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9화 (16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9화

(149)

발렌시아누스는 제스터와 발코니로 나가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백발 금안의 망나니 대공과 중년에 들어선 적발 적안의 완고한 기사.

둘 사이에서는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지만, 둘은 묘하게 한 액자 안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텐티아라는 끈이 둘을 이어줘서만은 아니었다.

제스터는 능력주의의 함정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이곳이 비록 수도 솔레타라온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저희 가문이 천 년에 거쳐 다스려온 땅입니다.”

“그리 깎아내릴 필요 없네. 아름다운 곳이군.”

“감사합니다. 예. 아름다운 곳이지요. 반으로 갈라서 나눠 줄 수는 없을 만큼요. ……첫째에게 물려주는 게, 제가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침음성과 함께 인정했다.

“그래. 그대도 그 비유를 알고 있겠지? 검술에 능한 첫째와 행정력이 뛰어난 둘째.”

검에 능한 첫째와 행정력이 뛰어난 둘째가 있다고 했을 때, 누가 후계가 되어야 하는가?

이건 가치 판단의 문제고, 답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판단은 주관이고, 주관은 주장이고, 왕공귀족들의 주장이 충돌하면 그때 전쟁이 났다.

그러나 누가 첫째인지는 사실 판단의 문제다.

그래서 왕공귀족들은 사실 판단의 문제로 후계의 조건을 지정했다.

분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제스터는 발렌시아누스를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기사 중의 기사였고, 계급에 충실했다.

발렌시아누스가 제 자식뻘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 알고 있고말고요. 물론 제 자식놈들은 둘 다 검술이 뛰어났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모호했으리라 생각했네. 텐티아 경은 천재지만, 렌티아 경도 그에 못지않던 거 같더군.”

“예. 제 마음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텐티아가 가문을 물려받는다면 가문의 이름을 더더욱 날릴 수 있겠지만, 렌티아가 가문을 물려받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는 맏이며, 빼어난 기사였다.

“제 욕심입니다. 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그 욕심 때문에 일을 망치지.”

발렌시아누스가 비릿하게 웃고, 제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경험에 따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알았습니다. 이대로 두 아이를 한곳에 붙들어놓으면 내가 못 할 짓을 하는 거구나. 저 두 애들이 서로 이 땅을 가지겠다고 싸우는 걸 볼 수도 있겠구나.”

그의 주름진 얼굴이 의무감과 완고함으로 가득 찼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한 명은 내보내야지요. 렌티아가 나가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텐티아가 나가야 할 이유는 있었죠. 둘째니까요.”

발렌시아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뜻이었지만, 제스터는 책망으로 착각했다.

“그 잘난 애를 어디에 시집 보내 버릴 수는 없던 노릇이었습니다. 쫓아내듯 아카데미로 보냈지요.”

“그래. 이해했다는 뜻이었네. 그런데 꼭 그렇게 쫓아내듯 보내야 했는가?”

발렌시아누스는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게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순간 제스터와 묘하게 말이 잘 통하는 듯한 감각의 실체를 알아챘다.

그 자신도 매일매일 숨 쉬듯 저지르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제 오라비를 원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

“렌티아 때문에 내가 쫓겨나는구나, 하게 생각하게 되면 안 되지요. 그 애도 성실히 살았고, 빼어난 기사인데 왜 그런 원망을 받아야 합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동의하네.”

“그렇다고 자책을 하게 놔두어서도 안 되지요. 둘째로 태어난 내 잘못이구나, 나 때문에 아버지와 오라비가 모두 마음고생을 겪는구나,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으나, 누군가는 가문을 떠나야 했다.

그러니.

“누군가는 칼을 뽑고 원망을 받아야지요. 독하게 살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빌어먹을 집구석. 내가 반드시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하고 황제의 기사가 되어 출세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 망할 애비의 얼굴을 보고 웃어줄 거다! 이렇게요.”

제스터가 열변을 토했고, 발렌시아누스는 흡족하니 웃었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았나? 텐티아 경은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하고 백금기사단에 입단했으며, 북부 대공의 기사 여럿을 한 번에 상대할 만큼 빼어난 실력자가 되었다네.”

“원망이 약하잖습니까. 아직도 이 집구석에 미련이 있는 거지요. 이깟 시골 늙은이에게 무슨 정이 그리 깊은지.”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제스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깟 시골 늙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해 보이는군. 하늘 같은 아버지였겠지.”

“어린 날의 왜곡된 기억입니다. 스승이 마음속에서 한없이 거대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지금 그 아이와 겨룬다면 다섯 합이나 겨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고 운을 떼며 제스터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마음껏 저를 원망하게 내버려 두어 주십시오. 전하. 그래야 이 시골 마을을 떠나 거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감정보다는 실제로 손에 쥔 걸 중시하는군. 훌륭한 위정자의 마음가짐이야. 그러나 출정은 나 역시 말리고 싶네. 그 다리로 기병 돌격은 무리야.”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한 번 더 부러트릴 생각도 했다.

텐티아의 아버지를 떠나, 다친 기사까지 전선에 나가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스터는 그 붉은 눈을 늠름하게 번뜩이며 말했다.

“저는 제 자식들에게 의무를 다하라 가르쳤고, 지금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눈빛이 텐티아와 꼭 빼닮아서, 발렌시아누스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의무에 성실한 건…… 부녀가 똑같군.”

“하하하. 다행이군요.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말도 말게. 얼마나 성실한지 나를 들들 볶아 댈 정도니까.”

제스터는 연륜 어린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그럼.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 * *

수확이 끝난 보리밭에서는 이삭 줍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숲속에 진을 친 고블린들이 곧 뛰쳐나올 거였고, 평야는 피로 물들 예정이었다.

“전군 준비하라!”

헬레나는 금발 머리를 질끈 묶고 붉은 눈을 빛내며 지휘봉을 들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숲 경계선에 고블린 척후병들이 하나둘 보였다.

숲까지의 거리는 약 1km.

기병 돌격으로 깔끔하게 쓸어버리기 딱 좋은 거리였다.

지휘부의 책상 위에는 넓은 지도와 워게임용 말들이 놓여 있었고, 종이 위에는 며칠간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변수들이 적혀 있었다.

피곤할 만도 했지만, 헬레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꿈꾸던 순간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진짜, 진짜다. 진짜 전투야. 내가 지휘관이라고.’

까칠하고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승리와 영광, 피와 복수!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피어나는 우정!’

지금껏 읽어왔던 소설이 몇 권이고, 지금껏 돌려온 워게임이 몇 판이었던가.

‘이제 겪어볼 때도 되었지.’

“정오에 바람 방향이 바뀌면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불과 연기로 숲을 가득 채울 거다. 그린스킨 놈들이 못 버티고 달려 나오면, 기사들이 돌격해서 분쇄한다.”

“예! 지휘관님!”

세 남작과 스무 명의 기사, 그들이 데려온 여든여 병의 종자와 중장기병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빠져나가려는 놈들은 양익의 장창병들과 궁수들이 제압한다. 궁수들은 멧돼지 기수나 오크 기수를 중심으로 노리도록!”

“예! 지휘관님!”

궁수 300명과 장창병 1,000명이 답했다.

한 덩어리로 뭉쳐 움직이는 그들을 하늘에서 보면, 황갈색 바탕에 검푸른 선이 움직이는 거 같았다.

저 멀리 숲 끄트머리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길이 일고, 자욱한 연기가 안개처럼 숲을 뒤덮었다.

병사 중에서는 물 적힌 수건이 있는데도 벌써 콜록거리는 자가 나왔을 정도였다.

“오오.”

“역시 황족이시군.”

“소문대로 대단한 마법사이신데.”

병사들과 기사들을 가리지 않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탄성에 대비되는 당황 어린 비명도 함께 들려왔다.

“취이익?!”

“쉬이익!?”

숲속이 들썩들썩하는가 싶더니, 그린스킨들이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 나왔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쳐 나왔는지, 무기를 안 든 놈들도 여럿이었다.

헬레나는 포식자처럼 웃으며 말에 올라갔다.

‘내 첫 전투는 압도적인 승전이겠구나!’

화려한 데뷔탕트를, 최고의 강철 무도회를 즐길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들 복수를 원하는가? 고블린 놈들이 훔쳐 간 작물과 가축, 오크 놈들에게 다친 부모 형제의 피 값을 받고 싶은가!”

그녀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울렸다.

“예. 전하!”

“그럼 지금 가서, 받아오도록 하지.”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머릿속에 피가 너무 돌아서인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불꽃 같은 함성이 기사들에게 울리고, 100여 기의 기사와 기병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는 렌티아와 제스터 역시 끼어 있었다.

* * *

발렌시아누스는 불을 지른 후, 텐티아의 호위를 받으며 지휘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오크 몇 마리와 마주쳤지만, 연기를 먹고 쿨럭거리는 지친 오크와 정화 마법 걸린 투구를 쓴 기사 사이에는 승부가 설립되지 않았다.

중간중간 고블린 늑대 기수들이나 오크 멧돼지 기수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텐티아의 검 앞에서 반으로 나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역시 경이군.”

“과찬이십니다.”

“어서 돌아가도록 하지. 마음이 급해 보이는데.”

“그래 보이십니까?”

“아닌가?”

텐티아는 그냥 전(戰)이면 몰라도 설전(舌戰)으로는 궤변가 발렌시아누스를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했다.

유쾌하게 머리를 넘긴 금안의 황족이 일순 무언가에 발끝이 걸린 듯 휘청였다.

다리 다친 제스터가 걱정되어 걸음을 재촉하는 거냐고 비꼬는 방식으로 묻는 거 같기도 했다.

텐티아는 사람이 어찌 저런 방법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나 싶어 기겁하고, 발렌시아누스는 이 실수가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다급히 헛기침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오해일세! 나 역시 기마 돌격을 해보고 싶었네. 어서 가서 준비하도록 하지.”

“지금 가서 준비하셔도 이미 늦었을 겁니다.”

“그럼 하마 전투라도 참가해야 하지 않겠나? 그때가 더 걱정일 텐데.”

정곡이었다.

말 위에서는 부목 대고 앉아만 있으면 되지, 하마 전투 때는 뛰고 굴러야 했다.

“……감사합니다.”

텐티아가 못 이기는 척 말하고, 발렌시아누스는 한 번 더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에는 비겁이 어쩌고 정정당당이 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거의 안 하더군. 나는 내가 남작들의 뺨을 쳤을 때 경이 기겁할 줄 알았네.”

텐티아는 뭔가 궤변에 휘말릴 거 같은 불길한 기분으로 답했다.

“그들은 자기가 맞고 돌아가야 휘하 기사들을 뭉칠 수 있다는 걸 알지요. 그들이 그걸 바라는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숲에 불을 지르는 건 어떤가?”

“그린스킨 상대로는 다 괜찮습니다.”

“적군 상대로는?”

“적들이 회전을 벌여 보자고 나왔을 때 불을 지르면 비겁한 짓입니다. 적들이 버티고만 있을 때 불을 지르면 그건 용인 가능한 전술입니다.”

텐티아는 막힘 없이 답했고,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마수나 침식자들하고 싸울 일이 많으면 좋겠군. 무슨 짓을 해도 효율적인 전술이라고 칭송받을 테니.”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목소리였다.

텐티아는 이제 그냥 둘 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습니다.”

둘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막 숲 끝에 다다랐고, 기사들이 그린스킨들을 압도적으로 도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제대로 된 무장도 없이 쫓겨 나온 그린스킨들과 중무장하고 사기 오른 기사들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빠져나갈 늑대 기수나 멧돼지 기수를 걱정하는 건 우스운 노릇이었다.

궁수들은 활시위 한 번 당겨 보지 못하고 회전이 끝나는 걸 바라보았다.

헬레나가 신이 나서 외쳤다.

몸에 딱 붙는 곡선을 그리는 황동빛 갑옷에 봄볕이 부서졌다.

“소탕전을 시작한다! 하마하고 숲에 돌입한다! 천천히, 침착하게, 기사들과 병사들이 섞여 전진하도록! 다 끝내 놓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무기를 도끼나 단창으로 바꿔 든 병사 1,000명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고, 검을 뽑은 기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그 행렬의 선두로 향하며 말했다.

“전하. 기사다움은 때때로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지요.”

발렌시아누스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노란 눈을 부릅떴다.

“경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제가 잘못 생각한 부분도 있던 거 같습니다. 멋진 걸 먼저 보여 드려야 전하도 혹하실 텐데요.”

기사의 낭만을 알려 줘야 그에 따르는 의무도 달콤해 보일 터였다.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를 광명의 세상에 끌어 올리겠다는 다짐은 여전했다.

텐티아는 면갑을 올리며 늠름하게 웃었다.

“영광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전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