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0화
(150)
소탕전은 전장에서 제일 즐거운 순간이었다.
이기는 건 언제나 재미있고, 소탕전에서는 계속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내린 봄비로 젖은 풀은 용언의 불길과 만나 자욱한 연기를 피웠고, 오크와 고블린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진군해온 하마 기사들과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병사들은, 불꽃 같은 분노를 터뜨리며 제 가축을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공격한 그린스킨들을 해치웠다.
“동시에 찔러!”
“하나, 둘, 셋!”
푹! 푹!
오크 병사가 열댓 발의 창을 배에 맞고 바닥을 굴렀다.
도끼를 든 병사가 힘껏 내리쳐 목을 잘랐다.
병사가 오크의 목을 치켜들고 환호하고, 오크가 목걸이로 만들어 차고 있던 금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귀 전 온갖 전장을 다 돌아다녀 본 발렌시아누스로서는 썩 정겹고 추억 어린 광경이었다.
헬레나는 기사 둘과 용감한 병사들 사이에 섞여서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날뛰고 있었고, 렌티아는 묵묵히 의무를 다했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그러했다.
텐티아는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격전지로 향했다.
“아악!”
“강한 놈이다!”
“기사님! 도와주십시오!”
키가 2.5m도 넘어 보이는 오크 대전사가 녹색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며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놈은 단창 정도 길이의 자루 끝에 흉악하고 긴 칼날이 달린 글레이브를 다뤘는데, 병사들의 단창과 도끼는 놈의 글레이브와 닿자마자 부서지거나 튕겨 나갔다.
용케 등 뒤에서 창을 내질러 봐도, 단단한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갈 뿐이었다.
“인간! 찢고 죽인다!”
놈이 근육질 녹색 팔을 뻗어 병사 하나의 머리를 쥐어짜려 했다.
텐티아는 그 순간 급강하하는 와이번 처럼 돌진해 오크 대전사를 들이받았다.
쿵!
오크 대전사가 개구리처럼 뒤로 나동그라지고, 텐티아는 투구의 면갑을 올려 얼굴을 보인 다음 검을 겨누었다.
이는 자신의 정체를 주변에 밝히고, 자신이 겁먹지 않았음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그녀가 늠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순순히 목을 내놓으면 고통 없이 끝내 주마.”
연기 자욱한 숲속에서 붉은 망토를 후광처럼 두르고 나타나, 병사들을 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쟁신의 사도와도 같았다.
오크 대전사는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일어서 글레이브를 들었다.
긴 날에 녹색 기운이 안개처럼 어리는 걸 보며, 텐티아는 그녀의 검에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고통을 바란다면 기꺼이 주도록 하겠다. 거절할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오크 대전사가 글레이브를 내리쳤지만, 텐티아는 검을 눕혀 들며 바싹 붙어 그 힘이 한 점에 모이기 전에 받아냈다.
캉, 하는 격렬한 반발음과 함께 불꽃이 튀고, 병사들이 하나같이 감탄했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와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장신이었지만, 오크 대전사는 2.5m의 괴물이었고, 그런 괴물이 온 체중과 마나를 실어 내리친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는 모습은 감탄을 사기에 충분했다.
“텐티아 경!”
“힘내십시오!”
텐티아는 쏟아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웃었다.
그녀는 눕힌 검 끝을 아래쪽으로 내리며 글레이브가 검을 타고 미끄러지도록 했고, 동시에 칼자루 끝에 달린 쇳덩이로 오크 대전사의 손목을 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뼈에 금이 가고, 일순 그 거대한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텐티아는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다시 쳐들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츠카아악!!
원을 그리는 궤적에 마치 쥐불놀이를 하듯 붉은빛이 형형하게 이어지고, 목을 잃은 오크 대전사가 바닥을 굴렀다.
“텐티아 경! 감사드립니다!”
“텐티아 경께 광명신의 영광이 깃드시기를!”
“기사님 만세!”
병사들이 감격에 찬 목소리를 내지르며 나아갔다.
엘프와 오거의 피가 섞인 혈통인 기사들은 일반 병사들이 보기에 신의 사도와도 같았다.
귀족들과 달리 그래도 만나 볼 일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텐티아는 손을 번쩍 들어주기도 하고, 한 병사와 무기를 맞대 주기도 하고, 용감히 오크를 죽인 병사의 창끝에 손수건을 묶어 주기도 했다.
“내 인사를 받아주셨다!”
“아니야! 나야!”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때마다 찬사, 감격, 감사가 쏟아졌다.
* * *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 전장은 기사가 가장 빛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영웅이지요.”
“그래 보이는군.”
발렌시아누스가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제 등만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저 빛나는 눈동자를 보십시오. 한 인간이 저렇게 격렬한 용기를 낼 일이 언제 있겠습니까?”
“경 말이 맞네.”
“그 용기와 열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바로 기사입니다. 불경한 말이오나, 제 이름을 저들이 불러줄 때, 저는 제가 광명신과 함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분명 그럴 걸세. 신께서 그대 같은 기사를 외면하시겠는가?”
발렌시아누스는 선선히 그 찬란함을 인정했다.
그가 보기에도 텐티아는 너무나 영광스러웠다.
기사는 전설 속 영웅이 된 기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도 회귀 전에 몇 번 바랐던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발렌시아누스! 발렌시아누스!’
아주 가끔, 수많은 병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 역시 신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생에서 그 영광을 오로지 제이릴리스와 텐티아에게 돌리기로 했다.
그는 그가 텐티아처럼 ‘기사다움’을 위해 죽을 수 없음을, 죽어서는 안 됨을 알았다.
텐티아는 더 강한 적에게도 기꺼이 돌진할 것이나, 그는 아니었다.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가 될 수 없듯, 발렌시아누스 역시 텐티아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는 그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에 이례적인 동경과 아주 약간의 슬픔이 어린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의 앞에 선 텐티아를 바라보았다.
텐티아는 한 무리의 병사들과 함께 나아갔다.
“아버지?”
그때 그녀는 숲속 저 깊은 곳에서 발광하는 오크 주술사를 보았다.
놈의 해골 지팡이에 녹색 안광이 번뜩이는 걸 보았고, 그의 아버지가 오크 주술사에게 달려드는 것도 보았다.
오크 주술사가 고개를 저었다.
비열한 우월감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까아아아아아아악!”
놈이 돼지 같은 아가리에서 오크보다 까마귀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텐티아는 몰랐으나, 발렌시아누스는 아는 비명이었다.
그는 여전히 알첸베르사 수도원의 비극과 기적을 기억했다.
“텐티아 경! 아니, 헬레나!”
“까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비명이 아니라 정신 파동이었다.
무형의 파동이 일대를 휘쓸고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악!”
“내 귀, 내 귀!”
병사들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눈이 돌아가 옆 병사에게 추악한 욕설을 퍼붓는 자도 있었다.
고강한 텐티아는 버텼지만, 그녀를 따르던 병사들은 버티지 못했다.
“끄으으윽!”
“죽어! 죽어!”
“기사님..흐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정도면 고상한 거였고, 갑자기 옆 병사에게 주먹을 날리는 자, 음욕 가득한 눈을 하고 텐티아에게 다가오는 자까지 있었다.
“정신 파동이라고?”
텐티아는 당황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등 뒤에 굵은 나무가 와 닿았다.
“으흐흐흐.”
병사 몇몇이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일단, 누워 있도록 해라.”
양팔이 빠진 채 차곡차곡 쌓였다.
“전하! 앞쪽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기사님이, 기사님이 쓰러지셨습니다!”
“병사들 몸에 막 깃털이 돋고,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중후방에서 총지휘를 맡던 헬레나는 일순 당황했다.
숲속으로 진군한 모든 기사가 각 부대에서 병사 한 명씩을 보내 왔는지, 수십 명의 전령이 몰려들어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다행이게도, 헬레나는 전장의 온갖 비사와 막장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침착해라.”
황동기사단 역시 적군이 침식자를 무기로 쓸 경우에 대해 대비하는 훈련과 워게임을 했다.
“전군 질서 있게 후퇴한다! 새끼 척살조와 인질 구출조부터 숲 밖으로 빠지도록!”
“예, 예!”
“기사들은 병사들과 함께 후퇴한 뒤 숲 외곽에서 재결집하고, 남작은 전령을 보내 사제들을 더 데려오시오.”
“침식이 시작된 병사의 척살 기준은……!”
“상황에 따라 기사의 재량에 맞기되, 눈에서 깃털이 나기 시작했다면 바로 베어라.”
그건 뇌까지 침식되었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침착해라! 그래 봐야 한 놈이다!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우리가 함께한다!”
* * *
“텐티아 경! 일단 후퇴해야 하네! 경의 아버지는 병사들이 챙겼어.”
발렌시아누스는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텐티아를 잡아끌었다.
오크 주술사는 정신 파동을 다섯 번 더 터뜨렸고, 근거리까지 접근했던 병사 50여 명과 죽은 고블린과 오크 100여 마리가 침식되었다.
인간과 그린스킨을 가리지 않고 온몸이 검은 깃털과 하얀 뼈, 적갈색 근육으로 뒤덮인 모습은 무척 기괴하고 흉측했다.
하지만 텐티아는 바윗덩이처럼 버티고 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송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했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무얼 말인가?”
“전장은 기사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이며, 저희는 이곳에서 영웅이 됩니다. 제 등만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저 눈동자를 보십시오.”
발렌시아누스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텐티아는 기사 중의 기사였고, 쉽게 적에게 등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 제이릴리스와 싸운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리라.
발렌시아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조차도 텐티아가 보기에는 무표정으로 여겨졌다.
“그 용기와 열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바로 기사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안 들리는 척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싸워 본 특성의 침식자였고, 그는 그걸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사들 틈바구니에서 그린스킨 무리가 이렇게까지 오래 버틸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면, 이건 치밀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아니. 천만 분의 하나라도 텐티아가 침식되게 할 수는 없었다.
“알겠네. 일단 검에 사제의 축성부터 받고 다시 오도록 하지. 도망가는 게 아닐세. 헬레나가 말하지 않았나? 숲 외곽에서 다시 공격할 거야.”
“전하. 제가 후퇴하면 병사들이 적어도 2백 명은 더 죽을 겁니다.”
“그깟……!”
습관적인 위악으로 터져 나온 도발적인 폭언은 이어지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이 병사들이 텐티아의 영지와 텐티아의 주변 영지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다.
“제가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흔해 빠진 언데드 따위가 아니었다.
선착장에서 르세나와 함께 싸웠을 때와는 달랐다.
막 일어난 침식자가 수백.
텐티아는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는 침식자 150기를 앞에 두고 당당히 가슴과 어깨를 펴고 턱을 당겼다.
면갑 아래 붉은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보검 ‘화한’에는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강렬히 빛났다.
아직도 연기가 빠지지 않은 숲,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앞으로 달려오는 검은 깃털과 붉은 눈의 파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그 역시 꽤 즐겨 사용하던 논리였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텐티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뒤 질질 끌고 갈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지 않은 건 자신의 힘으로는 저 투구를 뚫고 텐티아를 기절시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질 거 같으면 바로 도망쳐야 하네. 그리고 내가 다시 후퇴하자고 하면 그때는 꼭 후퇴하겠다고 약속해 주게.”
비인간적인 황금색 눈에 어울리지 않는 절박함이 물거품처럼 올라왔다.
텐티아는 그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거 같았다.
“설마 바로 후퇴하자고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게까지 글러 먹지는 않았…… 확신은 못 하겠군.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고 배웠네.”
발렌시아누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품속의 파란 약을 확인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 울지 못해 웃는 거였다.
‘화정까지 먹었으니 더 강해졌겠지. 이제 위력이 문제가 아니라 제어가 문제다.’
비룡화가 되는 만큼 불의 힘을 쓰기도 편해지는데, 그걸 약으로 되돌리고 있으니 침식과 회복을 거듭하며 몸에 무리가 가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이 추악한 새끼들이 다시 기어 나왔구나!”
그는 짜증을 분노로, 분노를 힘으로 바꾸며 단숨에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실처럼 뽑혀 나온 황금빛 기운이 흘러넘치고, 일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빨려들었다.
화르르르!
그의 손짓을 따라 일대에 수백 개의 불덩어리가 띄엄띄엄 피어났다.
불은 점에서 선이, 선에서 높게 치솟아 면이 되고, 그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방으로 내달리던 침식자들을 가두고 또 불태웠다.
비인간적인 금빛 눈의 황족이 하늘을 향해 광폭한 웃음을 터트리며 불길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시무시했다.
텐티아는 그를 뒤로하고, 병사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돌진했다.
수백 개의 마법진이 새겨진 갑옷과 갈고 닦은 무예, 화염 내성 망토는, 불지옥 속에서도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저 앞에서 까마귀의 날개를 단 오크 주술사가 침식자들에 둘러싸여 포효했다.
* * *
맑던 하늘에 봄비가 내렸다.
마나를 머금은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는 서로를 부축하고 숲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발렌 대공!”
“텐티아 경!”
“동생아!”
그을음이 묻은 망토와 수백 개의 생채기가 난 백금 갑옷, 어떤 공격을 받은 건지 갑옷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
하얀 제복에 박힌 수십 개의 검은 깃털.
그리고 둘의 손에 잡힌 오크 주술사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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