑 향사들 포함하면 기병은 최대 100기까지도 예상. 보병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 1,000명. 거기에 황족 화염 마법사 한 명. 어때?’
헬레나는 발렌시아누스의 제안을 받고 당황했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이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혹시 이게 은근히 떠보는 일일지도 몰랐다.
받아들이면 군대에 욕심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으로, 그걸 반역 음모로 몰아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제안이었다.
혹시 놓친다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헬레나는 지도 위 올라간 워게임용 모형들과 점수 계산용 종이를 흘겨보았다.
언제까지 이것만 붙들고 있기는 싫었다.
여기까지 감정과 판단이 휘몰아치는 데 걸린 시간이 0.4초.
‘하겠어.’
그리고 지금 헬레나는 3명의 남작과 20명의 기사 앞에 서 있었다.
“발렌 대공이 숲 동쪽에서 연기를 피워 놈들을 숲 밖으로 몰아내고.”
처음으로 검을 쥐었을 때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던 거 같았다.
질끈 묶은 금발 머리에는 붉은 보석 박힌 티아라를 썼고, 매끈한 황동색 갑옷으로 늘씬한 몸을 둘렀다.
달아오른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터스켄 남작이 중앙에서, 제체르 남작이 좌익에서, 하스터 남작이 우익에서 적을 맞이할 것이다.”
“탈출하는 놈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놈들의 본대는 기병만으로 상대한다. 보병들은 10인 단위로 나뉘어 도망치는 놈들을 주살하고, 궁수들은 언덕 위에서 사격한다.”
어린 나이, 생채기 하나 없는 갑옷, 달아오른 뺨, 긴장인지 흥분인지 모를 감정으로 떨리는 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의심 어린 눈길과 허점을 지적하는 질문.
그것마저도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늑대 기수나 멧돼지 기수는 보병만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포위망 쪽으로 기사를 두 명 차출하겠다. 본대에서 두 명 빠진다고 큰 문제 될 건 없겠지.”
“숲에 남은 잔당도 처치해야 합니다. 이때는…….”
“당연히 하마(下馬)해야지. 천천히, 확실하게 간다. 발렌 대공이 피워올린 연기가 남아 있을 테니 물에 적신 수건을 충분히 준비하도록.”
“병사들의 무장 역시 창에서 도끼 등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의견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하지.”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는 남작들, 기사들과 뒤엉켜 작전을 세우는 헬레나를 보며 웃었다.
“지금까지 답답해서 어떻게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생 새장에 갇힌 새는 자기가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사실도 잊기 마련이지.”
발렌시아누스는 이번 토벌의 성패와 관련 없이 헬레나의 열정이 더 강해지리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회귀 전 헬레나는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전술과 전략을 복기하며 최고의 수를 만들어나갔다.
그때 언덕 아래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입니다. 한 명이 늦었나 봅니다.”
텐티아는 그가 기수를 앞세우고 있는 걸 보고 금세 신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깃발에 수놓아진 문양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
반가움인지 경악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역시 그 문양을 본 적이 있었다.
검은 바탕에 그려진 세 개의 붉은 눈.
텐티아의 가문에서 쓰는 문양이었다.
천막을 수십 걸음 앞두고 말에서 내린 기사가 투구를 벗고 있던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텐티아?”
그는 다급하게 투구를 벗으며 텐티아를 꼭 닮은 늠름한 이목구비를 드러냈다.
“오빠? 왜 아버지는 안 오시고……?”
세 남작은 휘하의 모든 봉신 기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대공이 둘이나 왔으니 반드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는 건 세 가지 중 한 의미였다.
반역, 죽음, 기사로서 살지 못할 정도의 치명적인 부상.
“전투 중 낙마하셔서…… 정신을 잃으셨다.”
셋 모두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