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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8화 (164/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8화

(148)

작전 실행일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텐티아 가문의 영지는 멀지 않았으며, 기사의 승용마도 보통 말보다는 두 배 이상 빨랐다.

나는 헬레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텐티아 경의 영지로 출발했다.

“아닙니다. 전하. 작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차피 다들 병사들 데리고 와야 해서 한 번은 돌아갔어야 하네. 신경 쓰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그는 텐티아를 꼭 닮은 기사였다.

키는 발렌시아누스와 비슷했고,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늠름하고 처연한 분위기까지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 길이였는데, 여동생 텐티아는 머리를 쇼트커트로 잘랐지만, 그는 붉은 머리를 길게 길러 묶고 있었다.

“렌티아 경이라고 했나? 동생을 많이 닮았군. 아니, 그 반대인가? 하여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텐티아 경은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다네. 나를 위해 북부 대공의 기사들에게도 달려들었지. 고마울 따름이야.”

렌티아 경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기겁했다.

“예?!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정말로 세베릭 대공을 암살하시려 한 겁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대체 왜 이 시골에까지 그런 소문이 퍼진 건지 모르겠군.”

“제게 그리 고마우시다면, 제 말을 좀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부르주아 따위들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텐티아 경이 붉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렌티아 경이 기겁하며 텐티아 경에게 소리쳤다.

“대공 전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제가 수도에서 본 대공만 300명이 넘습니다!”

“그래도 대공 전하시잖느냐! 기사의 본분을 잊지 말아라.”

텐티아 경이 말 위에서 나를 돌아보고 머리를 숙였다.

“전하. 실례했습니다.”

렌티아 경이 기겁하며 그게 무슨 짓이냐는 듯 따졌다.

“무슨 예절에서 말 위에서 사과하라고 하느냐? 수도 아카데미에서는 그렇게 배웠느냐?”

“거기서는 사과하는 법 같은 건 배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못해 놓고도 상대에게 사과받을 수 있는지 배우죠.”

“내 동생이 망나니가 되어 돌아왔구나! 당장 말에서 내려 대공 전하께……!”

나는 나지막하게 렌티아를 불렀다.

“렌티아 경. 되었네.”

“전하! 이런 무례를 넘어가신다면 전하의 위신과 체면에 큰 흠이 날 것입니다.”

역시 위신과 체면과 명예에 목숨을 거는 기사들다웠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기사면 그 정도는 해도 되네. 나를 위해 목숨 건 기사가 그 정도 친근감을 표현한다고 깎일 위신이면 없는 게 낫지.”

수도에서는 사람들이 술집마다 내 악명으로 돌림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깎일 위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한 말이었는데, 렌티아 경은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텐티아. 좋은 주군을 만났구나.”

텐티아 경은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마 나를 좋은 주군이라고는 못 말하겠다는 거 같았다.

“예. 발렌 전하께서는…… 아주 실행력이 좋으시고, 영광을 돌릴 줄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면 되지 기사가 왜 그리 말이 기냐?”

렌티아 경이 옅게 웃었고, 텐티아 경은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

“거의 다 왔군요. 저 나무를 기억합니다. 많이 자랐네요.”

텐티아 경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늘 늠름함이 앞서던 얼굴에 회한 어린 그림자가 차올랐다.

그녀는 15살 즈음에 수도로 왔고, 그동안 한 번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역시 그때가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영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하천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들판에 까마득하게 뻗은 보리밭과 밀 이삭, 언덕 위를 거니는 소와 양, 거대한 풍차와 물레방앗간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소도시였다.

긴 성벽, 언덕 위 우뚝 솟은 영주성, 농민들의 집과 건물들 모두 벽을 하얗게 칠하고 붉은 지붕을 올려, 무척 깔끔해 보였다.

규모를 보아하니 인구는 5천 정도 되어 보였는데, 제국 외의 나라에서는 도시로 분류될 규모였지만, 제국에서는 일개 기사령에 불과했다.

텐티아 경이 아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떠나던 그대로입니다.”

“이 성벽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한계가 있지. 그래도 정착촌은 많이 늘었어. 대관, 촌장, 마름이 이제 서른도 넘는단다.”

“아버지께서는 좋은 영주셨으니까요. 화장하셨습니까? 교회는 싫어하겠지만,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렌티아 경이 당황하며 눈을 부릅떴다.

대단한 실수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예?”

“아버지는 낙마하셔서 다리를 다치셨지, 돌아가신 게 아니란다.”

텐티아 경이 이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나 역시 거의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거 같다.

“이 빌어 처먹을 오라비 새끼가!”

“렌티아 경! 헷갈리게 말하지 말게!”

* * *

텐티아 경은 그 뒤로 언덕 위에 솟은 영주성에 들어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골 소도시라서 그런지 렌티아를 따라온 나와 텐티아 경에게 다들 관심이 많아 보였다.

“보세요. 저 하얀 제복에 붉은 띠.”

“엄청 높으신 분 같은데. 저 브로치는 황족분들만 쓰실 수 있는 거 아니여?”

“눈도 황금색이에요.”

“근데 옆에 다른 기사분은 누구래?”

“눈독 들이지 마라. 백금 기사시잖아. 저 갑옷 한 벌이면 우리 영지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거다.”

“설마 황족 나리가 우리 영주님을 찾아온 걸까요.”

“어어! 투구, 투구 벗으신다.”

“어?”

“어어?”

“테, 텐티아 아가씨 아녀?”

“세상에…… 백금 기사가 되신 거여?”

“옆에 계신 분이 황족 나리 맞네. 백금 기사가 황족 근위대를 이끌잖나.”

“아이고. 우리 아가씨 엄청나게 출세하셨네.”

나는 텐티아 경을 향해 슬쩍 웃으며 말했다.

“경. 손이라도 흔들어 주게.”

“괜찮습니다. 전하.”

“언제 또다시 오겠나?”

“…….”

“저들이 뭔 잘못인가?”

내 웃음을 본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왜 저렇게 무섭게 웃으신다냐?”

“그러게요. 심장에 위험하네요.”

“무서운 건지 설레는 건지 둘 다인지.”

“텐티아 아가씨에게 뭐라고 하신 거 같은데…….”

“혹시 두 분이……?”

황족과 기사의 로맨스를 다루는 소설은 어디서나 유행이었다.

텐티아 경이 혀를 차며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내가, 돌아왔다!”

마을 전체에 울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소드 엑스퍼트 특유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사람들이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내 고향아. 오래 머물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그대로인 걸 보니 반갑구나.”

나와 사람들의 입을 닫기 위해 시작한 말이겠지만, 점점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너를 떠날 때 나는 칼 한 자루와 소개장 하나 든 어린아이였지만, 네게 돌아온 나는 백금 기사가 되었구나.”

금의환향(錦衣還鄕).

출세해서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저 갑옷은 표면에 백금을 입혔으니, 금의(錦衣)는 아니지만 금의(金衣)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실제로 비단 농장 수십 개는 살 수 있을 값이고.

금의환향한 텐티아 경의 표정은 밝았다.

그러나 그녀의 붉은 눈동자 안에는 묘한 비틀림이 어려있는 거 같기도 했다.

내가 그 이유를 알아챈 건 붉은 성에 들어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난 다음이었다.

* * *

텐티아는 가슴을 당당히 펴고 턱을 든 체 성에 발을 들였다.

움직일 때마다 육중한 갑옷이 철커덩거리고 사용인들이 불안에 찬 시선을 보냈다.

성주와 인사할 때까지는 갑옷을 벗지 않는 게 기본이었다.

물론 딸로 돌아왔다면 아무 상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딸로 떠나보내지 않았는데, 자신이 어찌 딸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렌티아는 성 안으로 달려갔고, 오래지 않아 붉은 성의 성주가 나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기사 제스터가 인사 올립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짧고도 단정하게 정리한 붉은 수염, 완고하고도 뚜렷한 인상의 사내.

인구 5천의 도시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거느린 기사였다.

그는 왼쪽 다리에 부목을 대고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발렌시아누스 앞에서 곧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일어나게! 몸도 성치 않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기사가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것도 불충이야.”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제스터를 일으켜 세웠고, 제스터는 그제야 딸에게 몸을 돌렸다.

“…….”

“…….”

“아, 제스터 경. 안녕하십니까. 텐티아라 합니다. 다쳤다는 말을 듣고 위로의 말씀이라도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텐티아는 아차, 하며 입을 열었다.

신분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이상, 다른 기사의 성에 찾아갔으면 먼저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 도리였다.

“텐티아 경. 명성 높은 백금기사를 뵈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집처럼 편하게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이 기묘한 부녀를 보며 생각했다.

‘대충 알 만하군. 렌티아 경도 실력은 괜찮아 보였다. 작은 기사령에 나이 차도 크지 않은 출중한 아들딸이 있다, 라…….’

그의 경험상, 그건 한쪽의 실력이 모자란 것만도 못했다.

땅은 하나고 자식은 둘이면, 한쪽은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내보내거나, 아예 검을 가르치지 않기도 했다.

이 집안도 황실 못지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제스터 경.”

“예. 대공 전하.”

“남작의 동원명단에 그대 이름이 있더군. 나는 경이 그 몸으로 의무를 다할 수 없어 보이네. 이번 소집령에서 경은 방패세를 내고 빠지는 게 어떠한가?”

제스터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제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여전히 말을 타고 창을 쥘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제의 치료를 받을 테니 내일이면 완전하지는 않아도 싸울 수 있겠지요. 그린스킨들과의 싸움에서는 돈보다 머릿수가 중요하지요. 기사가 되어 태만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신념이 어린 어조였다.

발렌시아누스가 말을 고르는 사이, 텐티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기마 돌격 후 하마 전투입니다. 제스터 경. 그 몸으로는 안 됩니다. 발렌 전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가문의 종군의무는 제가 지겠습니다.”

어쩔 수 없고, 이게 합리적이라는 듯한 어조였다.

제스터는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딸은 여전히 거짓말을 못 했다.

“이미 섬기는 주군이 있는 몸이 함부로 나서겠다는 건 불충이고, 신성한 종군의무를 함부로 대신하겠다는 건 모욕이지. 텐티아 경. 말을 가려 하시게.”

그도 그랬다.

“아버지!”

기사들은 욕망에 솔직한 걸 미덕으로 알았다.

거짓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이미 한번 다치셨으면서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몸 사리십시오!”

그래서 쉽게 진심을 토했다.

텐티아는 붉은 성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제가 뭐가 되었는지 보십시오! 제국 최고의 기사단에 들어갔고, 소드 엑스퍼트가 되었고, 지금은 황형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여전히 그녀를 봐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제스터는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랬느냐, 라고 말하는 듯 웃었다.

“의무 앞에서 믿음과 불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텐티아는 그 말을 듣고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논리였다.

발렌시아누스 역시 저런 어조에 대해 잘 알았다.

그가 주로 정을 뗄 때 많이 쓰는 말이었다.

그는 적당한 순간에 끼어들어 단조롭게 말했다.

“이 집안도 우리 집안 못지 않군.”

“추한 꼴을 보여 송구합니다. 전하.”

“제스터 경. 텐티아 경은 내가 본 기사 중 제일의 재능을 가졌다네.”

“부족한 아이를 높게 쳐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잠시 이야기할 수 있겠나.”

“대공 전하와의 독대라니, 망극할 뿐입니다.”

* * *

발렌시아누스는 황족이었고, 그는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말하는 데에 익숙했다.

“다 이해하네.”

어린 나이에도 제 오빠보다 실력이 좋았을 텐티아와, 후계를 두고 고민하는 제스터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예?”

“하지만 능력주의에는 함정이 있지. 그대 역시 알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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